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서진(西秦) 설명, 서진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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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서진(西秦, 385년 ~ 400년, 409년 ~ 431년)은 선비족(鮮卑族) 걸복부(乞伏部)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세운 국가로 국호는 진(秦)이다. 같은 국명을 가진 국가가 많아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 부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서진(西秦) 설명

걸복국인(乞伏國仁)은 전진(前秦)의 군주 부견(苻堅)의 부하로 남선우(南單于)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이 벌어지기 직전 농서(隴西)에서 걸복국인의 숙부 걸복보퇴(乞伏步頹)가 모반하고 부견은 걸복국인을 토벌대로 파견하는데 걸복보퇴는 오히려 걸복국인을 환영해 준다. 비수대전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이 쇠퇴하자 걸북국인은 농서 인근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 세력을 확대하고 385년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살해되자 걸복국인은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고 용사성(勇士城)에 수도를 정하여 독립 정권을 세운다.


388년 걸복국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걸복건귀(乞伏乾歸)는 수도를 금성(金城)으로 옮겼고 389년 전진의 부등(苻登)에게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된다. 394년 부등이 후진(後秦)에게 패배해 서진에 원군을 요청하자 출병하는데 부등이 전사한 후 그 뒤를 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즉위하자 10월에 이를 압박하여 부숭을 몰아냈다. 부숭은 후구지(後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연합군을 형성 서진을 공격하였으나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한다. 이후 서성(西城)으로 천도했고 다시 원천(苑川)으로 천도했다. 


400년 후진에게 패배하여 서진은 잠시 멸망하고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했다 다시 후진에 망명해 후진의 장수가 된다. 401년 걸복부의 수장으로 서진 시절의 수도였던 원천에 부임 농서 일대를 다시 공략한다. 409년 후진이 쇠퇴하면서 걸복건귀는 도견산(度堅山)에서 다시 서진을 건국하하고 410년 다시 원천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국내 정비에 힘을 기울이지만 412년 걸복국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살해된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乞伏熾磐)은 걸복공부를 죽이고 뒤를 이어 하남왕(河南王)을 자칭한다. 414년 남량을 멸망시키고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북량(北凉)과 대립한다. 428년 걸복치반이 병사하자 아들 걸복모말(乞伏暮末)이 뒤를 이었다. 걸복모말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430년 북량의 위협 때문에 북위(北魏)로 귀순하려 하지만 하(夏)의 방해로 실패하고 431년 하의 혁련정(赫連定)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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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秦) 황제 계보

제1대진열조(秦烈祖) 선열왕 (宣烈王)걸복국인(乞伏國仁)

연호: 건의(建義) 385년 ~ 388년/ 재위기간 385년 ~ 388년

요약: 걸복국인(乞伏國仁, ? ~ 388년) 서진(西秦)의 초대 군주로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선렬왕(宣烈王)이다. 선비족 걸복부(乞伏部) 출신으로 농서(隴西) 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아버지 걸복사민(乞伏司繁)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의해 남선우(南單于)로 임명되고 376년 아버지가 죽자 걸복국인이 그 지위를 계승한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걸복국인은 선봉장이 되어 출정하기 직전 숙부 걸복보퇴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부견은 걸복국인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하지만 걸복보퇴는 오히려 걸복국인의 토벌군을 맞아들여 걸복국인을 수장으로 추대하고,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하자 걸복국인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85년, 걸복국인은 대도독·대장군·대선우·영진하이주목(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領秦河二州牧)을 자칭하고 건의(建義)로 개원하는데 이때부터 서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용사성(勇士城)에 수도를 두고 12개 군을 설치하여 농서군 일대에서 할거하였다. 걸복국인은 농서 일대의 흉노, 강족 등과 대립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387년 부등(苻登)의 세력에 가담하여 원천왕(苑川王)에 책봉되었다. 388년 6월에 사망했다.


제2대진고조 (秦高祖)무원왕(武元王)걸복건귀(乞伏乾歸)

연호: 태초(太初) 388년 ~ 400년, 경시(更始) 409년 ~ 412년/재위기간 388년 ~ 400년, (400년 ~ 409년 동안 후진(後秦)에 복속됨) 409년 ~ 412년/ 능호 원평릉(元平陵)

요약: 걸복건귀(乞伏乾歸, ? ~ 412년)는 서진(西秦)의 제2대 군주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원왕(武元王), 선비족 걸복부 출신으로 걸복국인의 동생.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걸복건귀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고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어려 걸복건귀가 대신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금성(金城, 간쑤 성 란저우 시)으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 전진(前秦)의 부등(苻登)에 의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되었다. 농서(隴西) 일대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등은 전사하고 걸복건귀는 회군하고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한다. 이에 부숭은 구지(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고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 전진을 멸망시켰고 농서 일대를 장악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한다. 걸복건귀는 서성(西城, 간쑤 성 징위안 현)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지만 후량(後凉)의 공격을 받아 397년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한다. 400년 원천(院川)으로 천도하고 후진(後秦)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며 서진은 1차멸망한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고 재기를 노리다 실패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고 후진의 요흥(姚興)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고 401년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고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나고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지만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제3대진태조(秦太祖)문소왕 (文昭王)걸복치반(乞伏熾磐)

연호: 영강(永康) 412년 ~ 419년, 건홍(建弘) 420년 ~ 428년/재위기간 412년 ~ 428년/ 능호 무평릉(武平陵)

요약: 걸복치반(乞伏熾磐, ? ~ 428년)은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소왕(文昭王) 걸복건귀의 아들. 402년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치반이 도망치자, 독발녹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9년 재흥한 서진이 남량을 공격해 홍지영남(洪池嶺南)지방을 약탈했다. 414년 4월 독발녹단은 꼬인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에 배반했던 청해호 부근의 결간부, 을불부에 대해 직접 기병 7000명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고 이 기회를 틈타 서진의 걸복치반이 낙도에 공격해 들어와 역으로 남량의 수도 낙도는 함락되었다. 남량 지배하의 3군도 모두 서진에게 항복하여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원정군도 6월에 서진에 항복해 남량은 멸망고 독발녹단은 독살당했다. 걸복치반이 428년 병사하자 그의 아들 걸복모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4대여무왕 (厲武王)걸복모말(乞伏暮末)

연호: 영홍(永弘) 428년 ~ 431년/재위기간 428년 ~ 431년

요약: 걸복모말(乞伏暮末, ? ~ 431년) 시호 여무왕(厲武王). 걸복치반의 차남. 건홍 9년(428년)에 걸복치반의 사후, 진왕의 지위를 계승 연호는 영홍으로 개원했다. 사서에 의하면 재위 기간 중 제멋대로 사형을 실시해 민심이 등을 돌렸다. 영홍 3년(430년), 북량의 강대화에 압박받은 모말은 북위에의 귀순을 획책 하지만 하나라에 저지당하고 431년 하나라에 의해 서진 도성 남안(南安)이 공격을 받고 모말은 항복해 서진은 멸망하고 모말은 하나라의 혁련정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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