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시대에는 16국 외에 여러 나라가 있다. 정리해 본다.
1. 구지 (仇池)는 후한의 건안 년간, 저족의 양등솔(楊騰率)이 부족을 인솔하여 수립한 지방정권이다. 삼국시대 양주의 마초, 한수, 양추와 현재의 감숙성 일대에 세력을 가졌던 저족왕 아귀회(阿貴匯)와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지만 패전해 일부 세력은 촉나라에 투항하고, 투항하지 않은 자는 조조에 의해 천수 일대로 이주되었다. 사마소가 위나라의 정국을 주도할 즈음, 저족의 양비룡은 정서장군에 봉해졌고 부족을 인솔하여 고지 회복운동을 개시하였다. 양비룡의 양자가 된 양무수는 296년 스스로 보국장군 우현왕을 자칭하고 부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건국 후 구지공을 칭하고 무도(武都), 음평(陰平)군을 통치한다. 317년 구지는 후계 문제로 형제 간에 내분이 발생한다. 양무수의 장자 양난적은 좌현왕으로 하변(下辨)을, 동생 양견두는 우현왕으로 하지(河池 현재의 徽県)를 통치하였는데 둘은 극심하게 대립하고 결국 형이 동생을 이기고 자리를 이었지만 한때 농남(隴南)의 대부분을 통치하던 구지는 그 세가 점차 쇠하기 시작했다. 371년에 전진의 부견이 파견한 양안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다.(전구기 멸장) 이후 전진이 멸망하면서 부견의 사위 양정은 부족을 이끌고 농우에 돌아와 385년에는 용양장군 구지공을 자칭하며 자립해 후구지 정권을 수립한다.
2. 대나라(代, 315년 ~ 376년)는 남북조시대 북위의 전신으로. 시조는 탁발의로. 261년 탁발부의 탁발역휘(拓跋力徽)가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이것이 훗날 국호를 위나라로 정하게 되는 한가지 이유가 된다. 서진은 이들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산서 북부의 땅을 주어 살게 해 주었다. 315년 오호십육국 시대에 군장(君長)인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십익건(拓跋什翼健)의 시기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 도무제(道武帝))는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해 쇠퇴한 시기를 틈타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이후 1년후 국호를 위나라로 정했다.
3. 염위(冉魏, 350년 ~ 352년)는 염민(冉閔)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국호는 원래 위(魏)이지만 같은 이름의 여러 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황제의 성씨를 따 염위라고 부른다. 건국자 염민은 후조(後趙)의 무장으로 349년에 후조의 정권을 장악 350년 윤정월에 후조의 황제 석감(石鑒)을 폐위하고 염위를 건국한다. 염위의 세력은 수도 업(鄴) 인근에 불과해 양국(襄國)에 수도를 둔 후조의 황제 석지(石祗)와 대립해 치열하게 난전을 벌였다. 351년에 후조의 석지를 암살하여 후조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352년에 양국을 함락하였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어 군대의 보급도 부족했다. 이에 염민은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는데 이를 틈타 전연(前燕)이 염민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체포하였다. 염민이 체포된 후 살해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에서 농성하였다. 염지는 동진(東晉)의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전국새(傳國璽, 옥새)를 동진에 보냈으나 곧 부하의 배반으로 업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 염위는 멸망하고 염지는 354년에 처형된다.
4. 서연(384년 ~ 394년)은 선비족(鮮卑族) 모용홍(慕容泓)·모용충(慕容沖)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국호는 연(燕)이다. 370년 전연(前燕)이 멸망한 후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거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는데 관중으로 이주된 모용홍·모용충 형제는 부견이 비수 대전(淝水大戰)에서 패배하자 관중에서 선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홍은 장안(長安) 동부에서 도독섬서제군사·대장군·옹주목·제북왕(都督陝西諸軍事大将軍雍州牧濟北王)을 자칭하였고 모용충은 병주(幷州) 평양(平陽)에서 거병하였다.(384년)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서연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모용충은 토벌군에 의해서 격파되었으나 무리를 이끌고 모용홍과 합세하였고, 모용홍은 토벌군으로 온 부예(苻睿), 요장(姚萇) 등을 격파하고 전진의 수도 장안을 함락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장안으로 진격하던 도중인 6월 경 모용홍은 불만을 품은 부하에 의해서 살해되고 동생 모용충이 추대된다. 모용충은 전진군의 공격을 물리치며 장안으로 진격하여 아방성(阿房城)을 점령하였고 장안을 포위하였다. 385년 정월에는 아방성에서 황제에 즉위하였고 장안에 대한 포위 공격을 계속하여 6월 말에 부견·부굉 등이 장안을 탈출하자 장안을 점령하였다. 장안을 점령한 모용충은 장안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경영하려 하였으나 선비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해 386년 2월에 한연(韓延) 등이 모용충을 살해하고 단수(段随)를 옹립하였다.
단수도 곧 정변으로 살해되었고, 서연의 군벌 모용항(慕容恒)·모용영(慕容永) 등은 모용의(慕容顗)를 옹립하고 선비족 40여 만 명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을 버리고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내분이 일어나 모용의는 살해되고 모용항이 모용요(慕容瑤)를 옹립하는데, 모용요는 곧 민심을 잃어 모용영이 세력을 잡았다. 모용영은 모용요를 죽이고 모용충(慕容忠)을 옹립하였다. 모용영과 모용충은 다시 이주를 시작하여 문희(聞喜)에 도착하였는데,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가 황제에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를 멈췄다. 곧이어 6월 모용충이 살해되고 모용영이 옹립되었는데, 모용영은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할 것을 표명하였다. 10월에는 전진의 부비(苻丕)에게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곧 부비와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다. 승리한 모용영은 병주 남부 일대의 전진 세력을 일소하고 장자(長子)를 수도로 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다. 서연은 병주 남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동진(東晉)이나 후진(後秦)과 대립하고 후연이나 적위(翟魏)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적위가 392년에 후연에게 멸망하자 모용영은 적위의 황제 적교(翟釗)의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1년 뒤 적교가 모반을 꾀하였기 때문에 처형하였다. 393년 12월, 모용수가 서연을 공격하자 수개월 동안 전투를 치른 끝에 394년 8월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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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적위(翟魏 388년 ~ 392년)는 정령(丁零)족이 건국한 나라로 국호는 위(魏)이지만 군주의 성 적씨를 붙여 적위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정령족은 원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고거, 고차(高車), 철륵(鐵勒)으로 불렸던 민족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기에 정령의 일파가 화북 평원으로 남하하는데,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은 이들을 받아들여 화북 각지에서 살도록 한다. 정령의 수장이었던 적빈(翟斌)은 낙양(洛陽) 인근에서 살았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한다. 모용수(慕容垂)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해 맹주로 삼았고 뒤이어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모용수가 업(鄴)을 포위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적빈은 전진의 부비(苻丕) 쪽에 붙어 모용수의 진중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반은 실패하여 적빈은 죽었으며 적빈의 조카인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이후 화북 각지에서 후연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던 정령족은 385년에 적진이 죽고 뒤를 이은 적성(翟成)도 무너지면서 화북 일대에서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한다. 한편 적진의 사촌형 적요(翟遼)는 적진이 죽자 일부 부락을 이끌고 남하, 황하를 건너 여양(黎陽)의 동진(東晉) 세력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386년에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점거하고 산동성 서부 일대에 세력을 구축한다. 387년에 후연이 공격해오자 적요는 후연에 복속되었다. 적요는 노(魯) 지역에서 할거 하다 10월에 후연을 배반하고 자립, 388년 2월에 위(魏)나라를 세운다. (적위 翟魏) 적요는 천왕을 자처하며 후연, 동진을 노략질하였다. 적요에 이어 적교(翟釗)가 뒤를 이었다. 392년 초 모용수는 노략질을 일삼는 적위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적교는 이에 대응하여 관도를 선제공격하며 역공세를 편다. 모용수가 여양에서 도하할 준비를 하자 적교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한다. 모용수는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서진으로 군영을 옮기고 함선 100여 척을 만들어 도하하려는 속임 전법을 구사한다. 적교는 모용수의 속임수에 넘어가 서진으로 병력을 이동하였다. 적교가 여양진을 비운 사이 숨겨두었던 모용진(慕容鎭)의 별동대가 황하를 건너 군영을 설치하였다. 적교는 다시 여양진으로 돌아가 적의 군영을 공격하였으나 서진에서 건너온 모용농 군대에 협공을 받아 패배하였다. 적교는 단신으로 서연으로 도주하여 모용영에 휘하에 들어 갔으나 1년 후 반란을 획책하다가 참수되었다.
6. 후촉(後蜀, 405년 ~ 413년)은 지금의 쓰촨 성에 위치했던 국가로 건국자인 초종의 성을 따 초촉(譙蜀)이라고도 한다. 의희(義熙) 원년 405년 촉군(蜀軍)은 동진에게 강릉(江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대했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초종을 주군삼아 성도를 공격하고 함락했다. 초종은 스스로를 성도왕(成都王)이라 칭하고 여기서 후촉을 건국한다. 그러나 후촉의 건국은 동진의 장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때에 건국한 것이기 때문에 이 약체를 극복하기 위해 407년 후진(後秦)에 사신을 보내 스스로를 번속(藩屬)으로 후진에게 종속하여 408년 동진의 공격을 받았을 때 후진의 지원을 받아 동진군 격퇴에 성공한다. 413년 동진은 재차 후촉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유유의 부장인 주영석(朱齡石)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후촉군은 완전히 패배하고 성도는 함락된다. 이후 초종은 자결하고, 후촉은 멸망한다.
7. 탕창(宕昌)은 탕창강(宕昌羌)이라고 한다. 강족이 세웠던 정권으로 오호 십육국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존재했다. 도성은 탕창성(현재의 당창 현 서쪽)이다. 수장의 성씨는 "양(梁)"이라고 했다. 양근이 탕창왕을 자칭한 것을 초대로 한다. 양근과 그 후계자들은 당시 남북조 정권에 조공해서 책봉을 받고 있었다. 564년 탕창왕 양미정이 종종 북주의 영역을 침범했으므로 북주 무제의 분노를 샀다. 무제가 대장군 전홍에게 명해서 탕창국을 토벌해 그 땅에 탕주(宕州)를 설치해 탕창국은 여기서 멸망했다.
8. 등지(鄧至)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강족이 세운 나라로 "등지강(鄧至羌)", "백수강(白水羌)"이라고 한다. 구지의 서쪽, 탕창의 남쪽에 위치했다. 도성은 등지성(현재의 쓰촨 성 주자이거우 현 서쪽)이다. 수장의 성씨는 "상(像)"이라고 했다. 백수 추장 상서치가 왕을 칭해 북위 효문제에게 사자를 보내 용양장군 등지왕(龍驤將軍鄧至王)에 봉해진 것을 초대로 한다. 남조에 대해서는 대대로 지절 평북장군 서량주자사(持節平北將軍西涼州刺史)를 칭했다. 502년 상서팽이 양나라에 사자를 보내 독서량주제군사 안북장군(督西涼州諸軍事安北將軍)의 직위를 받았다. 554년 상첨항이 실각하고 서위로 도망쳤는데 우문태가 장무공 우문도에게 군사를 이끌어 그를 호송케 해 복위케 했다. 그 뒤의 일은 사료에 없다. (북주가 서위를 대신한 이후 그 땅에 등주(鄧州)가 설치됐기 때문에 늦어도 이때에는 등지가 멸망한 것으로 예상된다.)
9. 환초(桓楚, 403년 ~ 404년)는 동진 시대 초왕 환현이 세운 단명 왕조로 403년(원흥)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초왕 환현이 안제에게 선양을 강요해 제위를 양도하는 형태로 성립한 정권이다. 403년 12월 20일 안제는 옥새를 헌상하고 환현에게 양위했다. 404년 1월 1일 환현은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해 국호를 초(楚)로 고치고 연호를 영시(永始)로 개원했다. 다른 초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환현이 세운 이 정권은 환초라고 부른다. 명목상 환초는 건국 후 직접 동진의 영토를 계승했지만 실제는 그 세력 범위는 강릉 이동의 장강 중하류 일대에 머물렀다. 건국에서 얼마 안 돼 3개월 뒤 404년 유유가 환현 타도 정변을 일으켜 서선지·제갈장민·단도제·유의 등도 유유에게 호응했고 이들에게 패배한 환현은 건강을 탈출해 안제를 인질로 삼아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아들 환승과 함께 익주도호 풍천에게 살해돼 종형제 환겸이 안제에게 국새를 봉환하여 환초는 멸망했다. 환초 멸망 후 환씨 일족은 군사를 일으켜 동진군에 맞서 패배하기 전 수년간 장강 중류 일대에서 존속했다.
10. 우문선비(宇文鮮卑)는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跋部) 등과 같은 선비(鮮卑)의 한 부족으로서, 시라무렌 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문부는 처음에 모용부에 복속했고 모용부가 탁발부에 의해 멸망하자 거주지를 북위(北魏) 무천진(武川鎭)으로 옮겨 현민(縣民)이 되었다. 557년 우문부 출신의 우문태(宇文泰)는 처음 북위에서 일어난 6진의 난에 참가했다 하발악(賀拔岳)에게 귀순해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발악의 사후 그가 가지고 있던 기반으로 관중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세력을 확대한 우문태는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北周)를 세웠다. 북주는 581년 수나라에게 멸망한다.
11. 단부선비(段部鮮卑)는 서기 2세기경에 단석괴(壇石槐)가 세운 선비족의 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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