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북량(北涼, 397년 ~ 439년)은 간쑤성(甘肅省)에서 건국된 나라로 초대 왕은 단업(段業)이지만 실질적인 창업자는 흉노계(匈奴系) 노수호족(盧水胡族)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이다.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 북량(北涼) 설명
저거몽손은 후량(後凉)의 무장으로 397년 후량으로부터 자립했다. 사촌 형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힘을 합쳐 건강(建康)의 태수인 단업을 건강공(建康公)으로 추대해 저거몽손은 장액(張掖)의 태수로 임명되고 저거남성은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었다. 단업은 399년에 국호를 양(凉)으로 정하고 양왕(凉王)을 자칭했다. 단업은 북량의 명목상의 군주였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저거남성과 저거몽손이 쥐고 있었다. 이를 두려워한 단업은 401년 5월, 저거남성을 모살하고 저거몽손은 반란을 일으켜 단업을 살해하고 장액공(張掖公)을 자칭한다. 저거몽손은 남량(南凉)과 손을 잡고 후량을 압박해 멸망에 이르게 하고 남량과 대립한다. 411년 저거몽손은 남량의 주요 거점인 고장(姑臧)을 점령해 남량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412년 고장으로 천도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한다. 414년 이후 남량을 멸망시킨 서진(西秦)과 대립하는 한편 서량(西凉)과도 대립해 421년 서량을 멸망시키고 돈황(敦煌) 일대를 장악한다. 저거몽손은 서진과 맞서기 위해 하(夏), 북위(北魏)와 연합하고 동진(東晉), 송(宋)에는 복종해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기도 한다. 431년 서진과 하가 멸망하고 북위의 영향력이 커지자 북위에 인질을 보내고 양왕(凉王)으로 임명된다. 433년 저거몽손이 병사하고 아들 저거목건(沮渠牧犍)이 뒤를 이었다. 저거목건(沮渠牧犍)은 하서왕을 자칭하고 문치(文治)을 펼쳤으나 439년에 북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북량의 멸망으로 오호십육국 시대는 끝나게 된다. 북량 멸망 후 목건의 동생 저거무휘(沮渠無諱)가 주천(酒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천도해 고창(高昌)에서 자립해 송으로부터 하서왕(河西王)에 봉해졌지만 460년 유연(柔然)의 공격을 받아 2대 만에 멸망한다.
북량(北涼) 역대 군주
제1대문왕 (文王)단업(段業)
연호: 신새(神璽) 397년 ~ 399년, 천새(天璽) 399년 ~ 401년/ 재위기간 397년 ~ 401년
요약: 북량 문왕 단업(北涼 文王 段業, ? ~ 401년, 재위:397년 ~ 401년)은 북량(北涼)의 초대 군주로 경조(京兆 장안) 출신의 한족(漢族)으로 여광(呂光)의 부하 두진(杜進)의 부하였다. 여광이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정벌에 나서자 두진을 따라 출정하고 이후 여광이 후량(後凉)을 건국한 뒤 건강(建康 간쑤 성 주취안 시)태수로 임명된다. 397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량은 혼란에 빠지고 건강에서는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을 포위한다. 저거남성은 농성하고 있는 단업을 추대하여 수장으로 삼고 건강 및 주천(酒泉)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고 단업은 이를 거부 20일 가까이 농성하지만 구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성문을 열고 저거남성을 받아들여 대도독·용양대장군·양주목·건강공(大都督、龍驤大將軍、涼州牧、建康公)에 추대하는데 이때부터 북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단업은 실권이 없고 저거남성이 보국장군(輔國將軍), 저거몽손이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되어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399년 단업은 양왕(涼王)을 자칭하고 후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나 400년 돈황(敦煌 : 간쑤 성 둔황 시)에서 이고(李暠)가 반란을 일으켜 서역 대부분을 상실 북량의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단업은 저거몽손의 힘을 두려워하여 저거몽손을 대신해 자신의 부하 마권(馬權)을 장액태수로 삼으려고 하지만 저거몽손의 힘에 밀려 마권을 처형해야만 했는데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저거몽손은 401년 저거남성을 추대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하지만 저거남성이 거부하자 저거몽손은 단업에게 저거남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며 단업은 저거남성을 처형하고 저거몽손은 단업이 저거남성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군중을 선동 군대를 모아 단업을 공격해 단업은 패배하고 사로잡히고 목숨을 애걸하지만 저거몽손이 단업의 목을 베고 만다. 사마광(司馬光)은 단업은 유학자로 평소에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지만 다른 권모와 책략이 없고 위엄으로 금령을 시행하지 않아서 부하들이 명령을 제멋대로 하고 더욱이 점치는 것과 무격(巫覡)을 믿었기 때문에 패배하기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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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양태조(凉太祖)무선왕(武宣王)저거몽손(沮渠蒙遜)
연호: 영안(永安) 401년 ~ 412년, 현시(玄始) 412년 ~ 428년, 승현(承玄) 428년 ~ 431년, 의화(義和) 431년 ~ 433년/ 재위기간 401년 ~ 433년/ 능호 원릉(元陵)
요약: 저거몽손(沮渠蒙遜, 368년 ~ 433년)은 북량의 실질적 건국자로 임송(臨松, 감숙성 장액시) 노수호의 출신이다. 노수호(盧水胡)는 진서 재기에서는 흉노의 지파(支族)로 되어 있지만 월지설, 독자적인 소수민족설 등이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선왕(武宣王). 노수호의 족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재능이 뛰어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 후량의 왕 여광을 두려워했는데 항상 술을 마셔 그들의 눈을 속였다. 397년 서진(西秦)토벌의 실패의 책임으로 백부 저거라구(沮渠羅仇), 국죽(麹粥)형제가 여광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여광을 규탄하며 후량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 군사를 일으키고 사촌형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협력 후량의 건강태수인 한족 단업을 건국공으로써 옹립한다. (북량의 건국) 401년 단업을 살해하고 스스로 양주목 장액공(涼州牧 張掖公)을 칭해 북량의 지배자가 되고 영역을 서진·남량·서량·후량·후진·하·북위에 둘러싸여 세력 확대는 곤란했지만, 세력이 강한곳은 종속하고 약한 세력을 토벌하는 교묘한 외교를 전개해 영역을 확대 421년에 서량을 멸해 돈황을 지배하에 넣어 하서 지방 전역을 지배했다. 서진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북위와 제휴하고 강남의 동진·송왕조에도 사신을 보내 양주목 하서왕(涼州牧・河西王)에게 봉해졌다. 431년 서진과 하나라가 멸망 하면서 북위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북위에 인질을 보내 양주목 양왕(涼州牧 涼王)으로 봉해졌다. 433년 66세로 병사한다. 북위는 사절을 파견해 무선왕으로 추시 했다. 그
제3대애왕 (哀王) 저거목건(沮渠牧犍)
연호: 승화(承和) 433년 ~ 439년/ 재위기간 433년 ~ 439년
요약: 저거목건(沮渠牧犍, ? ~ 447년, 재위:433년 ~ 439년) 북량의 3대 군주로 시호는 애왕 저거무건(沮渠茂虔) 저거몽손의 아들로 의화(義和) 3년(433년) 저거몽손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저거목건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죽이라고 요구하지만 거절하자 분개한 태무제는 북량을 공격 439년 9월 저거목건의 항복을 받아내고 북량은 멸망한다. 저거목건은 북위로 끌려온 뒤로도 북위 황족에 준하는 대우로서 중용되었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그가 항복 전에 고장에서 보물을 몰래 빼돌린 것이 알려져 태무제는 저거목건의 여동생 우소의를 포함한 모든 일족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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