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동진의 관중 왕도(王導) 평가

올드코난 2017. 2. 1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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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예, 사마소, 사마연까지 3대에 걸쳐 승상을 지내면서 동진 왕조의 강남 통치를 공고하게 다지고 왕씨 가문의 위상을 높였던 동진의 관중 왕도(王導)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왕도(王導 276~339)는 자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으로 낭야군 임기현 사람이다. 중보(仲父)라 불렸고 동각좨주(東閣祭酒)를 지냈다. 서진(西晉) 말기 낭야왕 사마예의 안동사마(安東司馬)가 되고사마예에게 건강(建康)으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해 서진의 도읍지 낙양이 무너지자 남북의 사족들을 연합시켜 사마예를 옹립해 동진 정권을 세우는데 공을 세우고 사마예를 군주로서 위신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 강북에서 온 사마예 무리들을 강남 귀족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공으로 승상(丞相)이 되어 동진 초기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사마예(원황제)는 왕도에게 옥좌에 같이 앉자는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는 왕도의 공도 컸지만 왕씨 일족들이 동진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씨와 마씨가 천하를 다스린다(王與馬 共天下)는 말이 돌게 되는데 왕도는 권력에 대해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만 그의 사촌형 왕돈이 문제였다. 


왕돈은 병권을 장악해 장강 상류를 지켰는데 그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는 인사 전횡 등의 문제가 있었다322년 정월 왕돈은 간신을 제거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유외·조협을 겨냥한 것이었다. 원제는 유외·조협을 불러 수도의 방위를 명하지만 왕돈군에게 대패하고 도망치다 조협은 붙잡혀 죽고그 유외는 끝까지 도망쳐 후조(後趙) 석호(石虎)에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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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거둔 왕돈은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 건강에 입성 승상으로서 중외의 제군을 통솔하고 원제는 울분을 느끼고 병이 들어 그해 11월에 죽고 노란 수염의 태자사마소(司馬紹)가 뒤를 이어 동진의 2대 황제 명제(明帝)가 된다. 이후 반란을 일으킨 왕돈은 기력이 쇠해 죽고 왕돈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다 처벌을 받게 되지만 왕도의 죄는 묻지 않았다.


왕도는 시흥군공(始興郡公)에 봉해지고 승상으로 봉해진 후 국사를 논하다가 서진의 문제 사마소(司馬昭)가 조위 황제 조모를 시해하고 천하를 장악했다는 대목을 얘기하자 명제는 책상에 얼굴을 묻으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26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명제가 죽고 어린 성제 사마연이 즉위하는데 3대 황제 성제가 된다. 왕도는 유량(庾亮)과 함께 보필했다. 함화 2년 327년 역양내사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에 입성해 사마연을 가두고 권력을 장악하는 반란이 일어나지만 소준은 왕도를 존경하여 일체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반란이 평정된 후 왕도는 다시 승상에 올랐다. 339년 7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 성제는 성대하고 웅장하게 장례식을 열어 준다. 


왕도는 욕심이 없고 소박해 곡식을 쌓아 두지 않았고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관대하게 대했고 유능한 재상이었다. 해서 그를 동진의 관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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