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소도성이 세운 남조의 제(齊) 남제(南齊) 설명, 남제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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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 479년 ~ 502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 지방에서 건국된 남조의 2번째 왕조로 북조의 북제와 춘추시대 제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남제(南齊) 또는 초대 황제인 소도성의 성씨를 따라 소제(蕭齊)라고도 부른다. 송나라 말기 소도성은 난릉(蘭陵) 출신의 하급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482년 고제는 즉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무제가 2대 황제로 즉위했다. 무제는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 파견을 중지했다.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었지만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한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어린 군주 두 명의 짧은 재위을 거쳐 명제가 즉위했다. 명제는 전제군주로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 명을 살해했다. 또한 종실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를 파견하여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는등 귀족, 관인들의 불만을 산다. 제6대 황제인 폐제 소보권은 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사치를 일삼는 등 나라라 어지럽히고 소연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하고 다음해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제나라 문화의 중심은 무제의 둘째 아들 경릉왕 소자량의 저택으로 그의 저택에 있던 서쪽처소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였는데 이들 중 8명을 가리켜 경릉팔우(竟陵八友)라고 불렀고 소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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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 황제 계보]

선황제(宣皇帝) 소승지(蕭承之): 제 고제 추숭, 능호 만안릉(萬安陵)

소승지(蕭承之, 384년 ~ 447년)는 중국 유송의 귀족이며 남제의 초대 황제 소도성의 아버지로 자는 사백(嗣伯) 남난릉 출신이다. 430년 우장군 도언지(到彦之)와 함께 5호 16국이 난립하는 북방을 정벌하는 북벌원정에 참여했다 대패하고 433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부임 그 뒤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둔기교위(屯騎校尉)로 임명되고 문제에 의해 청주자사(青州刺史)로 임명되고 남태산태수(南泰山太守)를 거쳐 진흥현5등남작(晉興縣五等男爵)의 작위와 식읍 340호를 받았다. 447년에 죽은 뒤 금자광록대부와 좌산기상시를 추증받았다. 맏아들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한 뒤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다.

제1대 제태조(齊太祖) 고황제 (高皇帝)소도성(蕭道成)

연호 건원(建元) 479년 ~ 482년/ 재위기간 479년 ~ 482년/ 능호 태안릉(泰安陵)

요약: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은 남제의 초대 황제. 자는 소백(紹伯), 유송 말기 남난릉 출신의 하급병사 신분으로 서서히 출세 유송 왕실의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폐제 유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후 479년에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482년 고제 소도성은 즉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무제가 즉위했다.

제2대 제세조(齊世祖) 무황제 (武皇帝)소색(蕭賾)

연호 영명(永明) 483년 ~ 493년/재위기간482년 ~ 493년/ 능호 경안릉(景安陵)

요약: 남제 무제(南齊 武帝, 440년 ~ 493년)는 자는 선원(宣遠), 아명은 용아(龍兒) 소도성의 맏아들. 482년 소도성이 죽자 이어 즉위했다. 여러 번 북위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무제는 아들 경릉왕 소자량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이래 실시했던 부정부패가 심했던 태사(台使)파견을 중지했다.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해 백성들 삶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한족 문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해 귀족을 제압했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린다.

제 세종(齊世宗) 문황제 (文皇帝) 소장무(蕭長懋): 제 울림왕 추숭, 능호 숭안릉(崇安陵)

요약: 소장무(蕭長懋, 458년 ~ 493년 음력 2월 25일) 무제의 맏아들로 자는 운교(雲喬), 소자(小字)는 백택(白澤). 남난릉(南蘭陵) 사람으로 493년에 병으로 36세로 사망했다. 아들 황태손 소소업이 즉위한 뒤 세종 문황제(世宗 文皇帝)로 추존했다.

제3대울림왕(鬱林王) 소소업(蕭昭業)

연호 융창(隆昌) 494년/ 재위기간 493년 ~ 494년/ 능호 울림왕묘(鬱林王墓)

요약: 소소업(蕭昭業, 473년 ~ 494년)은 자는 원상(元尙) 묘호와 시호는 없고 주로 울림왕(鬱林王)으로 불린다. 아버지 황태자 소장무의 사망으로, 황태손으로 옹립되었다. 후에 두 달이 지나서 무제 소색도 사망하였고, 곧이어서 즉위하였다. 갓 스무살이 되었으나 정사에 서툴어서, 경릉왕 소자량과 서창후 소란이 정사를 보좌하였다.

겉으로는 외관이 단정하였고 또 정이 많이 있는 것으로도 보여서 무제와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실상은 이중 인격의 소유자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병이 들자, 겉으로는 울면서 위로했고, 밖으로 나와서 돌아오면 주연을 열었다고 한다. 즉위 후포상을 남발하고 사치가 심해 불과 1년 만에 국가 예산을 탕진한 폭군으로 재위한지 1년이 지나 소란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제4대해릉공왕(海陵恭王) 소소문(蕭昭文)

연호 연흥(延興) 494년/재위기간 494년/ 능호 해릉왕묘(海陵王墓)

요약: 소소문(蕭昭文, 480년 ~ 494년) 자는 계상(季尙), 486년에 임여공(臨汝公)으로 봉해졌곡 494년에 형인 소소업이 폐위되고 살해되자 서창후 소란에 의해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소란이 갖고 있었다. 즉위한 후에 불과 4개월 만에 소란이 황태후를 이용하여 황태후의 조서에 의해서 폐위되었고 해릉왕으로 격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에 의해 살해당한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해릉공왕(海陵恭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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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제(景皇帝) 소도생(蕭道生): 제 명제 추숭, 능호 수안릉(修安陵)

제5대 제고종 (齊高宗) 명황제 (明皇帝)소란(蕭鸞)

연호 건무(建武) 494년 ~ 498년, 영태(永泰) 498년/ 재위기간 494년 ~ 498년/ 능호 흥안릉(興安陵)

요약: 남제 명제(南齊 明帝, 452년 ~ 498년) 자는 경서(景栖) 아명은 현도(玄度)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다. 소도성의 동생 경황 소도생의 아들. 전제군주로 자신의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 명을 살해했고 종실 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을 파견해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일을 보고하게 하는 등 신료들의 불만을 샀다.

제6대 동혼양후(東昏煬侯) 소보권(蕭寶卷)

연호 영원(永元) 499년 ~ 501년/ 재위기간 498년 ~ 501년/ 능호 동혼후묘(東昏侯墓)

요약: 소보권(蕭寶卷, 483년 ~ 501년) 본명은 명현(明賢)으로 명제(明帝)의 정치를 보좌하게 된 뒤부터 보권으로 개명했다. 494년 황태자가 되고 499년에 즉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걷고 간신배와 측근들을 가까이하면서 대신인 서효사와 심문계 등을 죽였다. 이런 폭정 때문에 민심은 이반되고 국세는 나날이 기울었으며 당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군량은 바닥을 보이고, 덩달아 세금은 가중되었으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생활은 사치했고, 황음으로 날을 지새웠다. 이에 소연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포위하자 수비장군 장직(張稷)이 내부에서 호응하여 성은 함락되었고 결국 살해당했다. 묘호와 시호는 폐위되었기 때문에 없고 사후에 동혼후로 격하되었다.

제7대 화황제 (和皇帝) 소보융(蕭寶融)

연호 중흥(中興) 501년 ~ 502년/ 재위기간 501년 ~ 502년/ 능호 공안릉(恭安陵)

요약: 남제 화제(南齊 和帝, 488년 ~ 502년)은 명제의 여덟째 아들, 동혼후 소보권의 동복 동생. 남강왕(南康王), 서중랑장(西中郞將),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어 7주의 군사를 감독했다. 500년 소연이 동혼후 소보권을 죽이자 이어서 소보융에게 황제에 즉위하라고 권하하고 소보융은 거절하다가 결국 이듬해인 501년 정월에 상국이 되었고, 3월에는 강릉에서 황제(화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화제는 502년 3월에 소영주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 소연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제는 멸망하였다. 소보융은 파릉왕(巴陵王)으로 강등되고 고숙에 감금되었으나, 남제의 정삭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502년 15세의 나이로 살해된다. 황제의 예로 공안릉(恭安陵)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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