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유유의 송(宋) 유송(劉宋) 설명, 유송 황제계보

올드코난 2017. 2. 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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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 송(宋, 420년 ~ 479년)은 강남 지방에서 유유(劉裕)에 의해 건국된 남조 첫 번째 왕조로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통일 제국인 송나라(960년 ~ 1279년)와 구별하기 위해, 건국자인 유유(劉裕)의 성씨를 따라 유송(劉宋)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 420년 송을 건국한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고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의 구별 철폐을 추진해 토착민과 유랑자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시도했고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재건을 하다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후사를 한문(寒門)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는데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을 즉위시켰다. 문제는 왕홍(王弘), 왕화(王華), 은중심(殷仲甚) 등의 귀족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로 불리는 태평성대로 문제는 수재의 직을 기한을 두어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438년 유학, 현학, 문학, 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 안연지 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과 하서왕 등과 교류했다.

하지만 430년, 450년 2번에 걸쳐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패배해 회북(淮北)을 빼앗겨 군사비가 증가하고 태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송나라는 급속히 쇠퇴한다.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효무제(孝武帝)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면서, 형주, 양주, 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사족과 공상, 잡호와의 통혼을 금하고 사문에게 왕자를 배알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그린 정치를 추진했다.

전폐제(前廢帝)는 남조의 대표적인 포악한 황제로 숙부 유욱(劉彧)에게 암살당하고 유욱은 명제(明帝)가 되었으나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을 보내 그를 죽였다. 명제는 채흥종(蔡興宗) 등의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했으나 난의 평정 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고 명제 이후 폐제가 제위하지만 숙부 유휴범(劉休範)이 한문출신의 권력자들의 전횡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위협하자, 무장 소도성(蕭道成)이 난을 평정하고 포악한 군주 폐제를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였다. 심유지, 유겸, 원찬 등이 의병을 모아 공격했으나 패퇴하자, 소도성은 병마의 모든 권한을 쥐었고, 기어코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소도성이 선양을 받으면서 제나라를 건국 송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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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황제 계보]

효황제(孝皇帝) 유교(劉翹): 송 무제 추숭, 능호 흥녕릉(興寧陵): 유교(劉翹)는 중국 남북조 시대 송의 초대 황제인 무제 유유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효황제(孝皇帝), 자는 현종(顯宗). 동안태수(東安太守) 유정(劉靖)의 아들이며, 동안군(東安郡)의 공조(功曹)를 지냈다.

제1대송 고조 (宋高祖) 무황제 (武皇帝) 유유(劉裕)

연호 영초(永初) 420년 ~ 422년/ 재위기간 420년 ~ 422년/ 능호 초녕릉(初寧陵)

요약: 유송 무제(劉宋 武帝, 363년 ~ 422년)는 유송의 초대 황제로 자는 덕여(德輿).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제2대소황제 (少皇帝) 유의부(劉義符)

연호 경평(景平) 423년 ~ 424년/재위기간 422년 ~ 424년/ 능호 없음

요약: 유의부(劉義符, 406년 ~ 424년)는 폐위 당해 시호가 없어 소제(少帝)로 호칭된다. 422년 유유(劉裕)가 죽자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유의부가 조정의 사무에 서툴고 서선지 등이 황제의 후견을 받고 권력을 포기하지 않고, 황태후의 명을 받아서 즉위 불과 2년 만에 폐위당했다. 서선지와 신하들은 유의부의 동생인 유의륭(劉義隆)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폐위당한 이후 영양왕(營陽王)으로 봉해졌지만 얼마 안가서 암살당했다.

제3대송태조(宋太祖) 문황제 (文皇帝)유의륭(劉義隆)

연호 원가(元嘉) 424년 ~ 453년/ 재위기간 424년 ~ 453년/능호 장녕릉(長寧陵)

요약: 유송 문제(劉宋 文帝, 407년 ~ 453년)는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무제의 셋째 아들이며 소제의 동생으로 소제 폐위되고 즉위했다. 30년간 '원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다 회북(淮北)을 빼앗기고 453년 태자인 유소에게 시해당했다.

비정통원흉(元兇) 유소(劉劭)

연호 태초(太初) 453년/ 재위기간 453년/ 능허 묘호, 시호 없음

요약: 유소(劉劭, 424년 ~ 453년 5월 27일) 자는 휴원(休遠), 제3대 황제 유의륭과 황후 원제규(袁齊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반란으로 시해당하고 원흉(元兇)으로 폄칭되었다.

제4대송세조 (宋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 유준(劉駿)

연호 효건(孝建) 454년 ~ 456년, 대명(大明) 457년 ~ 464년/재위기간 453년 ~ 464년/ 능호 경녕릉(景寧陵)

요약: 유송 세조 효무황제 유준(劉宋 世祖 孝武皇帝 劉駿, 430년 ~ 464년) 자는 휴용(休龍) 아명은 도민(道民)이다. 유의륭의 아들로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 형주, 양주, 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사족과 공상, 잡호와의 통혼을 금하고 사문에게 왕자를 배알하게 하는 등 중앙 집권화를 그린 정치를 추진했다

제5대폐황제 (廢皇帝) 유자업(劉子業)

연호 영광(永光) 465년, 경화(景和) 465년/ 재위기간 464년 ~ 465년/ 묘호, 능호 없음

요약: 유자업(劉子業, 449년 ~ 465년)은 전폐제(前廢帝)로 불리는데 유송에서 폐위된 황제가 유자업만 있는게 아니고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도 있기 때문이다. 효무제(孝武帝)와 황후 왕헌원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로 무능하고 타락한 정치로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다 465년 신하들에게 시해당한다.

제6대송태종(宋太宗)명황제(明皇帝)유욱(劉彧)

연호 태시(泰始) 465년 ~ 471년, 태예(泰豫) 472년/재위기간465년 ~ 472년/ 능호 고녕릉(高寧陵)

요약: 유송 명제(劉宋 明帝, 439년 ~ 472년)는 자는 휴병(休炳). 유의륭의 열한번째 아들이자, 전폐제의 숙부.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을 보내 그를 죽였다. 명제는 채흥종(蔡興宗) 등의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했으나 난의 평정 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제7대창오왕(蒼梧王) 유욱(劉昱)

연호 원휘(元徽) 473년 ~ 477년/ 재위기간 472년 ~ 477년/ 능호 창오왕묘(蒼梧王墓)

요약: 유송 후폐제(劉宋 後廢帝, 463년 ~ 477년)은 자는 덕융(德融), 소자(小字)는 혜진(慧震). 명제의 맏아들로 폐위당하여 시호가 없는 대신 후폐제(後廢帝)로 불리는데, 제6대 황제인 유자업 또한 폐제로 불리기 때문이다. 창오왕(蒼梧王)으로 강등당해 창오왕으로 불린다. 아버지 명제가 사망하자, 9살에 황제로 즉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명제의 황후가 되기 전에 이도아(李道兒)의 첩이였다는 말이 있어,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잔혹한 성격이며, 어릴 적부터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때렸다. 살인을 좋아하고, 매일 같이 민가와 거리로 나와서 자신이 제작한 흉기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하지 않았던 날은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의 불만을 샀고 477년 소도성에게 죽는다.

제8대순황제 (順皇帝)유준(劉準)

연호 승명(昇明) 477년 ~ 479년/ 재위기간 477년 ~ 479년/ 능호 수녕릉(遂寧陵)

요약: 유송 순제(劉宋 順帝, 469년 ~ 479년) 자는 중모(仲謀). 제6대 황제 유욱의 셋째 아들로, 제7대 황제 후폐제의 동생. 심약이 편찬한 송서 후비전에서는 실제로는 명제 유욱의 동생 계양왕 유휴범의 아들이라고 했다. 471년, 안성왕(安成王)으로 봉해졌다. 477년, 형 후폐제가 살해당한 후에 소도성에 의해 옹립되었다. 79년 4월, 순제는 소도성에 선양하고 송나라는 멸망한다. 폐위가 된 후 여음왕(汝陰王)이 되었지만 한달 후인 479년 5월 소도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의하면, 순제는 궁전을 나갈 때, "후세에 다시 태어나도 두번 다시 제왕의 가문에 태어나지 않겠다."라고 하여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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