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남조의 양(梁) 설명, 양나라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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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의 3번째 왕조, 남제 말기 황제 동혼후의 폭정을 하자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 뒤 동혼후를 살해한 뒤 화제를 옹립했고 502년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한다. 양나라를 건국한 소연 무제의 치세는 48년으로 그동안 내정을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 국내를 안정시키며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전성기를 보냈다. 무제의 맏아들 소명태자는 명저 ‘문선’을 편찬한다. 하지만 무제의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해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투신이라는 것을 행하는 무모한 짓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548년 동위의 무장이었던 후경이 투항해 왔다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했고 다음해 건강이 함락됐고 무제는 사로잡힌 뒤 쇠약해져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조카들로 서로의 이득만을 생각해 견제를 한 결과 아무도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 않았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 551년에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원제)은 즉위한 뒤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긴다. 하지만 이런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에 있던 무릉왕 소기와 원제의 대립을 틈타 촉을 점령했고 양양을 가지고 투항해온 소찰을 이용 554년 강릉을 공함한 뒤 원제를 죽였고 그곳의 거민들을 관중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후경의 난 평정 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의 압력에 정양후 소연명을 맞이하여 옹립하지만 진패선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정양후를 퇴위하게 한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 소방지(경제)를 옹립한다.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양나라는 멸망하고 진패선의 진나라가 건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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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나라 황제 계보]

양 태조(梁太祖) 문황제 (文皇帝) 소순지(蕭順之): 양 무제 추숭

요약: 소순지(蕭順之, ? ~ ?)는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 때 사람으로, 난릉(蘭陵) 중도리(中都里) 출신. 유송의 남태치서시어사(南台治書侍御史) 소도사(蕭道賜)의 셋째 아들로 남제의 초대 황제 소도성의 족제, 양나라의 초대 황제 무제의 아버지.

제1대 양고조(梁高祖)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

연호 천감(天監)502년 ~ 519년, 보통(普通) 520년 ~ 527년, 대통(大通) 527년 ~ 529년, 중대통(中大通) 529년 ~ 534년, 대동(大同) 535년 ~ 546년, 중대동(中大同) 546년 ~ 547년, 태청(太淸) 547년 ~ 549년/ 재위기간 502년 ~ 549년/ 능호 수릉(修陵)

요약: 양 무제(梁 武帝, 464년 ~ 549년)는 양나라의 초대 황제. 난릉 소씨(蘭陵蕭氏)의 일문으로 남제 황실의 방계. 남제의 포군 황제 소보권을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다 다음해인 502년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양나라를 세운다. 48년 즉위 초반에는 태평성대로 남조 최대 전성기를 보내지만 520년에 연호를 바꾼 후부터 차츰 정치를 소홀히 하고 불교에 빠져, 불교에 귀의하려는 등 양의 재정은 궁핍해지고 이는 결국 백성들을 수탈하고 착취를 하게 되고 정치가 문란해지고 후경의 난이 발생 포로로 잡힌 후 죽었다.

비정통임하왕 (臨賀王)소정덕(蕭正德)

연호 정평(正平) 548년 ~ 549년/ 재위기간 548년 ~ 549년

요약: 소정덕(蕭正德, ? ~ 549년)은 양나라의 비정통 황제로 자는 공화(公和) 무제의 동생 임천정혜왕(臨川靖惠王) 소굉(蕭宏)의 셋째 아들, 후경에 의해 죽었다.

제2대 양태종 (梁太宗)간문황제(簡文皇帝) 소강(蕭綱)

연호 대보(大寶) 550년 ~ 551년/ 재위기간 549년 ~ 551년/ 능호 장릉(莊陵)

요약: 양 간문제(梁 簡文帝, 503년 ~ 551년)는 소연의 삼남으로 4살에 진안왕에 책봉되고 523년에 옹주자사가 되었다. 531년 4월 장남 소명태자 소통이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져 익사하고 차남 예장왕 소종마저 잃은 소연은 5월에 소강을 태자로 책봉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군왕의 위엄이 있던 인물이기에 반란을 일으킨 후경은 자신의 앞날이 어두워지자 소강을 진안왕으로 폐하고 예장왕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 후경은 수강을 취하게하고 잠들자 흙자루에 담아 그 위에 눌러 앉아 죽였다.

양 고종 (梁高宗; 후량 선제 추숭) 소명황제(昭明皇帝: 양 회양왕 추숭) 소통(蕭統): 능호 안녕릉(安寧陵)

요약: 소통(蕭統, 501년 ~ 531년 5월 30일) 자는 덕시(德施), 양 무제와 귀빈 정령광 사이 첫째 아들. 502년 11월 황태자에 책봉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3살 때 이미 《논어》와 《효경》을 읽어냈고, 5살 때엔 《오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515년 5월에 관례 의식을 치르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보이기도 했으며 문장가로서도 매우 유명하였다. 3만여 권의 장서들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주변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 모였다. 소통은 문인들과 함께 여러 유명한 문장을 모은 《문선》을 편찬했고 《금강경》을 32분(分)으로 편집하였다. 531년에 배를 타고 연못을 유람하던 도중 시녀가 장난으로 배를 흔드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고 그해 5월 30일에 향년 31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소명황태자(昭明皇太子)로 추시됐고 552년 손자 소동이 황제로 즉위한 뒤 소통을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숭했다. 이후 555년 셋째 아들인 소찰이 후량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 뒤 또한 소명황제로 추숭했고 묘호를 더하여 고종(高宗)이라고 했다.

안황제(安皇帝) 소환(蕭歡): 양 회양왕 추숭

요약: 소환(蕭歡, 519년 이전 ~ ?)은 자는 맹손(孟孫), 소명태자 소통의 맏아들. 할아버지 무제로부터 화용현개국공(華容縣開國公)으로 봉해졌다. 동중랑장(東中郎將)과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임명되었다. 531년에 아버지 소명태자가 죽자 무제가 소환을 황태손으로 삼기 위해 건강으로 징소했다. 그러나 소환이 이전에 무제와 소명태자 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을 원망하고 있었고 또 무제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셋째 아들 진안왕 소강이 더 마음에 들어 마침내 한 달 뒤에 소환을 돌려보냈고 이어서 진안왕 소강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건 옳지 않다고 여겼고 의심하자 마침내 무제가 소환을 황태손으로 삼지 않는 대신에 그의 원래 봉지인 화용현보다 더 큰 땅인 예장군(豫章郡)에 예장군왕(豫章郡王)으로 높여 봉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웠다. 또한 운휘장군(雲麾將軍)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높여 임명했다. 죽은 뒤 시호를 예장안왕(豫章安王)으로 하고 551년 맏아들 소동이 황제로 즉위한 뒤 소환의 시호를 안황제(安皇帝)로 높여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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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회양왕 (淮陽王) 소동(蕭棟)

연호 천정(天正) 551년/재위기간 551년/ 능호 회양왕묘(淮陽王墓)

요약: 소동(蕭棟, ? ~ 552년). 간문제를 이어서 즉위하지만 폐위당해 시호와 묘호가 없고, 즉위 전 작위였던 예장왕으로 칭하고 있다. 소명태자의 손자이며 안제 소환의 장남이다. 원제가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하고 소동과 그 동생들은 풀려나지만 원제가 강릉으로 천도할 때 원제는 소동이 복위할 것을 경계해 소동이 타고 있던 배에 구멍을 내 침몰시켰고 소동은 동생들과 함께 물에 빠져 익사했다.

비정통무릉정헌왕(武陵貞獻王) 소기(蕭紀)

연호 천정(天正) 552년 ~ 553년/ 재위기간 552년 ~ 553년

요약: 소기(蕭紀, 508년 ~ 553년)는 무제의 여덟째 아들로 간문제와 원제의 동생이다. 후경의 난 당시 소기는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 하지 않아 아버지 무제가 죽은 뒤 551년에야 후경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형섬(荊陝)을 포위하려고 했다. 552년 소기는 맏아들 무릉세자 소원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성도를 수도로 즉위하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개원하고 원제와 다투다 서릉협의 협구에서 번맹에게 피살된다.

제4대 양세조(梁世祖)효원황제(孝元皇帝) 소역(蕭繹)

연호 승성(承聖) 552년 ~ 555년/ 재위기간 552년 ~ 554년/ 능호 강릉(江陵)

요약: 양 효원제(梁 孝元帝, 508년 ~ 554년)는 무제의 일곱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많은 책을 읽어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서화, 문장에 뛰어나 저작을 남겼다. 하지만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고 의심이 많고 과단성이 없었다. 학자로서는 몰라도 황제의 그릇은 아니었다. 황로 사상을 숭상해서 강릉이 서위에게 포위됐을때도 태평스럽게 <노자>를 강의하여 백관들은 갑옷을 입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억지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했다. 강릉이 포위당했을때 감옥에는 수천 여명의 사형범들이 갇혀 있었는데 관원은 그들을 풀어 군사로 충당시키고 무기를 주어 싸우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고 지시하는 등 패배를 자초해 결국 소찰의 지시에 의해 피살된다.

제5대양숙종(梁肅宗 양영가왕 추숭)민황제(閔皇帝) 건안공(建安公)소연명(蕭淵明)

연호 천성(天成) 555년/ 재위기간 555년/ 능호 건안공묘(建安公墓)

요약: 소연명(蕭淵明, ? ~ 556년)은 묘호와 시호가 있지만 폐위되었기 때문에 즉위 전의 작위인 정양후라고도 부른다.. 무제의 형인 장사선무왕 소의의 아들로 원제의 사촌형제. 후경의 난에 의해 양나라는 쇠약해졌고 난을 평정한 원제도 서위에게 붙은 소찰에게 살해되자 동위를 멸망시킨 북제는 서위에 대항하기 위해 억류되어 있던 소연명을 즉위시킨다. 소연명이 즉위하자 북제의 군대는 되돌아갔는데, 이 틈을 노린 진패선은 왕승변을 공격해 죽이고 그 일당까지 모두 제거하고 이어서 소연명을 폐하고 소방지를 즉위시켰다. 폐위된 소연명은 건안공(建安公)에 봉해졌다. 이후 진패선은 소연명을 북제로 쫓아내려 하지만 그 전에 소연명이 병사한다.

제6대양 목종(梁穆宗 양 영가왕 추숭) 경황제 (敬皇帝) 효성황제 (孝成皇帝) 소방지(蕭方智)

연호 소태(紹泰) 555년 ~ 556년, 태평(太平) 556년 ~ 557년/ 재위기간 555년 ~ 557년/ 능호 강음왕묘(江陰王墓)

요약: 양경제(梁 敬帝, 543년 ~ 558년) 원제의 아홉 번째 아들, 554년 원제가 강릉에서 서위에 패해 소찰에게 살해되고 북제가 소연명을 즉위시키지만 북제군이 물러가자 진패선과 왕승변이 대립 진패선이 왕승변을 살해하고 소연명을 폐한 뒤 소방지를 즉위시켰다. 557년 경제가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양나라는 멸망한다. 이후 경제는 진패선에 의해 강음왕으로 책봉되고 이듬해인 558년 진패선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비정통영가왕 (永嘉王) 소장(蕭莊)

연호 천계(天啓) 558년 ~ 560년/ 재위기간 558년 ~ 560년

요약: 소장(蕭莊, 548년 ~ 577년)은 원제의 손자이며 소방등의 아들. 552년 원제가 즉위한 뒤 영가왕(永嘉王)으로 삼았고 554년 서위가 소찰과 더불어 강릉을 공함하고 소역을 잡아 죽였을 때 소장은 당시 7세로 추격을 피해 어느 민가로 도망가 숨었다. 이후 왕림(王琳)이 소장을 찾아내어 건강으로 보냈고 건강에 도착한 소장은 경제가 즉위한 뒤 인질이 되어 북제로 보내졌다. 557년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하자, 왕림 등 사람들은 양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북제에 소장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다. 왕림 등은 소장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영주(郢州)에서 양나라 황제로 옹립했고, 소장은 이듬해인 558년에 연호를 천계(天啓)로 개원했다. 소장은 장강 중·상류 유역의 땅에 의지하여 진나라와 싸웠다. 560년 왕림과 진나라의 후진(侯瑱)이 무호(蕪湖)에서 싸웠다. 그런데 이때 북주에서 군사를 보내 영주를 공격하자, 결국 왕림이 패배했고 영주는 함락되어 소장은 북제로 도망치고 양나라 부흥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소장이 북제로 달아나자 북제는 소장을 개부의동삼사와 양왕으로 봉하고 양나라를 다시 일으키도록 허락하고 도왔다. 그러나 577년에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당하자 소장은 분통해하다 업에서 병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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