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시대 하(夏, 407년 ~ 431년)는 남흉노(南匈奴)의 후예인 혁련발발(赫連勃勃)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역사상 마지막으로 선우(單于)를 칭했던 흉노 국가다. 흉노의 선조가 고대 하나라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국호를 하로 정했다. 현존하는 하나라의 문물로는 통만성 유적지, 대래성(代來城) 유적지, 태하진흥전(太夏眞興錢)(419년), 전구묘지(田口墓誌)(420년), 대하석마(大夏石馬)(424년), 시문조상(施文造像)(429년), 기년문서로써 돈황, 투르판 문서 수점이 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것 중에는 대하용작도(大夏龍雀刀)(413년) 및 통만성 남비 (統万城南碑頌)(419년)등이 있다.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 하(夏)나라 설명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남흉노의 철불부(鐵弗部)는 오르도스에서 일대 세력을 구축한다. 철불부의 선조는 삼국 시대 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於夫羅)의 조카뻘인 철불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로 조조(曹操)의 신임을 받아 남흉노를 관할하고 한나라의 유씨(劉氏) 성을 사용했다. 310년 거비의 손자 유호(劉虎)가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에게 본거지인 산서 일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와 할거하면서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진(前秦)에게 차례로 협력한다. 유호의 손자 유위진(劉衛辰)의 대에 다시 탁발부에 패하여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전진의 영내로 이주한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의 탁발부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오르도스로 다시 이주했고 탁발부, 유연(柔然)을 복속시켰다.
386년 탁발부가 다시 성장하여 대(代 ; 후에 북위{北魏}로 국호를 바꿈)를 건국하고 391년에 북위의 원정군에 유위해가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한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劉勃勃)은 오르도스 서남쪽의 고평(高平)까지 도망쳤지만 그 후에도 북위의 토벌군이 여러차례 공격해 와 유랑 끝에 후진(後秦)에 몸을 의탁하고 후진은 북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발발을 오르도스에 배치한다.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부 및 선비의 여러 부족을 규합해 후진에게서 독립하고 대선우 대하천왕(大單于 大夏天王)이라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한다.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고 413년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 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統萬城)을 축성해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강국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에는 북연(北燕)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해 415년까지 산서(山西) 일대를 점령한다. 415년에는 북량(北凉)과 동맹해 후진 및 서진(西秦)과 대립한다. 417년 관중(關中)의 후진이 동진(東晉)의 유유(劉裕)에 의해 멸망당하자 하나라 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418년 장안(長安) 등 관중의 여러 성을 점령한다.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통만성을 수도로 하고, 장안을 남도(南都)로 정하고 419년에 진흥(眞興)이라 개원한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산서 남부에 이르렀고, 토욕혼(吐谷渾), 북량(北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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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년 혁련발발은 장안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차남 황태자 혁련괴(赫連璝)를 폐하고 사남 혁련윤(赫連倫)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혁련괴는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통만성을 공격한다. 혁련괴는 혁련윤을 살해하지만 삼남 혁련창(赫連昌)에게 패해 죽었고 이에 혁련발발은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425년 혁련발발이 죽고 혁련창이 즉위했다.
426년 혁련창은 서진을 공격해 수도 포한(枹罕)을 함락하고 서평(西平)까지 진격하지만 본국이 비어있는 틈을 타 쳐들어온 북위에게 관중의 여러 성을 빼앗겼다. 427년에는 북위의 2차 원정군이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해 안정(安定)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했지만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배하고 428년 혁련창은 북위군에 사로잡혔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赫連定)은 평량(平涼)으로 도망쳐 대선우에 즉위하고 각지의 패잔병을 규합해 관중을 회복하고 통만성을 제외한 오르도스 여러 성을 탈환하였다. 430년 혁련정은 송(宋)과 동맹을 맺고 통만성 탈환에 나섰으나 북위는 3차 원정군을 파견해 이를 격파하고 평량(平涼까지 함락시켰다. 하는 다시 와해되어 혁련정은 패잔병을 이끌고 상규(上邽)로 도망쳐서 수도로 삼았다. 431년 1월, 혁련정은 재기를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여 남안(南安)의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서 전군을 이끌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 6월, 하군은 황하를 건너는 도중 복속했던 토욕혼에게 습격을 받아 괴멸당하고 혁련정도 사로잡혀 하는 멸망하고 혁련정은 432년 혁련창은 434년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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