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북연의 창립자 모용운(慕容雲) 고운(高雲)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23:00
반응형

고운(高雲, ? ~ 409년)은 북연(北燕)의 초대 황제로 시호는 혜의제(惠懿帝)이다. 모용보의 양자로서 모용 씨를 얻어 모용운(慕容雲)이란 이름을 써 모용운이라고도 불린다. 북연을 세운 고운에 대해 정리해 본다.


북연의 창립자 모용운(慕容雲)은 고구려인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후연(後燕)에 패배하여 붙잡혀 온 고구려의 지파 고화(高和)의 손자이며 고발(高拔)의 아들로 자(字)는 자우(子雨).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북연의 두 번째 황제가 되는 풍발(馮跋)과 두터운 친교를 쌓게 된다.


후연 2대 황제 혜민제(惠閔帝) 모용보(慕容寶, 재위 : 396년 ~ 397년)가 태자로 있었을 때 고운은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보가 등극한 후 시어랑(侍御郞)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물러났다 397년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반란군을 진압한 공으로 인해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고 황족의 성인 모용씨를 하사받아 이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후연의 4대 황제 소문제 모용희(昭文帝 慕容熙, 재위 : 401년 ~ 407년)는 폭군으로 407년 황후 부씨(苻氏)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어 풍발은 고운을 추대할 거사계획을 알리고 황제가 되도록 부추긴다. 고운은 내키지 않았지만 풍발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은 후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자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지만 도리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모용운(고운)은 407년 음력 4월 황제로 즉위하고 자신의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씨로 되돌리고 스스로를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했다. 같은 해에 부인을 황후로,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불안하게 황위를 보존하다 재위 3년째인 409년 겨울 고운은 총신(寵臣)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고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풍발이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참고] 진서 모용희 재기에 따르면 이에 앞서 "볏짚 하나 묶어, 두 머리를 태우네. 대머리의 어린 아들이 와서 연을 멸하리"라는 참요가 떠돌았는데, 볏짚(藳)에서 위의 초두머리(艹)와 아래의 벼화(禾)변을 지우면 고(高)자가 되며, 운의 아버지 발의 어릴 적 이름이 바로 대머리라는 뜻의 독두(禿頭)였다고 한다.

오늘날은 모용씨가 지배하던 시기와 구분하여 모용희가 지배하던 때까지를 후연(後燕), 고운의 등극 이후를 북연(北燕)으로 구분하고 있다.

삼국 사기에 408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푸니 고운도 북연의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이에 답례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이는 고운이 고구려 왕족이기에 광개토왕이 이를 외교적으로 적극 활용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