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십육국 후량(後涼) 설명, 후량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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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후량(後涼 386년~403년)은 저족(氐族) 여광(呂光)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원래 국명은 량(凉)이다.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 후량(後涼) 설명

후량의 건국자 여광은 저족 출신으로 전진(前秦)의 장군이었다. 383년 여광은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원정을 떠났다. 1월부터 원정을 시작해 하서(河西) 회랑을 진군 384년 7월 귀현(亀玆)을 정벌하고 서역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때 여광은 서역에 이름이 알려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신병을 확보한다.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전진은 혼란에 빠지고 교통이 두절되어 여광은 이 소식을 알지 못하고 서역 평정 이후 부견의 명령이 오지 않자 불안을 느낀 여광은 휘하 장병 및 구마라습의 희망에 따라 정벌을 멈추고 385년 본국으로 귀환을 시작한다. 양주(凉州)에 도착한 여광은 전진의 양주자사 양희를 격파하고 양주를 장악 사실상 자립 정권을 세웠다. 386년 9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리고 연호를 고쳤다. 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기부터 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이 당시 양주에서는 전량(前凉)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는데 이 반란으로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여광은 387년 말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다.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킨 여광은 걸복부의 서진(西秦)과 대립하였다.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칭했다.

397년 여광은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 시)을 점령한다. 그러나 독발부의 독발오고가 거병해 금성을 점령하고 뒤이어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고 수도 고장(姑臧 간쑤 성 우웨이 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결과 독발오고는 남량(南凉)을 건국하고 단업은 북량(北凉)을 건국해 양주는 분열된다. 여광은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지만 남량과 북량을 정벌하지는 못하였다.

399년 여광은 병으로 태자 여소(呂紹)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한다. 여소는 곧 이복형 여찬(呂纂)에게 살해되고 여찬이 천왕에 즉위했다. 여찬은 남량과 북량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 체제로 인해 원정에 나서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또한 주색에 빠진 여찬은 국정을 소홀히하여 후량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401년, 여초(呂超)에게 살해되었고, 여초의 형 여륭(呂隆)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여륭의 치세에서도 후량은 계속 쇠퇴하여 남량과 북량의 침입을 받았으며 후진(後秦)의 침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여륭은 후진에 복속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되었다. 후진의 군대가 물러가자 다시 남량과 북량의 침략이 이어졌고 여륭은 버티지 못하고 403년 후진에 항복하고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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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後涼) 황제 계보


경소황제(景昭皇帝) 여파루(呂婆樓): 의무제 추숭

제1대양태조 (凉太祖) 의무황제 (懿武皇帝) 여광(呂光)

연호: 태안(太安) 386년 ~ 389년, 인가(麟嘉) 389년 ~ 396년, 용비(龍飛) 396년 ~ 399년/ 재위기간 386년 ~ 399년/ 능호 고릉(高陵)

요약: 후량 태조 의무황제 여광(呂光, 338년 ~ 399년)은 후량(後凉) 초대 군주로 자는 세명(世明),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의무황제(懿武皇帝). 저족(氐族)으로 약양(略陽) 출신. 아버지는 여파루(呂婆樓)로 전진(前秦)의 중신, 여광은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활약하고 383년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서 12월에 서역에 도착한 여광은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하고 불승으로 중원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신병을 확보한다. 전진의 부견(苻堅)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있었지만 소식을 듣지 못하고 여광은 서역 일대에서 정착해 살려하지만 구마라습이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385년 귀향한다. 고창(高昌)에 도착한 여광은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희를 공격 양주를 장악하고 386년 초 과거 전량(前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는데 이 반란에는 독발부(禿髮部), 흉노(匈奴) 등이 개입해 2년여를 끌어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386년 10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리고 부견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위해 태안(太安)으로 개원하고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 387년 말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하고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고 396년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한다. 독발부, 흉노 등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양주를 평정한 여광은 걸복부(乞伏部)의 서진(西秦)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397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한다.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부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거병 금성을 점령하고 뒤이어 장액(張掖), 건강(建康) 일대에서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여 후량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여광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찬(呂纂)을 파견하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논(郭黁)이 반란을 일으켜 동원성(東苑城)을 장악 여찬을 다시 불러들였다.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평(西平)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양궤(楊軌)의 반란이 일어나고 독발오고가 원군을 보내기도 해 1년 여를 끌다 398년 6월 경 곽논 등을 격파하는데 성공 수도는 안정을 찾았지만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399년에 태자 여소(呂紹)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 곧이어 병사했다.


제2대은왕(隱王) 여소(呂紹)(재위기간 399년)

요약: 후량 은왕 여소(後涼 隱王 呂紹, ? ~ 399년) 후량(後涼)의 2대 군주 시호는 은왕(隱王). 여광(呂光)의 적장자로 396년 태자에 책봉된다. 399년 여광은 병이 심해지자 여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줘 천왕(天王)으로 하고 이어서 여소의 이복형들인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簒)과 상산공(常山公) 여홍(呂弘)을 각각 태위와 사도로 삼았고 자신을 태상황제(太上皇帝)로 칭하다 곧 사망했다. 여광은 사망할 때 여소에게 이르기를 너는 몸을 공손히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여찬에게 6군(軍)을 통솔하게 하고, 여홍에겐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도록 하며, 중요한 것들은 두 형에게 위임하면 거의 대부분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여찬과 여홍에게 형제가 화목하여 재화(災禍)를 막고 황조의 복을 만세에 전하도록 충고하고 여찬은 성품이 거칠고 난폭하고 여소를 잘 보좌하며 참소하는 말은 듣지 말 것을 경계하며 충고하고 그날 여광이 사망한다. 여소는 일단 발상을 미루는데 여찬은 이를 무시하고 빈소로 들어가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였다. 이에 여소는 여찬을 두려워하게 되어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려 하지만 여찬이 거절하였다. 여소의 사촌형인 여초(呂超)는 이러한 여찬의 행위를 우려하여 여소에게 여찬을 제거하라고 권하였으나 여소는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여홍이 은밀히 여찬에게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을 권하자 이에 그날 밤 여찬은 여홍과 함께 궁궐을 공격하는데 평소 여찬을 두려워한 금군들이 모두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 버리고 여찬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자 여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찬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여소에게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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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영황제 (靈皇帝) 여찬(呂簒)

연호: 함녕(咸寧) 399년 ~ 401년/ 재위기간 399년 ~ 401년/ 능호 백석릉(白石陵)

요약: 후량 영황제 여찬(後涼 靈皇帝 呂簒, ? ~ 401년) 후량(後涼)의 3대 군주 시호는 영황제(靈皇帝). 여광(呂光)의 아들로 적자 여소(呂紹)의 형이다. 여광 시기 태원공(太原公)에 책봉되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397년 서진(西秦) 정벌에서 활약했고 이후 후량에서 반란이 일어나 남량, 북량 등이 건국되자 이에 맞서 전쟁을 지휘했다. 399년 여광이 여소에게 천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제를 자칭하고 여찬은 태위(太尉)에 임명된다. 여광이 사망하자 여소는 발상을 미루는데 여찬은 여소의 이런 조치를 무시하고 빈소로 들어가 곡을 하였다. 여소는 여찬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지만 여찬이 거부하고 얼마 후 여홍이 여찬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자 여찬은 여홍과 함께 궁궐로 난입하여 여소를 살해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찬은 남량, 북량 등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남량과 북량의 공조로 인해 원정을 나가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했다. 또한 여찬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여홍을 살해하고 주색에 빠져 내정을 게을리 하여 후량의 국력은 크게 약화된다. 401년 여찬의 사촌 여초(呂超)가 여찬의 책망을 받자 여초는 여찬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여찬은 여초 등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에 취한 여찬은 여초에게 살해당한다.


문황제 (文皇帝) 여보(呂寶): 건강공 추숭

제4대건강공 (建康公) 여륭(呂隆)

연호: 신정(神鼎) 401년 ~ 403년/ 재위기간 401년 ~ 403년

요약: 여륭(呂隆, ? ~ 416년, 재위:401년 ~ 403년)은 후량(後凉)의 마지막 군주로 시호는 없다. 여광(呂光)의 동생 여보(呂寶) 아들로 401년 여륭의 동생 여초(呂超)가 군주 여찬(呂纂)을 살해하고 여륭은 이를 도와 여초에 의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지만 실권을 갖지는 못했고 국정은 동생 안정공(安定公) 여초가 전담했다. 여륭이 즉위하였을 무렵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을 당했고 여륭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였다.

후량의 국력이 약화되자 후진(後秦)이 침공해와 수도 고장(姑臧)이 포위되고 여륭은 오랜 농성 끝에 9월, 후진에 항복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된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여륭과 여초는 후진의 수재(守宰)를 공격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만 남량, 북량이 다시 공격해와 후진의 국력은 더욱 쇠퇴한다. 남량, 북량의 침략에 시달리던 여륭은 견디다 못해 403년에 후진에 나라를 완전히 넘기고 항복하고 후량은 멸망한다. 여륭은 장안으로 끌려와 산기상서에 임명되나 416년에 일어난 요필(姚弼)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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