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남북조 시대 - 북조의 흥망

올드코난 2017. 2. 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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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20~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북조를 살펴 본다.


1. 개요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국가에서 중국식 국가체제로 변신을 시도한다. 439년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고, 북위는 육진의 난(六鎭之亂)을 거치면서 534년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하고 동위는 550년 북제(北齊)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北周)가 대신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581년 수나라의 양견이 북주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고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한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5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北朝)라고 불렀다.,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에는 수나라를 북조에 넣기도 한다.


2. 왕조

북위 386년~534년: 탁발규 건국 17황제

동위 534년~550년: 원선견 건국, 한명의 황제

서위 535년~557년: 원보거 건국, 3황제

북제 550년~577년: 고양 건국, 6황제

북주 557년~581년: 우문각 건국, 5황제


3. 북조의 흥망

북위

화북을 장악한 북위 내부에서는 선비족의 풍습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해 한족 중심으로 선비족의 풍습을 버리고 한족화를 진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한족파의 대표는 한인 최호(崔浩)로 최호는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道敎) 교단의 교조 구겸지(寇謙之)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폐불(廢佛)을 주장하고 실행시켰고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해 한족화를 추진하지만 강제적인 한족화는 선비족의 반감을 사 450년에 주살되도고 태무제가 암살당하는 등 북위는 한동안 혼란이 겪는다.

이 혼란을 수습한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이며 5대 헌문제(獻文帝)의 적모(嫡母)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후에 헌문제에게 장남 굉(宏; 효문제(孝文帝))이 태어나자 잠시 물러났으나 효문제의 생모를 죽인 일로 헌문제와 대립해 헌문제를 폐립하고 효문제를 옹립했다. 북위에서는 외척의 횡포를 배제하기 위해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 관습이었다. 문명태황태후는 계속 수렴청정을 하면서 봉록제(封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와 한족화를 추진한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고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하며 493년 수도를 평성(平城)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화 정책을 추진했다. 황실의 성씨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주둔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 조정에서는 8대 효명제(孝明帝)와 생모 영태후(靈太后)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528년 영태후가 효명제를 살해해 혼란은 극에 달하는데 이주영(爾朱榮)이 이를 진압하고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한 후 권력을 잡지만 효장제에 의해 살해되고 효장제 또한 이주영 일족에게 살해당하고 다시 이주영의 부하였던 고환(高歡)이 이주영 일족을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고환에 의해 옹립된 북위 최후의 황제 효무제(孝武帝)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서 관중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군벌의 우두머리였던 우문태(宇文泰)에게로 도망친다. 고환은 534년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북위는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본다. 우문태도 효무제를 살해하고 535년 문제(文帝)를 옹립하고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는데 이는 두 실력자가 제위를 물려 받기 위한 준비 단계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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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동위는 고환이 전권을 장악한 후 서위을 여러 번 공격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547년 고환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고징(高澄)이 계승했다. 이때 하남의 장관 후경(後景)은 자신이 가진 군사력 때문에 고징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위을 이탈해 남조의 양나라에 귀순하고 양나라 무제는 그곳을 접수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으나 동위군에게 대패해 하남은 동위에게 넘어간다. 그 후 양나라에 귀순한 후경은 후경의 난을 일으켜 양나라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고징의 사후 550년 고징의 동생 고양(高洋)이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하는데 남조의 제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제(北齊)라 부른다. 고양의 치세 초기엔 여러 개혁을 추진하고, 북쪽의 돌궐과 거란을 격파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으나 후반기에는 북위의 황족이었던 원씨을 무수히 많이 살해하는 등의 폭거를 저지른다. 고양의 황태자를 살해하고 동생 고연(高演; 효소제(孝昭帝))이 즉위했고, 고연 사후 고연의 황태자를 살해한 고담 무성제(武成帝)가 뒤를 이었다. 북제의 군주는 주벽과 기행이 많아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군사적 재능은 있어 북주와의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둔다. 북제 무성제는 즉위 후 얼마 안 가 아들 고위(高緯; 후주(後主))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정무을 살폈는데 개인적 친분을 가진 총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후주는 주위의 참언(讒言)을 믿고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율광(斛律光)과 난릉왕(蘭陵王) 두 사람을 살해하여 군사력이 약화됐고 북주는 이 사건을 호기로 보고 북제를 침공해 후주를 사로잡은 뒤 얼마 안 가 그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북제는 577년에 멸망했다.


북주

서위의 정권을 장악한 우문태는 무천진(武川鎭) 출신으로 북위말 협서(협西) 일대를 지배한 군벌로 북주, 수, 당의 중추부는 전부 이 무천진 출신자가 차지하게 되고 이때부터 중국은 오랫동안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문태는 새롭게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 제도는 군의 조직을 위로부터 주국→대장군→개부(開府)로 이어저 그 정점에 우문태가 있게 한 것으로 후에 부병제(府兵制)의 근간이 된다.

한족화 정책을 폐지하고 선비족 복고정책으로 전환하고 주례(周禮)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적 복고정책도 추진했다. 후에 주나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런 연유로 553년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을 빼앗고, 다시 후경의 난에 개입해 형주 북부(호북성)에 괴뢰국가 후량을 탄생시켜 남조에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556년 우문태 사후 조카 우문호가 실권을 장악하고 우문태의 셋째 아들 우문각을 옹립해 북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주를 건국한다. 우문호는 초대 우문각(효민제), 2대 명제(명제), 3대 무제(무제)을 옹립하면서 권세가 극에 달했으나 돌궐과 동맹을 맺고 북제 정복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 무제의 책략에 의해 주살당했다. 572년 친정을 시작한 무제는 거대한 권력과 재산, 토지를 소유한 도교, 불교를 탄압해 재산을 몰수하고, 사도승이나 위장승 등을 포함해 일반 승려와 도사를 병사로 징병했다. 한편 관위의 유교, 불교, 도교을 모아 3교의 연구기관으로 통도관을 설치해 우수한 승려나 도사를 학사로 수용하는데 이를 종교에서는 '삼무일종의 폐불' 제2번째라고 한다. 무제는 강력해진 국력을 가지고 575년 북제를 공격했다. 북제는 암군 후주로 인해 반격하지 못하고, 577년 멸망했다. 무제는 남은 남조 진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578년 친정 도중 병사했다. 뒤를 계승한 선제는 무제의 엄한 교육을 원망했는데 선제는 즉위 다음해 장남 우문연(우문연; 정제)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으나, 선제의 정책은 어떤 기준도 없는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좋아하고 주색에 빠져 인망을 잃고 그를 대신해 기대를 받은 사람이 12대장군 중 한 명인 양견(양견, 수 문제)이였다.

양견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었기에 양견은 외척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정제가 즉위하고 580년 선제가 죽자 섭정을 한다는 이유로 전권을 장악한 후 다음해 581년 정제를 압박해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북주를 멸망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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