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남북조 시대 - 남조의 흥망

올드코난 2017. 2. 1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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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20~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 개요

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420년 유유가 동진에서 선위를 받아 송나라가 건국되고 이후 589년 수가 진을 멸하게 된다. 이 시대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된다. 왕조의 잦은 교체로 남조는 경제발전이 더디고 정치적 혼란도 있었지만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고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했다.


2. 남조의 왕조

송: 420~479년: 유유 건국, 8황제

제: 479~502년: 소도성 건국, 7황제

양: 502~557년: 소연 건국, 5황제

진: 557~589년: 진패선, 5황제


3. 남조의 흥망

420년 유유가 동진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한다. 건국 직후 북쪽은 북위가 화북통일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남쪽은 평화로워 3대 문제(文帝)의 30년에 가까운 치세는 원가의 치(元嘉의 治)로 선정을 펼친다. 한편으로는 동진시대부터 진행된 귀족세력의 강화로 황제를 위협할 정도가 된다. 이 귀족제도로부터 소외된 한인(寒人) 계층은 황제와 황족의 편에 서서 권력을 얻으려하는데, 453년 문제가 황태자에게 살해당하는데 이를 무찌르고 효무제가 즉위한다. 효무제는 귀족세력의 억제를 노려 세제의 개혁과 한인 층의 등용을 추진 하지만 효무제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는데 6대 명제는 친족 28명을 살해하고 신하도 의심하여 다수를 살해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아 송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영향이 된다.

송나라의 창시자 유유와 함께 군사에서 공적을 세우며 등장한 이가 소도성(蕭道成)으로 소도성은 명제의 뒤를 이은 폐제 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후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소도성의 뒤를 계승한 2대 무제는 여러 번 북위를 공격했지만 패하고 무제 사후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소도성의 조카 소(명제)가 즉위하는데. 그 사이 북위에게 산동을 포함한 회하 이북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소보권(동혼후)이 즉위했지만 지나친 측근 정치로 명제 시대의 중신들을 살해 정치가 어지럽히자 반란이 일어난다. 500년에 일어난 소연(蕭衍; 양의 무제)의 반란은 동혼후의 동생 소보융(화제)을 옹립해 건강으로 진군하여 포위하였고, 다음해 동혼후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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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년 건강에 입성한 소연(蕭衍)은 다음해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하고 양무제(소연)는 범운과 심약(송서의 편찬자) 등의 한인 층을 등용해 귀족제도를 멀리하고 새로운 인재를 구했다. 또 구품관인법 등의 귀족층에게 유리한 제도를 개혁하고 관위의 상하를 품으로 부르는 것을 고쳤다. 또한 조세의 감세를 추진하고 이때까지 사용한 서진 시대 이래의 태시율령(泰始律令)을 대신해 새로운 양률과 양령을 제정했다. 문화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이 시대는 남조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최전성기를 맞이한. 특히 무제의 장자 소명태자에 의해 명저 문선(文選)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치세 후반 무제는 불교에 심취해 여러 번 사찰에 투신하고, 그때마다 신하들은 거액의 돈을 들여 무제를 데려왔다. 거기에 사용된 금액은 1억 전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동위의 하남장관 후경이 귀순을 요청하고 조정대신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출병 하지만 동위에 패배하여 하남은 동위에게 돌아간다. 패배한 무제는 생각을 고치고 동위와 화해에 나서게 되자 목숨이 위태롭게된 후경은 548년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무제를 붙잡아 굶겨 죽였다. (후경의 난) 무제 사후 3남 소강(蕭綱; 간문제)이 뒤를 이었으나, 후경은 551년 황족 소동(蕭棟)을 옹립했고, 곧이어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불렀다. 이 반란 속에 각지의 여러 왕이 자립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그중 형주에 있던 무제의 8남 소택(蕭澤; 원제)는 부하 왕승변(王僧弁)을 파견해 후경을 죽이고 강릉에서 즉위했고 촉에서 황제를 칭하고 강릉으로 진군하던 동생 소기(蕭紀)를 552년에 격파했다. 그러나 554년 옹주자사 소찬(蕭餐)이 끌어들인 서위의 대군 앞에 소택은 패배해 죽고, 소찬은 강릉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다. 이 소찬의 정권을 후량(後梁)이라 부르지만, 실제 서위의 괴뢰정권에 불과했다. 이때 촉도 서위에게 점령되었다. 원제의 사후 왕승변과 더불어 원제의 무장이었던 진패선(陳覇先; 후에 진의 무제)는 건강에서 원제의 9남 소방지(蕭方智)를 옹립했으나 동위를 대신해 들어선 북제가 이에 개입해 북제의 포로로 있던 소연명(蕭淵明)을 보냈다. 왕승변은 그를 받아들여 소연명을 옹립했으나 진패선은 이에 반대해 소방지를 그대로 옹립했다. 왕승변과 진패선의 다툼은 진패선의 승리로 끝나고, 소방지는 옹립되어 경제(敬帝)가 되었다.

557년 진패선은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했지만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촉 지역과 강릉을 중심으로 한 형주 북부를 빼앗겼고 거기에 국내에는 반대 세력이 남아 있었다. 진패선은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생애를 보내다 559년에 사망했다. 뒤를 형 문제(文帝)가 잇는다. 문제는 무제의 방침을 고수하고 국내 반대 세력을 제압했다. 566년 문제 사후 동생이 문제의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제(宣帝)가 되었다. 선제는 북주와 함께 북제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쳐 출격하여 회남을 획득했다. 그러나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에게 진나라 군대가 패배해 회남을 다시 상실했다. 이후 582년 진숙보(陳叔寶; 후주)가 즉위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해 망국을 자초한다. 화북을 통일한 북주를 대신해 정권을 차지한 수나라의 문제는 통일을 향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북쪽의 돌궐에 대해 만리장성의 복구를 실행했고 장강에 버려진 운하를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괴뢰국가였던 후량을 멸망시켜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준비가 끝난 문제는 588년 차남 양광(楊廣; 양제)를 총사령관으로 한 총병력 51만 8천 명의 대군을 보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해 우물 속에 숨어 있던 후주를 사로잡아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진이 멸망한 때부터 273년, 서진의 짧은 통일기간을 제외하면 400년에 가까운 분열을 겪었던 중국이 재통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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