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십육국 남연(南燕) 설명, 남연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5. 14:12
반응형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남연(南燕 398년~410년: 2대 12년)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모용덕(慕容德)에 의해 후연(後燕)에서 분리 독립해 건국된 나라로 국호는 연(燕)이다. 같은 시대 연으로 하는 국가가 5개가 있어 구분하기 위해 남연이라 부른다.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 남연(南燕) 설명

396년 말부터 북위(北魏)가 후연을 침공하고 하북 일대가 북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모용덕은 후연의 승상 령기주목(丞相·領冀州牧)에 임명되어 업(鄴)에서 장기간 농성을 하다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이 함락되고 모용린(慕容麟)이 중산에서 도망쳐 오자 모용덕은 북위의 위협을 느끼고 활대(滑臺)로 근거지를 옮겼다. 398년 모용덕은 활대에서 연왕(燕王)을 자칭 남연이 건국된다. 모용덕은 활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하는데 399년 수하에 있던 망명세력 부광(苻廣)이 반란을 일으키고 뒤이어 활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북위에 항복한다. 이에 근거지를 잃은 모용덕은 수하들의 건의에 따라 남하 연주(兗州) 북부를 장악하고 399년 말에는 동쪽의 청주(靑州)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벽려혼(壁閭渾)을 쳐서 무너뜨리고 광고(廣固)를 수도로 정한다. 400년 모용덕은 광고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정하고 이름을 모용비덕(慕容備德)으로 고친다. 모용덕은 청주와 연주 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내치를 다졌고 동진(東晉)이 환현(桓玄)의 찬탈로 인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쑤 성 일대를 점령하려 하지만 황제에 즉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장액(張掖)에 두고 온 가족들이 몰살당한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으로 병에 걸렸다. 나이가 많았던 모용덕은 병이 재발하고 이로 인해 남연은 동진 정벌을 여러 차례 추진하지만 번번이 무산된다. 405년 모용덕은 형 모용납(慕容納)의 유복자가 장안(長安)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았다. 장안에 거주하고 있던 모용납의 아들 모용초(慕容超)는 사신을 따라 단신으로 광고를 찾아왔고 모용덕은 조카임을 확인하자 매우 기뻐하며 모용초를 태자로 삼았다. 모용초는 남연으로 찾아오는 과정에서 남연의 대신 모용법(慕容法) 등과 알력을 가졌다. 모용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모용초가 뒤를 이었다. 모용초는 남연의 옛 신하들과 대립하여 친우인 공손오루(工孫五樓)를 중용 측근 정치를 펼쳤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용법, 모용종(慕容鐘), 단굉(段宏) 등은 406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이들은 모두 북위에 항복한다. 모용초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사치와 폭정을 일삼았다. 모용초의 생모 단씨(段氏)와 부인 호연씨(呼延氏) 후진(後秦)에 머물고 있었는데 모용초는 407년에 이들의 송환을 후진의 군주 요흥(姚興)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요흥은 이들을 송환하는 대가로 남연이 후진에 신속하고 태악(太樂)을 바치도록 하였고, 모용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후진에 신속한다. 409년 모용초는 후진에 바쳐 없어진 태악을 다시 구하기 위해 동진을 공격하여 악공과 백성들을 약탈하자 동진은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한다. 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다 전투에서 패하고 모용초는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지만 410년 성이 함락되고 남연은 멸망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남연(南燕) 군주 계보


제1대 연 세종 (燕世宗) 헌무황제 (獻武皇帝) 모용덕(慕容德)

연호: 건평(建平) 400년 ~ 405년/재위기간 398년 ~ 405년/ 능호 동양릉(東陽陵)

요약: 모용 덕(慕容 德, 336년 ~ 405년)은 남연(南燕)의 초대 황제로 자는 현명(玄明),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무제(獻武帝). 전연의 초대 군주 모용황(慕容皝)의 막내아들로 어머니는 공손씨(公孫氏). 모용준의 재위 시기 양공(梁公)에 책봉되고 모용위의 재위 시기 범양왕(范陽王)에 책봉된다. 396년에 환온(桓溫)의 북벌군의 침입에 맞서 모용수와 함께 전쟁에 나서 큰 전공을 세웠다. 370년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하자 모용덕은 장액(張掖)태수에 임명되고 아들들과 어머니 공손씨, 동모형 모용납(慕容納), 모용납의 부인 단씨(段氏) 등과 함께 장액으로 이주한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따라 종군하는데 가족들을 모두 장액에 남겨두었다. 모용덕은 떠나면서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몰락한 이후 384년부터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와 전쟁을 벌였다. 이 소식이 장액에 전해지자 모용덕의 일족은 모두 처형되고 어머니 공손씨와 형수 단씨만 살아 남았다. 모용덕은 모용수에 의해 다시 범양왕에 책봉되고 단씨(段氏)를 새로 부인으로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는 못했다. 396년에 모용수가 죽자 모용덕은 업(鄴)의 수비를 맡게 된다. 396년 말부터 북위(北魏)가 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화북 대부분이 북위군의 지배하게 놓이게 되었다. 모용덕은 업에서 오랫동안 농성하는데 397년 10월에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이 함락되자 모용덕은 위협을 느끼고 업을 포기하고 황하를 건너 활대(滑臺)로 근거지를 옮겼다. 398년, 활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모용덕은 모용린(慕容麟)의 건의에 따라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원년을 칭했다.(남연 건국) 399년 망명 세력인 부광(苻廣)이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덕이 부광을 토벌하러 출정하자 활대에서도 모반이 일어나 북위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잃은 모용덕은 부하들의 건의를 따라 남하하여 연주(兗州) 북부를 장악하고 뒤이어 동진하여 청주(靑州)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벽려혼(壁閭渾)을 쳐서 무너뜨리고 광고(廣固)를 수도로 정한다. 400년 모용덕은 광고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정한다. 그리고 이름을 고쳐 모용비덕(慕容備德)이라 한다. 모용덕은 청주와 연주 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내치를 다졌고 동진(東晉)이 환현(桓玄)의 찬탈로 인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쑤 성 일대를 점령하려 하지만 모용덕은 나이가 많았고 황제에 즉위하고 얼마 있지 않아 가족들이 장액에서 변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린다. 이로 인해 동진 정벌은 번번이 무산되고 405년 모용덕은 모용납의 유복자가 장안(長安)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았는데 장안에서 모용초가 증표인 칼을 들고 찾아오자 모용덕은 그를 태자로 세웠다. 모용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모용덕의 장례는 10여 개의 가짜 관을 만들어 실제 능은 산속의 계곡에 은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짜 릉 동양릉(東陽陵)을 만들었다고 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목황제 (穆皇帝) 모용납(慕容納): 말주 추숭

제2대 말주 (末主) 모용초(慕容超)

연호: 태상(太上) 405년 ~ 410년/ 재위기간 405년 ~ 410년

요약: 모용 초(慕容 超, 385년 ~ 410년, 재위 : 405년 ~ 410년)는 남연(南燕)의 마지막 군주. 자는 조명(祖明) 묘호나 시호는 없다. 모용초는 전연의 북해왕(北海王) 모용납(慕容納)의 아들로 어머니는 단씨(段氏).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납의 동생 모용덕(慕容德)은 전진(前秦)의 부견에 의해 장액(張掖)의 태수로 임명되고 모용납은 모용덕을 따라 온 가족을 이끌고 장액으로 이주한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따라 종군하는데 가족들을 모두 장액에 남겨두고 떠나면서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몰락한 이후 384년부터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와 전쟁을 벌였다. 이 소식이 장액에 전해지자 장액을 지키던 부창(苻昌)은 모용덕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는데 모용납, 모용덕 형제의 어머니 공손씨(公孫氏)는 나이가 많아 처형을 면했고 모용납의 부인 단씨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결정하지 못해 감옥에 남아 있었다. 이때 감옥을 관리하던 관리인 호연평(呼延平)은 과거 모용덕의 은혜를 받은 일이 있어 공손씨와 단씨를 탈출시켜 주었고, 함께 강족(羌族) 부락으로 도망쳤다. 호연평의 보호 아래 단씨는 모용초를 낳았다. 모용초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공손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용초에게 모용덕이 증표로 남긴 금칼을 물려주었다. 얼마 후 이들은 후량(後凉)의 고장(姑臧)으로 이주하였으며 후량이 멸망하자 다시 후진(後秦)의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호연평이 죽자 모용초는 어머니 단씨의 뜻에 따라 호연평의 딸과 결혼하였다. 모용초는 자신의 숙부가 남연의 황제였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 하여 후진의 천왕 요흥에게 등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405년, 모용초는 모용덕이 보낸 밀사를 통해 모용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밀사를 따라 모용덕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모용초는 모용덕의 부하 모용법(慕容法)과 알력을 가졌다. 모용덕은 모용초가 조카인 것을 확인하고 곧 태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뒤를 이어 남연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옛 부하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자신의 친우인 공손오루(工孫五樓)를 중용, 측근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용법, 모용종(慕容鐘), 단굉(段宏) 등은 406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모용초는 모반을 진압하여 불만세력을 일소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407년, 모용초는 후진에 사신을 보내 어머니와 부인 호연씨를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모용초의 요구에 대한 조건으로 남연이 후진에 신속할 것과 태악(太樂)을 바칠 것을 걸었다. 이에 모용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태악을 바치고 어머니와 부인을 돌려 받았다. 409년, 모용초는 태악을 다시 구하기 위해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악공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동진의 권력자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하였다. 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모용초는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였다. 410년에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힌 모용초는 건강(建康)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