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비수대전(淝水大戰)은 383년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동진(東晉)을 공격하다 현재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는 화이허 강(淮河)의 지류인 비수(淝水)에서 동진의 사현(謝玄)에게 패배한 전투로 정국의 지형을 바꾸게 된 매우 중요한 전투다. 동진이 8만 군대로 전진의 90만 대군을 비수에서 물리친 이 전투는 비수대전으로 불리며 중국 역사상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물리친 3대 대전으로 기록된다.
1. 배경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이 건국한 전진(前秦)이 화북의 패권을 차지한다. 357년 황제가 된 부견(符堅)은 한인(漢人)출신의 재상(宰相) 왕맹(王猛)을 중용(重用)하여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실행하여 국력을 크게 성장시키고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 북쪽의 대(代), 서쪽의 전량(前凉) 거기에 서역까지 원정해 국세를 떨쳐 376년 화북을 통일하고 남쪽 동진을 남겨놓고 있었다.
2. 왕맹의 만류
부견은 이상주의자로 민족적 대융합을 고려해 자신의 근거지 관중(關中)의 동쪽에 선비족을 이동시키고, 자신의 민족인 저족을 서쪽으로 이동시킨다. 재상 왕맹의 조언에 따라 저족외 다른 민족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등 영내에 여러 민족을 융화시킨 뒤 다민족국가를 세워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겠다는 포부와 이후에 진행할 천하통일사업을 위한 동진 정벌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왕맹은 아직 민족 간의 대립이 심각하다고 생각했고, 한인의 마음도 동진을 본국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동진과의 싸움이 벌어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부견에게 남정(南征)을 취소할 것을 진언하였다. 화북통일 1년 전인 375년 왕맹은 동진을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하지만, 부견은 왕맹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전쟁을 결심한다.
3. 동진의 전쟁 준비
376년 동진은 북방을 통일한 전진의 침략을 예상하고 대비한다. 재상 사안(謝安)이 조카 사현(謝玄)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광릉(廣陵)에 배치한다. 사현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사안이 관할하던 하류 장강지역 5개주(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靑州))의 군사권을 쥐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휘하에는 유뇌지(劉牢之), 하겸 등의 맹장들이 있던 단련된 정예병들이었는데 이들을 북부병(北府兵)이라 불렀다.
4. 동진의 양양 공격
부견은 378년 4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부비(符丕)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했다. 부견은 그 외 10만의 병력을 더 추가해 3방향으로 17만의 병력으로 양양을 침공하게 했다.. 양양을 수비하던 양주자사(梁州刺史) 주서(朱序)는 1년간 성을 지켰으나 379년 2월 성을 열고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부견은 그를 용서하고 도지상서(度支尙書)란 지위를 내렸다. 전진군은 계속 동진(東進)하여 광릉(廣陵)을 압박했으나 동진의 사안(謝安)이 건강(建康)에서 방어하고 사현이 5만의 북부병을 거느리고 반격에 나서 전진을 상대로 4전4승 전승을 거두자 전진군은 회군하고 만다. 이 공적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縣公), 사현은 후에 봉해졌다.
5. 부견의 남정 결심
부견은 이번에는 대대적인 병력을 일으켜 기필코 동진을 정벌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려는 생각에 회의를 열어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많은 대신들이 동진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 동진정벌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다. 화가 난 부견은 제일 신임하는 동생 부융(符融)도 반대한다. 단 모용수만이 찬성하고, 이에 힘을 얻은 부견은 남정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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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수대전
383년 5월 동진은 전진의 남정소식을 접하고 환충(桓沖)에게 10만의 병력으로 양양을 공격하게 하고, 양량(楊亮)에게는 촉을 공격하게 했다. 전진은 이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8월에 부견의 동생 부융, 장모, 부방, 양성, 모용위, 모용수 등에게 25만의 병사를 주어 선봉으로 삼고 자신은 직접 보병 60만, 기병 27만 명, 합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출발했다. 동진은 사석(謝石)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사현을 선봉으로 삼아 약 8만의 병력으로 3방향에서 전진을 견제하려 한다.
10월 부융의 군은 동진의 수도 건강의 북서쪽 200km에 위치한 수춘(壽春 현재의 안휘성 수현)을 함락시키고 양성의 군은 낙안에 주둔했다. 11월 사현 휘하의 장수 유뇌지가 5천 정병을 이끌고 낙안을 기습하여 전진군을 격파하고 양성을 죽였다. 그 후 동진군은 비수에 진격하자 전진군도 부견의 본진이 수춘에 도착했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부견은 주서를 사자로 삼아 항복을 권유했다. 그런데 주서는 마음속으론 동진을 섬기고 있었다. 주서는 동진 진영에서 사석(謝石)에게 전진의 100만 대군이 집결하기전 지금 선봉을 깨뜨리라고 조언해 준다.
사석은 이를 받아들여 부견에게 강을 도하하면 싸우지 않겠다고 부견을 속였다. 부견은 자신의 군을 조금 물려서 상대를 유인한 뒤 동진군이 강을 절반쯤 건널 때 공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진군은 예정대로 약간 후퇴하자 이를 쫓아 동진군은 도하했다. 공격하면 승리를 할수도 있던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병사들이 계속 후퇴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병사들의 부견이 작전을 제대로 알지 못해 후퇴하는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여기에 주서가 진영을 돌아다니며 전진 군이 졌다고 외치고 다녀 병사들은 실재 패한 줄 알게 되고 도하를 끝낸 동진군이 공격을 가하자 전진군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부융은 전사하고 부견은 도망치고 군대는 삽시간에 흩어졌다. 장안에 와보니 병사의 절반도 돌아오지 못했다. 부견은 도중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하게 된다.
7. 결과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일순간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화북은 다시 분열해 전란의 시대가 시작된다. 모용수도 부견과 헤어진 후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모용충이 서연(西燕)을 건국하고 요장은 위북에서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운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후량(後凉)을 건국한다. 부견은 385년 7월 요장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고 거절하자 살해 당하고 부비가 계승했지만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 전진은 394년 멸망하고 만다. 만약 부견이 비수대전을 치르지 않았다면, 서두르지 않았다면 최소한 북방이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진이 멸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수대전에서 승리한 동진은 북벌을 감행하고 황하 이남의 옛 국토를 되찾기도 했는데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했다. 비수대전(淝水大戰)은 중국의 남북국 대립 상태를 오랫동안 지속하게 만들었고 이후 북방의 혼란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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