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십육국 남량(南涼) 설명, 남량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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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남량(南涼, 397년 ~ 414년)은 선비족(鮮卑族) 독발부(禿髪部)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건국한 나라로 국호는 양(凉)이다. 선비족의 일파로 남양을 탁발량국(拓跋涼國)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청해성 지구에 거점을 두었다.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 남량(南涼) 설명

선비족 독발부는 대대로 양주(凉州) 남부(칭하이 성 북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380년대 후량(後凉)이 건국되고 전량(前凉)의 장씨(張氏) 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 독발부의 수장 독발사복건(禿髪思復鞬)은 장대예를 지원하여 후량과 싸우고 387년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394년 독발사복건이 죽자 장자 독발오고(禿髮烏孤)가 뒤를 잇고 독발오고는 후량에 복속하여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된다. 395년 칭하이 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 396년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 후량의 관직을 받지 않고 독립한다. 397년 독발오고는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 금성(金城)을 점령하고 이때부터를 남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남량을 건국한 독발오고는 후량의 내전에 개입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398년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고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옮겼다. 독발오고가 죽자 동생 독발이녹고가 뒤를 이어 무위왕에 즉위한다. 독발이녹고는 후량과 대립해 여러 차례 교전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401년 황제를 자칭하려다 그만두고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한다. 같은 해 후진(後秦)이 후량을 공격하는데 후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독발이녹고는 영토인 광무(廣武)를 포기하고 철수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한다. 후량이 후진에 복속하자 독발이녹고도 후진의 작위를 받아 광무공(廣武公)에 책봉된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독발이녹고는 북량, 후량 등과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402년 독발이녹고가 죽자 동생 독발녹단이 뒤를 이었다. 독발녹단은 양왕(凉王)에 즉위하고 후량을 여러 차례 공격하 후량이 후진에 나라를 넘기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복속했다. 이후 독발녹단은 북량과 대립하고 406년 북량을 공격 노략질한 공물을 후진에 바치고 그 대가로 고장의 영유권을 얻었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고 양주의 중심지를 장악하고 수도를 고장으로 옮기고 408년 다시 양왕을 자칭한다. 독발녹단의 양주 경영은 북량, 하(夏), 후진 등의 침입 및 내부 반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410년에 본거지인 영남(嶺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고장을 포기하고 다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낙도 천도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북량과 계속해서 대립하는데 매번 북량에게 패배하여 아들을 인질로 바쳐야만 했고 서진(西秦)의 침략도 받았다. 414년 서쪽의 속령 을불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출정하여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수도를 비운 사이 서진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량은 3대 18년에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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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량(南涼) 황제 계보


제1대 양열조(凉烈祖)무왕(武王)독발오고(禿髮烏孤)

연호: 태초(太初) 397년 ~ 399년/ 재위기간397년 ~ 399년

요약: 독발오고(禿髮烏孤, ? ~ 399년, 재위:397년 ~ 399년)는 남량(南凉)의 초대 군주이다.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선비족 독발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다. 독발부는 대대로 양주(凉州) 남부(칭하이 성 북동부)에서 거주했고 380년대에 후량(後凉)이 건국되자 이에 대항한다. 당시 양주에는 전량(前凉)의 장씨(張氏) 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켰는데 독발부는 이를 지원한다. 그러나 387년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는 세력이 약화되고 394년 독발사복건이 죽자 독발오고가 독발부의 수장이 되었다. 독발오고는 후량의 작위를 받아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되었다. 395년 칭하이 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 396년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 않고 독립하고 397년 독발오고는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 남량을 건국한다. 이 무렵 후량의 양주에서는 반란이 잇따라 북량(北凉)이 건국되고 수도 고장(姑臧)에서는 곽논(郭黁)이 봉기하는 등 큰 혼란 상태에 있었다. 독발오고는 곽논의 봉기에 호응해 원군을 파견하고 398년 서평(西平) 지역의 강족 양기(梁饑)를 격파해 세력을 확대한다. 398년 12월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고 399년 수도를 낙도(樂都 현재 청해성 낙도현)로 옮기고 후량과 대립하다 그해 6월 술에 취해 낙마해 사망했다.


제2대 강왕(康王)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

연호: 건화(建和) 400년 ~ 402년/ 재위기간 399년 ~ 402년/ 능호 서평릉(西平陵)

요약: 독발리록고(禿髮利鹿孤, ? ~ 402년)는 남량(南凉)의 제2대 군주. 시호는 강왕(康王).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 아들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의 동생. 독발리록고는 독발오고가 남량을 건국한 뒤에 표기대장군·서평공(驃騎大將軍·西平公)에 임명되어 장군으로 활약하다. 399년 독발오고가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고 서평(西平)으로 천도한다. 독발리록고는 후량과 대립해 여러 차례 교전한다. 서진(西秦)이 멸망하고 서진왕 걸복건귀 일족이 도망쳐오자 이들을 받아들인다. 걸복건귀는 독발리록고를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후진(後秦)으로 도망쳤고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남량에 인질로 남았다. 독발리록고는 401년에 황제를 칭하려 하다 부하들의 설득으로 그만두고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했다.

401년 가을 후진이 후량을 공격하고 독발리록고는 후진의 군대를 피해 광무(廣武)에서 철수하고 후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했다. 독발리록고의 휘하에 있던 강기(姜紀), 양환(楊桓) 등은 독발리록고를 떠나 후진에 투항하기도 했다. 후량이 후진에 항복하고 후진군이 철수하자 북량(北凉)의 저거몽손은 남량에 복속하려다 그만둔다. 이에 독발리록고는 북량을 공격해 크게 승리하고 저거몽손의 동생 저거나(沮渠拏)를 인질로 받아 북량을 복속시켰다. 또한 독발녹단을 보내 후량을 공격하는 등 북량 및 후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402년 3월 독발리록고는 병에 걸려 동생 독발녹단에게 후사를 맡기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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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경왕(景王) 독발녹단(禿髮傉檀)

연호: 홍창(弘昌) 402년 ~ 404년, 가평(嘉平) 408년 ~ 414년/ 재위기간 402년 ~ 404년, 408년 ~ 414년

요약: 독발녹단(禿髮傉檀, 365년 ~ 415년)은 남량(南涼)의 마지막 군주 시호는 경왕(景王). 대부분의 사료에는 독발녹단으로 기록했지만 위서(魏書)에는 독발귀단(禿拔劌檀)으로 쓰여 있다.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아들이며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 독발사복건은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형제 상속을 하여 독발녹단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한 것이다. 독발오고 치세에는 거기대장군·광무공(車騎大將軍·廣武公)에 임명되고, 독발이녹고 때에는 도독중외제군사·양주목·녹상서사(都督中外諸軍事·涼州牧·録尚書事)를 역임했고 군사와 나라의 모든 대사를 통괄한다. 402년에 독발이녹고가 병으로 죽자 독발녹단이 왕위에 올라 양왕(凉王)을 자칭하고 낙도(樂都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천도한다. 독발녹단은 독발이녹고의 정책을 이어받아 후량(後凉)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403년 후량이 후진(後秦)에 나라를 넘기게 되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명목상으로 복속하고 후진의 요흥은 독발녹단을 광무공(廣武公)에 봉하였고 독발녹단은 402년에 연호를 폐한다. 독발녹단은 북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406년 북량을 공격하여 약탈한 말과 양을 후진에 바쳤다. 요흥은 이러한 독발녹단의 공물을 치하하고 그를 고장(姑臧)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여 후진의 양주 경영을 종식시켰고 뒤이어 고장으로 수도를 옮겼다. 408년에는 양왕(凉王)을 자칭하고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07년에 하(夏)의 혁련발발이 독발녹단과 혼인 동맹을 청하는데, 독발녹단은 거절한다. 이에 혁련발발은 남량을 공격하여 동쪽 변경을 약탈하고 독발녹단은 무리해서 반격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이로 인해 고장 인근의 민심이 동요하고 반란이 잇따랐다. 408년 남량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후진군이 쳐들어왔지만 독발녹단은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격퇴한다. 한편 독발녹단은 북량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독발녹단의 북량 정벌은 항상 실패하고 매번 반격을 받아 수도 고장을 위협당한다. 410년 북량에 크게 패배하고 고장을 포위당하자 독발녹단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 포위를 풀었다. 이때 독발부의 본거지였던 영남(嶺南)에서 절굴기진(折掘奇鎮)이 반란을 일으키고 본거지를 상실할 위기에 독발녹단은 수도를 낙도로 다시 옮겼다. 고장은 반란이 일어났고 411년에 북량이 고장을 점령한다.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계속해서 북량을 공격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반격을 받아 낙도를 포위당했다. 독발녹단은 매번 아들을 인질로 보내 포위를 풀었으나 곧이어 다시 북량을 공격하다 포위당하기를 반복하고 서진(西秦)과도 대립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다.

414년 칭하이 호 서쪽의 을불부(乙弗部)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발녹단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였는데,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서진이 쳐들어와 나라를 모두 잃었다. 독발녹단은 을불부를 근거로 하여 재기하려 하였으나 동요한 군대가 와해되어 결국 실패하고 서진에 항복하고 415년 걸복치반에 의해 독살되었다. 걸복치반은 독발녹단에게 경왕(景王)이라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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