역사/중국

후진(後秦)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4. 23:40
반응형

오호 십육국 시대 강족이 후진(後秦)은 384년부터 417년까지 33년간 3명의 황제가 있었다. 정리해 본다.


오호십육국 시대 후진(後秦) 황제 계보


진시조(秦始祖) 경원황제 (景元皇帝) 요익중(姚弋仲)

무소제 추증/ 능호 고릉(高陵)

요약: 요익중(姚弋仲, 280년 ~ 352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에 활동한 강족(羌族)의 수장으로 후진(後秦)을 건국한 요장(姚萇)의 아버지. 후진이 건국된 이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다. 요익중은 남안(南安) 출신으로 강족의 수장이다. 313년 기근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 옹주(雍州 산시 성 중부)에 거주하며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했다. 전조(前趙)의 유총(劉叢)은 요익중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강족을 이끌고 전조에 복속하였다. 329년에 후조(後趙)가 전조를 멸망시키고 관중을 장악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으며, 333년에 후조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하였다가 석호(石虎)에게 패배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강족 수십만 명을 이끌고 관동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요익중은 석호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349년에 관중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병에 걸린 석호가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요익중은 석호를 찾아가 그를 꾸짖고 총사령관이 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던 도중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후계자 분쟁에 휩싸이자 요익중은 섭두(灄頭)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염위(冉魏)와 후조의 전쟁에 개입하여 후조를 돕기도 하였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姚襄)을 보내 저족의 포홍(蒲洪)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염위, 후조, 포홍 등의 세력과 대립을 거듭하였다. 351년 요익중은 동진(東晉)에 복속하여 관작을 받고 동진의 영역으로 이동을 계획하였으나 352년에 사망하였다. 요익중의 유골은 후계자 요양이 보관하였는데, 357년에 관중으로 돌아간 이후 부생(苻生)에 의해 왕에 준하는 예로 매장되었다.


위무왕 (魏武王) 요양(姚襄): 무소제 추증

요약: 요양(姚襄, 331년 ~ 357년)은 요장(姚萇)의 형이다. 후진이 건국된 이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존되었다. 요익중(姚弋仲)의 다섯째 아들로 331년에 태어났다. 능력과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주위의 추천을 받아 요익중의 세자(世子)가 되었다. 349년에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冉魏)의 분쟁에 개입하고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 352년 요익중이 죽자 요양은 발상하지 않고 동진(東晉)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살아남았다. 요양은 강족을 이끌고 동진의 초성(譙城)에 주둔하였다. 은호(殷浩)의 북벌에 종군하여 사상(謝尚)을 구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요양은 동진에 배반할 뜻을 품었으고 그를 의심하는 은호와 대립한다. 353년 은호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선봉이 된 요양은 매복하고 있다가 은호의 본군을 격파하고 회남(淮南) 지역을 약탈하고 점거한다. 한때 동진의 수도 건강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곧 동진 조정에 잘못을 사과하고 표면적으로 복속한다. 354년 전연(前燕)에 복속하고 355년 회남을 떠나 허창(許昌)을 점령하고 낙양(洛陽)을 공격한다. 그러나 356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시작하여 요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크게 패배해 산시성 평양(平陽)으로 도망쳤다. 평양에서 과거의 부하 윤적을 만나 그 세력을 합친 요양은 병주의 군벌 장평과 싸워 패배하고 곧 장평과 화해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357년 요양은 전진의 관중을 공격하는데 관중의 강족이 호응하여 한때 장안(長安)을 위협하지만 곧 토벌군에 패배하고 붙잡혀 살해당했고 요양 휘하의 강족은 동생 요장이 수습하여 전진에 항복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제1대 진태조(秦太祖) 무소황제 (武昭皇帝) 요장(姚萇)

연호 백작(白雀) 384년 ~ 386년, 건초(建初) 386년 ~ 394년/재위기간 384년 ~ 393년/ 능호 원릉(原陵)

요약: 요장(姚萇, 331년 ~ 393년, 재위:384년 ~ 393년)은 후진(後秦)의 초대 황제로 자는 경무(景茂),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소황제(武昭皇帝), 강족의 수장 요익중(姚弋仲)의 24번째 아들이다. 352년 요익중이 죽자 형인 요양(姚襄)이 뒤를 잇고 동진(東晉)으로 부족을 이끌고 이동하려 했는데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다. 요양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자 요장은 요양에게 말을 내주고 희생하려고 했는데 마침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살아남았다. 이 일로 인하여 요장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요양의 총애를 받았다. 357년 요양이 전사하자 요장은 부족을 이끌고 전진의 부생(苻生)에게 항복했다. 부견(苻堅)의 치세에 요장은 강족 부대를 이끌고 익주(益州)를 정복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393년에는 용양장군(龍驤將軍)에 임명되었다.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요장은 촉 방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비수에서 부견의 군사가 와해되자 요장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 모용홍(慕容泓)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장은 부견의 명을 받아 모용홍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사령관 부예(苻睿)가 섣부른 작전을 펼쳐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전에 대해서 부견이 요장에게 책임을 묻자 요장은 북지(北地)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한다.

건국 초의 후진은 부견의 공격으로 큰 위기를 겪지만 모용홍이 장안을 공격하자 부견이 퇴각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요장은 부견과 모용홍, 모용충(慕容沖)이 장안을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주변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대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용충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동맹을 맺었다. 385년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고 부견이 장안을 빠져나오자 요장은 부견을 포로로 잡았다. 요장은 부견에게 선양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하자 부견을 살해한다. 386년 선비족이 떠난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장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의 전진계 세력들을 공략하였는데, 386년 말에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하여 요장에 대항하고 이후 진주와 옹주(雍州 : 산시 성 중부) 일대에서 전진의 부등과 후진의 요장은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389년에는 수도인 안정(安定)을 공격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대계(大界)에 있던 전진군의 치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에도 전진군이 후진에 대하여 파상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요장은 수비 태세를 굳히면서 세력을 강화시켰다. 393년 12월에 병사하였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제2대진고조(秦高祖) 문환황제 (文桓皇帝) 요흥(姚興)

연호: 황초(皇初) 394년 ~ 399년, 홍시(弘始) 399년 ~ 416년/재위기간 394년 ~ 416년/ 능호 우릉(偶陵)

요약: 요흥(姚興, 366년 ~ 416년, 재위:394년 ~ 416년) 자는 자략(子略),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환제(文桓帝). 요장(姚萇)의 장자로 366년에 태어났다. 요장이 부견(苻堅)의 휘하에서 복무할 때 요흥은 태자의 사인(舍人)이었다. 384년에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자 요흥은 장안을 탈출해 요장에게 왔고 태자로 책봉된다. 요장이 전진(前秦)의 부등(苻登)과 전쟁을 벌일 때 요흥은 장안을 지키면서 후방을 안정시켰다. 393년 말 요장이 병으로 사망하자 요흥은 요장의 상을 숨기고 지방의 동요를 막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얼마 후인 394년 요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부등은 총력을 기울여 후진을 공격하지만 패한다. 부등을 물리친 요흥은 요장의 상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고 즉시 부등을 추격 마모산에서 부등을 살해한다. 요흥은 숙부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의견을 따라 정치를 행하여 국내 안정에 노력하였다. 또한 주변 세력에 대해서도 우호관계를 맺어 북위(北魏)·후연(後燕)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396년에는 옛 전진 세력의 근거지였던 상규(上邽)를 점령하고 이듬해 동진의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399년 낙양을 점령하는데 이 군사 행동에 한수(漢水)와 회수(淮水) 이북의 군현들이 후진에게 항복한다. 400년 농서를 공격 서진(西秦)을 멸망시켰고 401년 후량(後凉)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해부터 북위와 외교 마찰이 생겨 북위의 공격을 받았으며, 402년에는 시벽(柴壁)에서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이후 북위와 후진은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 403년 후량을 공격하고 멸망시켰고 서량(西凉), 북량(北凉), 남량(南凉)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었다. 405년에는 구지도 복속시켰다. 한편 장안에는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의 모친과 부인이 살고 있었다. 407년 말, 모용초가 요흥에게 이들을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자 요흥은 송환의 조건으로 태악(太樂)을 바치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요흥은 불교에 심취하여 401년 후량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왔다.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로 삼고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대승정(大僧正)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405년 말, 동진(東晉)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劉裕)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락하였다. 406년에는 남량에 양주(凉州)의 수도 고장(姑臧)을 빼앗겼으며 사실상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407년에는 유발발(劉勃勃)이 반란을 일으켜 하(夏)를 건국하는 등 내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후진은 하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쇠퇴하였다. 409년에는 멸망시켰던 걸복부의 서진이 독립하였고 구지도 자립하였다. 410년에는 후촉(後蜀)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요흥은 413년에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요흥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요흥이 총애하던 아들 요필(姚弼)은 권력을 잡으려 414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요흥이 병에서 회복되자 실패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요필을 처벌하지 않았고, 415년에 다시 요흥이 병으로 쓰러지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진압되었고 요필은 장안 성내에 유폐되었다. 416년, 요흥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요필의 도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흥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서 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필을 처형하여 후계자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제3대 요홍(姚泓)

연호 영화(永和) 416년 ~ 417년/ 재위기간 416년 ~ 417년

요약: 요홍(姚泓, 388년 ~ 417년, 재위: 416년 ~ 417년) 자는 원자(元子), 묘호와 시호는 없다. 요흥(姚興)의 장자로 388년에 태어났다. 394년에 요흥이 황제에 즉위하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요홍은 학문과 시를 좋아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나약했기 때문에 요흥의 걱정을 샀고 동생들이 태자 자리를 넘보기도 했다. 요흥은 요필(姚弼)을 총애하여 요필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이로 인해 요필은 요홍을 몰아내고 태자가 되려 하였다. 요필은 414년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415년에도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되고 유폐되었다. 요홍은 요필에게 자비를 베풀어 요필의 도당들을 대부분 살려주었다. 416년 초 요흥의 병이 깊어지자 요홍은 요흥을 궁으로 맞아들여 임종을 지키려 하였다. 이에 요필의 도당들은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반을 일으켰고 궁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요흥이 병을 무릅쓰고 나타나자 반란은 실패하고 요필은 처형되었다. 요흥이 다음날 죽자 요홍이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홍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후진을 공격한다. 요홍은 이에 대응하여 숙부 요소(姚紹)에게 군권을 맡겼으나 뒤이어 일어난 요의(姚疑)의 반란으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북벌군은 허창을 거쳐 낙양까지 점령한다. 417년이 되자 하동의 포판과 동관에 병력이 집중된 틈을 타서 안정을 수비하던 요회(姚恢)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회의 반란은 요소가 동관에서 돌아와 진압하지만 이 반란으로 후진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유유의 북벌군은 포판과 동관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요소도 진중에서 분사하여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요홍은 마지막 대군을 이끌고 출진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관을 통해 들어온 북벌군 분대를 공격하고 소수의 북벌군이 분전하여 요홍은 대패하고 뒤이어 위수를 거슬러온 북벌군 별동대에 의해 장안(長安)이 함락되어 후진은 멸망하고 요홍은 건강(建康)으로 보내져 참수 당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