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의 구제실(舊帝室)이며 유럽 제일의 명문가(名門家). 10세기경 알자스에서 북(北)스위스에 걸친 소영주(小領主)에서 비롯되었고, 11세기 스위스에 산성 합스부르크(매의 성)를 쌓은 후로 합스부르크백(伯)이라 불렀다.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이후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諸侯)
가 1273년 이 집안의 루돌프 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를 획득함으로써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이며 초대 오스트리아공(公)인 알브레히트 1세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1308년 암살된 후로 15세기까지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가령(家領) 확대정책을 착착 진행시켜 케른텐·클라인 등을 가령에 병합시키면서 이 집안은 남동(南東) 독일의 대세력이 되었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의 국왕 즉위 이후로는 독일의 왕위와 제위(帝位)
를 계속 차지하였다.
15세기 말의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로, 에스파냐 왕실과의 통혼으로 가령확대를 꾀하였고, 그의 손자로 황제와 에스파냐왕을 겸했던 카를 5세(世)에 이르러 지배영역은 최대규모에 달하였다. 카를 5세 이후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系)와 펠리페 2세의 에스파냐계로 분열되었다가, 후자는 1700년에 소멸되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계의 합스부르크는 독일 제위를 보유하고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본령(本領) 외에 헝가리·뵈멘 등을 영유(領有)하고, 프랑스의 부르봉왕가(王家)
와 대항하는 동방의 국제적 세력이었다.
프랑스와의 대립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계속되어 나폴레옹과도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패하여 라인동맹 성립을 계기로 신성(神聖)로마제국의 칭호를 버리고, 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 프로이센과의 대항에서 패하여 독일 통일의 지도권을 빼앗기고 독일제국의 세력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카를 1세가 퇴위하여 500년에 가까운 황제가(皇帝家)
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의 거점, 빈의 역사>
빈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10세기경부터이지만 12세기에 들어서는 변경백(邊境伯) 바벤베르크가(家)의 소유가 되었고, 1137년 비로소 도시(Civitas)
라고 불렀으며, 이후 도나우강에 의한 교역발달에 따라 점차로 번영하였다. 1221년 상업독점권의 인정으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37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자유가 부여되어 제국도시가 되었다. 51년 보헤미아에 영유되었으나, 76년 합스부르크가의 소유가 되었다. 14세기에는 상업 및 문화 중심지로서 인구도 점차 증가하고,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인 쟝크트슈테판대성당 등이 건립되었다.
또 1635년 독일계 최초의 대학이 개설되었고, 15세기 중엽 이래 계속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 수도로서 르네상스시대의 문화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485년부터 수년간 헝가리에 점령되었고 또 투르크족의 진출과 세계 무역로의 이동 등으로 경제 활동은 약간 쇠퇴하였으나 정치중심지로서 제국의 많은 중앙관청이 설치되었다. 1529년 한때 투르크군(軍)
에 점령되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시민의 다수가 그리스도교 쪽으로 옮겼으나, 오래지 않아 가톨릭 세력이 다시 회복되어 이탈리아·에스파냐 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1683년 또다시 투르크군에 점령되었으나 바로 탈환하였고, 그 뒤에는 합스부르크군에 점령되었으며, 합스부르크제국의 융성과 함께 유럽의 대도시가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인 18세기 후반에는 글루크·하이든·모차르트 등으로 대표되는 음악과 연극이 번영하였고 교육·연구기관이나 의료시설 등이 정비되는 한편, 도기공업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스위스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특히 우리 지방은 중유럽과 이탈리아를 잇는 가도에 해당되며 경제적·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남북에서 모두 이를 차지하였다. 10~11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구역은 황제직할지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제후의 세력이 크고 황제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스위스 지역도 독자성을 지키고 자주정신이 강해졌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는 체링가가 지배하였으나 그 후 합스부르크가(家)가 동스위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얻어 차츰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대공위시대(1256~73)
에는 자치의 자유를 얻었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가 되자 이 자치도 위태로워졌다.
1291년 루돌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슈비츠의 공동자치체의 수장(首長)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들어간 운터발덴 지방의 수장과 만나 8월 1일 상호지지를 약속하는 영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ࡐ원시 3주(또는 森林諸州)ࡑ의 연합이 스위스의 기원으로 간주되어 8월 1일을 국경일로 하며, 국명은 슈비츠에서 기원한다. 합스부르크가의 압제에 저항한 농민들의 활동은 후에 전설화되어 빌헬름 텔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이를 주제로 한 실러의 희곡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315년에는 아인지델른의 수도원 보호를 구실로 침입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3주의 결속을 강화하고 특권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이 때 제국 귀족의 기병대를 격파한 스위스 농민의 장창대(長槍隊)는 그 명성을 떨쳤다. 22년 루체른, 51년 상업도시인 취리히, 52년 글라루스·추크, 53년 베른이 포함되어 8주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후 슈바벤과 라인 지방의 도시들과도 연합하여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한 동맹은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젬파하(루체른주)에서, 알브레히트 3세의 군대를 네펠스(글라루스주)
에서 격파하고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1474년부터는 부르고뉴의 샤를 호담공의 침입을 막은 스위스 민병은 프랑스 루이 11세의 용병이 되어 더욱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8주 동맹은 본래 국가를 형성할 의도가 없었고 각 주는 저마다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도시적 성격의 주와 농촌공동체적 주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 굳건한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르고뉴에 대한 승리도 영예와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분쟁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어 부국강병을 꾀하고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 스위스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각 주는 단결하여 과세·병역 및 제국법정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막시밀리안은 1499년에 스위스를 공격하여 슈바벤전쟁이 시작되었다. 스위스는 9개월도 못 되어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바젤화약의 결과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신성(神聖)로마 황제 오토 2세(재위 973~983)가 976년에 이 지역을 바이에른 후작(侯爵)의 변경령(邊境領:Bayrische Ostmark)으로 정하였고, 다음 대인 오토 3세(재위 983~1002) 무렵에 처음으로 ࡐOsterriche(동쪽의 나라)ࡑ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지방은 바벤베르크 변경백(邊境伯:12세기 중엽에 공작으로 승격)이 통치하였으나, 얼마 후인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의 영유지(領有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이 지방을 중심으로 가령(家領)의 확대정책을 추진하고, 프리드리히 3세(재위 1440~93)가 모든 가령을 통합하였다. 다음의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다시 네덜란드·북(北)티롤 등을 병합하는 한편, 혼인정책(婚姻政策)에 의해서 에스파냐 왕국과도 결합하였다. 뒤를 이은 황제 카를 5세(에스파냐왕 카를로스 1세:재위 1519~56)는 독일의 합스부르크가령(領)을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었다(21).
페르디난트는 투르크군(軍) 침공으로 헝가리왕이 전사(戰死)하자 그 왕위와 헝가리왕이 겸하고 있던 보헤미아왕위도 손에 넣었다(28). 이와 같이 그 지배권은 현저하게 확대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영내(領內)에 많은 이민족(異民族)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무렵은 종교개혁(宗敎改革)에서 비롯되는 동란기였는데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엄격한 구교주의(舊敎主義)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보헤미아나 헝가리의 신교(新敎)세력과 격심한 대립을 하였다. 더욱이 헝가리 영유는 대(對)투르크 방위전(防衛戰)에 쫓기는 결과를 빚어 이 기회를 틈탄 프랑스의 신교파(新敎派)의 공격까지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위(帝位)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재위 1619~37)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후작과 함께 구교도연맹의 중심이 되어 바이센베르크 싸움(20)에서 신교도동맹을 지배하는 보헤미아세력을 격파한 데 이어 헝가리의 반란을 억압함으로써 절대주의적 지배의 기초를 굳혔다. 30년전쟁 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서 독일의 제후(諸侯)는 완전한 영방주권(領邦主權)을 획득하였으나 10년 후에 즉위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는 사보이공(公) 오이겐의 힘으로 다시 투르크의 침입을 억압하고 전(全)헝가리령(領)을 평정하였다. 에스파냐 계승전쟁(繼承戰爭:1701~13)에서는 프랑스를 격파하고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의 결과 밀라노·나폴리·네덜란드 등을 획득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그때까지의 에스파냐 의존체제에서 벗어나 프랑스와 어깨를 겨루는 유럽의 열강(列强)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영토는 분산되고 또 이민족의 문제로 시달리게 되어 결국 독일의 주도권을 신흥(新興)프로이센에 넘겨주는 결과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최후의 남자인 카를 6세(재위 11~40)가 국가기본법(프래그머틱생크션)을 제정하여 전(全)합스부르크가령의 영구 불분할(不分割)과 여자상속제를 정하여 관계 열국의 승인을 얻으려 한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죽자 바로 바이에른·작센 및 에스파냐가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나 사르데냐도 자국(自國)의 이익을 위하여 이것을 지지하여 결국 오스트리아 계승전쟁(40~48)이 시작되었다. 한편, 프로이센도 또 이 기회를 틈타서 예전부터 바라고 있었던 중요자원지역인 슐레지엔(실레지아)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40~80)는 결국 아헨 화약(和約)으로 계승권을 승인받고, 대신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할양하였다. 슐레지엔 탈환을 꾀하는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재상(宰相) 카우니츠를 채용, 국력 충실에 진력하는 한편, 프랑스·러시아 및 독일의 여러 영방(領邦)과 손을 잡고 프로이센과 싸웠으나(7년전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절대주의적 근대국가로 확립시킨 것은 그녀의 힘이었으며 나중에는 폴란드 분할에도 참여하여 갈리시아 지방을 획득하였다.
요제프 2세(재위 80~90)는 계몽적 전제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농민해방, 종교의 관용 등 계몽주의적 개혁에 주력하였으나 복잡한 국정(國情) 때문에 충분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 파급을 두려워하였고, 또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걱정한 레오폴트 2세(재위 90~92)는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프랑스에 간섭하였다.
다음 대인 프란츠 2세(재위 93~1806)도 영국·네덜란드·에스파냐 등과 대동맹(大同盟)을 체결하고 재삼(再三) 프랑스와 싸웠으나 패전을 거듭하여 1791년에는 캄포포르미오 화약에서 북(北)이탈리아의 영토 밀라노와 네덜란드를, 1801년 뤼네빌 화약에서는 라인 좌안지방(左岸地方)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네덜란드·스위스·롬바르디아 등지에서의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하였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화약에서는 티롤·베네치아 지방을 할양하였다.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조직하여 스스로 그 보호자가 됨으로써 프란츠 2세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났으며(물러나기 2년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음), 이에 따라 중세 이래의 신성(神聖)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1809년 빈 화약에서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굴복하고 왕녀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황후가 되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1812)에도 참가해야 했다.
<스페인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4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에스파냐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가톨릭 신자인 이들 두 왕이 92년 에스파냐에 남아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시킴으로써 에스파냐는 절대주의시대에 접어들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이미 13세기부터 국왕이 반항적인 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귀족과 대립하는 사람 및 왕실재정 지지자를 도시대표로 만들어 가신단(家臣團)회의에 참가시키고, 코르테스라는 신분제 의회를 만들어 통치기관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왕권의 도시제휴 정책을 계승한 이들 두 왕은 신성도시동맹(神聖都市同盟:Santa Hermandad)을 결성하였으며 동맹 도시에 재판권과 경찰권을 줌으로써 도시는 귀족을 대신하여 국왕의 군사력·경찰력의 중핵이 되었고 왕권에 충실한 시민 출신의 새 귀족층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두 왕은 또한 성채 파괴 등의 귀족억압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귀족을 부재지주화·궁정귀족화시키기 위하여 군인·관료로 임명하고 군제(軍制)와 관료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따라서 15세기 말에 왕권은 강화되고 코르테스는 무력화하여 절대주의에의 길이 굳어졌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으로 에스파냐는 남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독점하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멕시코와 페루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으며, 원주민의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은이 대량으로 에스파냐로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업제품, 특히 모직물의 수출시장이 되었으므로 16세기 중엽에는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모직물공업이 번창하였다.
1516년 페르난도·이사벨 두 왕을 외조부모로 하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로스 1세(독일 황제로는 카를 5세)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통치하에서 에스파냐 본국,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령(領), 네덜란드, 이탈리아령이 통괄되어 ࡐ태양이 지지 않는ࡑ 에스파냐 제국이 출현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억압하였으며, 공동체적 권리 유지를 주장하고 왕권과 도시 상층부에 반대하는 시민반란을 21년 진압하여 절대주의를 완성시켰다.
그 후 56년부터 시작된 펠리페 2세 시대의 에스파냐는 ࡐ황금시대ࡑ를 맞이했으나 동시에 몰락의 원인을 잉태한 시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위세는 신대륙(서인도) 무역의 독점 위에 구축되었고 그 무역의 기초는 모직물에 있었는데, 국내 모직물 공업이 특권무역상(特權貿易商) 길드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산업으로서의 발전이 억제되었다. 따라서 근세 농촌의 자유생산체제에서 발전한 네덜란드·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에스파냐는 식민지의 은이 북류(北流)하는 단순한 경유지로 전락함에 따라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에스파냐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부(富)가 집중되어 있는 네덜란드를 통제와 징세(徵稅)로써 강화하였으나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독주에 도전하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하였다. 88년에는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펠리페가 파견한 ࡐ무적함대ࡑ가 영국 해군에 격파되어 에스파냐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상승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 후 30년전쟁(1618~48),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지배에 따른 에스파냐 계승전쟁(1701~14)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에스파냐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네덜란드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8세기 말에는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제(大帝)가 색슨과 프리지아를 정복하여 네덜란드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네덜란드는 홀란트가(家)를 비롯한 몇몇 봉건국가의 영유지가 되었으며,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리프 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필리프의 손녀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와 혼인관계를 맺어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합스부르크가가 인척관계에 있는 에스파냐 왕가도 계승하자 1515년부터는 에스파냐왕(王) 겸 독일 황제 칼 5세의 통치를 받았다. 네덜란드인은 종교개혁(1517)에 따라 신교를 믿었는데, 칼 5세와 그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를 마련하고 신교도를 탄압하였다.
이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국(低地國)은 66년 일제히 궐기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특히 저지국의 북부 제주(諸州), 즉 현재의 네덜란드는 오라녜공(公) 빌렘의 지휘로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고, 81년 북부 신교제주(新敎諸州)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도 완강하여 현재의 벨기에를 탈환하고, 이어 네덜란드까지 공략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618년부터 30년전쟁이 벌어졌으며, 48년 네덜란드의 완전독립이 승인되었다.
<헝가리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526년의 모하치 전투(戰鬪)에서 오스만투르크에 패한 후 약 2세기에 걸쳐 국토의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이에 따라 서부와 북부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만이 투르크의 보호 아래 반독립 공국(公國)이 되었다. 이 공국의 전성기는 베틀렌(재위 1613~29)의 시대로 수도 줄로페헤르바르(현 알바이울리아)는 30년전쟁 당시 프로테스탄트 문화의 중심지였다.
17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대신 헝가리 전역의 지배자가 된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인에 대하여 경제적·종교적 압박을 가한 결과 트란실바니아의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이끄는 대규모 민족반란(1703~11)을 초래하였다. 이 반란이 실패한 뒤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배체제는 일단 확립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1848~49년의 독립전쟁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L.코슈트를 지도자로 하는 헝가리측은 국민군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군에 항전하였으나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항복하였고 코슈트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독립전쟁 후 헝가리는 한때 오스트리아의 군정(軍政)에 시달렸으나 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화약(和約:아우구스라이히)이 성립됨으로써 이중제국(二重帝國)의 일원이 되어 정치적 안정을 획득하였다.
<체코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인(人)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인(人) 제왕의 통치가 계속되어 결국 체코의 전영토도 1918년까지 3백여 년 간 합스부르크가(家)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5~16년 민족지도자 마사리크(Masaryk)와 그 제자인 베네시(B뢮e?는 파리에서 ࡐ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ࡑ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였다.
<보헤미아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526년에 이르러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의 손에 넘어갔으며, 체코의 신교 귀족(파니)이 이에 대항하여 30년전쟁을 일으켰으나 신교 귀족의 패배로 합스부르크가의 지배가 강화되었다. 그후 1627년에는 독립왕국의 지위를 잃고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되었으며, 20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가 세습적으로 보헤미아왕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벨기에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가 1516년 에스파냐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곳은 자동적으로 에스파냐영토가 되었다. 카를 5세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의 치하에서 벨기에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플랑드르파(派)라고 불리는 위대한 화가들의 제작활동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55년 필립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극단적인 가톨릭 보호정책을 취하여 신교도가 많은 네덜란드는 폭동 끝에 81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교도가 많은 벨기에는 명목상 그대로 에스파냐 영토로서 머물렀으나 대폭적인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17세기의 벨기에는 영국·프랑스·에스파냐·오스트리아 등 각국의 투쟁무대가 되었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지배권을 이양하여 벨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1789년 프랑스의 혁명정부군이 두 번에 걸쳐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영토권을 확립하였다.
<슬로베니아지방의 합스부르크가역사>
14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부르크가(家)
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슬로베니아는 연합국에 가담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해져 종전의 국가 체제가 해체되자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형성되고 1918년 12월 베오그라드에서 왕국의 성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쇤부룬궁전>-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장
오스트리아의 빈시(市)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왕궁. 여름철 별궁(別宮)으로 피셔 폰 에르라흐(1656~1722)가 황제 요제프 1세(재위 1705~11)를 위하여 1696년경 설계한 것을 1700년경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시대에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대대적으로 개축(44~49)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거의 잃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되어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에 많이 세운 바로크양식의 대표적인 대궁전으로 방이 1,441개나 되며, 그 대부분은 로코코양식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나폴레옹 1세는 1805년과 09년에 이 궁전에 머물렀고, 나폴레옹과 합스부르크가의 마리 루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라히슈타트 공작(公爵)도 여기에서 죽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이 궁전에 많이 체류하였다. 넓은 프랑스식 정원과 대리석 열주랑(列柱廊)에서 바라보는 빈 시가지와 교외의 아름다운 전망이 이름났다.
<오이겐공>-(1663.10.18~1736.4.21)
오스트리아의 군인·정치가. 파리 출생. 백작 E.모리스와, 프랑스의 재상 J.마자랭의 질녀 만치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성직자로 예정되어 아베드 사보아라고 하였으나, 이를 루이 14세가 거절하자 1683년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그 해 빈까지 쳐들어온 터키군을 물리친 이래 동유럽 여러 곳을 비롯하여 북이탈리아·남프랑스·플랑드르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93년 원수가 되었다.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에서는 영국의 J.말버러공(公)과 제휴함과 동시에, 영국·네덜란드 해군의 강력한 힘을 빌어 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1706년 토리노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라쉬타트조약의 전권대사, 네덜란드총독을 지내면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폴란드의 계승전쟁에도 참전하였다. 한편 회화·도서의 수집가로서도 유명하였고, G.W.라이프니츠와 서신왕래도 있었다. 그는 카를 6세 치하에서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의 융성을 구축하여,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ࡐ사실상의 국왕ࡑ이라는 찬사를 받아 ࡐ프린츠 오이겐ࡑ으로 칭송되었다.
<푸거가>-합스부르크가의 자금줄
남(南)독일의 상업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점으로 하여 근대 초기에 번영하던 호상(豪商). 창업주 한스는 슈바벤의 그라벤 마을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모직물·바르켄트직(麻와 綿의 交織)의 거래로 재산을 모았으나, 나중에는 동양산품(東洋産品)의 거래, 금융업, 은·구리·수은 등의 광산업(광산은 領主에 대한 대여금의 담보물로서 보유)까지도 하였다.
그의 막내아들 야콥(1459~1525) 때가 번영의 절정기로서 거래 범위가 전유럽에 이르러,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를 비롯하여 교황·제후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특히 카를 5세가 푸거가에서 빌린 돈을 선거비용으로 써서 황제에 당선된 일, 마인츠의 대주교가 푸거가에서 빌린 차용금을 변제하기 위해 속죄부(贖罪符) 판매를 강행하여 루터의 비난을 초래한 일 등은 유명하다. 한편, 야콥이 구빈시설(救貧施設)인 푸게라이(일종의 아파트)를 건설한 일도 유명한데, 푸게라이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지금도 남아 있다.
푸거가는 전성시대에 전유럽에 지점망(支店網)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조직을 통하여 수집한 정치·경제 정보(1568~1608)는 ࡐ푸거시보(時報)ࡑ라고 불려, 근대 초기의 좋은 사료(史料)로서 빈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푸거가는 16세기 말 이후 쇠퇴하였다.
◈합스부르크가출신 신성로마제국황제
①루돌프1세,②알브레히트1세,③프리드히리1세,④알브레히트2세,⑤프리드히리3세,
⑥막시밀리안1세,⑦카를5세,⑧페르디난트1세,⑨막시밀리안2세,⑩루돌프2세,⑪마티아스,
⑫페르디난트2세,⑬페르디난트3세,⑭레오폴트1세,⑮요제프1세,카를6세,프란츠1세,
요제프2세,레오폴트2세,프란츠2세
◈합스부르크가출신 왕,왕비(또는황제)
♣스페인왕:①펠리페1세(후아나 라 로카와 결혼)
,②카를로스1세,③펠리페2세,④펠리페3세,
⑤펠리페4세,⑥카를로스2세
♣오스트리아황제:①프란츠1세②페르디난트1세③프란츠요제프1세④카를1세
♣대공과 황제:페르디난트3세(토스카나 대공),막시밀리안(멕시코황제)
♣유명한 왕비들:후아나 라 로카-아라곤왕 페르디난트2세,카스티아여왕 이사벨1세의 여자식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1세와 결혼함
안나:헝가리,보헤미아왕녀.라요슈2세의 여동생
안:루이13세비.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계 왕녀
마리아테레지나:합스부르크가의 여황제.마리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앙투아네트:루이16세비.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계의 왕녀
마리루이즈:나폴레옹1세비.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계의 왕녀
◈합스부르크가출신
루돌프2세, 알브레히트4세, 루돌프3세, 루돌프3세, 알브레히트2세, 루돌프4세, 알브레히트3세, 레오폴트3세, 에른스트, 알브레히트4세, 라디스라우스 포스트무스, 카를, 마르가레테 테레사, 페르디난트, 프란츠 카를, 카를 루드비히,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토
합스부르크家 Habsburger
오스트리아 구황실(舊皇室) 일가로서 중세 이래 유럽 제일의 명문가. 10세기 무렵 알자스에서 스위스 북부에 걸친 소영주에서 비롯, 11세기 스위스에 산성 합스부르크(매의 성)를 쌓은 데서 가명(家名)
이 유래한다.
〔세계제국의 실현〕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에 의해 1273년 루돌프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교묘한 정책결혼으로 오스트리아공령(公領)을 가령(家領)으로 몰수하는 등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스위스독립전쟁에서는 패하였으나 동쪽으로는 가령을 더욱 넓혔고 루돌프 4세 때는 대특허장을 위조하여 대공(大公)
이라 칭하였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된 뒤 합스부르크가는 사실상 황제 지위를 독점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혼인정책으로 에스파냐·부르군트를 합병하였고 손자 카를 5세 치하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을 이룩하였다. 1522년 카를 5세는 상속에 관한 브뤼셀협약에 의하여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의 가령과 황제위 계승권을 양도하고 26년 보헤미아·헝가리를 합병하였으나 독일의 종교개혁 및 분쟁으로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맺고 56년 스스로 퇴위하였다.
〔에스파냐계·오스트리아계〕
카를 5세의 장자 펠리페 2세가 반(反)종교개혁을 추진하여 에스파냐왕국은 전성기를 맞았으나 프랑스·영국에 이어 네덜란드와의 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분쟁과 상속다툼으로 페르디난트 2세 때는 30년전쟁으로 발전하여 국토가 황폐하여졌으나, 가령에서는 레오폴트 1세가 전(全)
헝가리를 확보하여 빈은 다뉴브제국의 중심이 되어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에스파냐계는 카를로스 2세에서 단절되고 에스파냐계승전쟁 후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에 따라 왕위는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계몽주의시대〕
오스트리아계의 카를 6세는 1713년 국사조서(國事詔書)를 발표하여 전가령 비(非)분할과 일괄상속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7년전쟁으로 슐레지엔을 잃었다. 한편 바이에른에서는 황제 카를 7세를 선출하였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45년 드레스덴화약이 성립되어 제위를 되찾고 남편 프란츠 1세와 장자 요제프 2세의 공동치하에서 계몽적인 국내개혁을 추진하였다. 요제프 2세는 관용령(寬容令)
·농노해방령 등으로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뒤의 국제적 반동화 속에서 계몽군주 레오폴트 2세는 국내의 반동화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오스트리아제국〕
나폴레옹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고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가 1804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자칭하고 K.W.F.메테르니히 체제의 정점에 섰다. 48년 3월혁명에 직면하여 같은 해 12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여 반혁명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부르주아지의 대두, 여러 민족의 내셔널리즘 고양으로 반동적 중앙집권화와 계몽주의적 여러 민족의 연방화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는 59년 이탈리아전쟁, 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패하고 67년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성립시켰으나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불만이 높아져 79년 독일―오스트리아동맹을 체결하였다. 1914년 일어난 황사(皇嗣) 프란츠 페르디난트부부 암살사건(사라예보사건)
은 제 1 차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합스부르크왕가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때 제 1 차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제국이 붕괴되고 합스부르크왕가는 막을 내렸다.
금인칙서 金印勅書 Goldene Bulle
신성로마황제 카를 4세가 1356년 1월 10일 독일국왕(신성로마제국황제)의 선거제와 선제후(選帝侯) 특권을 주내용으로 하여 뉘른베르크제국회의에서 발포한 제국법. 금인헌장이라고도 한다. 같은 해 12월 25일 메츠제국회의에서 보족(補足)되었다. 칙서에 사용된 옥새(玉璽)가 황금이었기 때문에 금인칙서(황금문서)라 불린다. 31장(章)으로 구성되며 신법(新法)이 아니라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198년 이래 특히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이후 빈번하게 왕조가 교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제후는 독점적 국왕선거권을 획득했다. 이 관습이 선제후에 의한 국왕선거법으로서 법제화된 것이 금인칙서이다. 선제후는 3명의 성직제후(마인츠·쾰른·트리어의 대주교)와 4명의 세속제후(보헤미아왕·팔츠백·작센공·브란덴부르크변경백) 등의 7명으로 한정되며 프랑크푸르트에서 행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제후법(1220·1231)이 제후의 영방국가(領邦國家) 형성을 용인한 이후의 국제(國制) 추이과정에서 제후들은 국왕으로부터 독립된 여러 권리를 얻었으며 선제후는 금인칙서에 의해 무제한재판고권(無制限裁判高權)·지고권(至高權)을 획득하고 광업권·채염권(採鹽權)·관세징수권·화폐주조권 등의 여러 특권을 얻었다. 그 반면 영방국가 형성을 적대하는 동향은 탄압을 받아, 시외시민 채용(도시가 세력범위를 주변 농촌으로 확대하여 예속농민을 이 명칭으로 수용하는 것)과 영방군주에 대항하는 도시 안팎의 단체 및 동맹은 엄금되었다. 이는 카를 4세가 속한 룩셈부르크가(家) 자체가 세습왕국 보헤미아를 영국(領國)으로 하는 최강의 선제후이자 다른 영방군주와 이해를 같이 했던 탓에 도시와 시민층의 대두를 억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인칙서는 국왕선거에 대한 교황의 인가권(認可權) 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국왕에게는 선거후 최초의 통치행위로서 선제후의 특권 인증이 요구될 뿐이었으며, 교황의 승인은 국왕이 행사하는 지배권의 전제가 아닌 선거의 추인(追認)에 불과했다. 13세기 이래 교황이 요구한 국왕 공위시의 제국대리직(帝國代理職)이 독일에서는 거부되었고, 프랑크법(法) 지역에서는 라인궁중백(宮中伯)이, 작센법 지역에서는 작센대공이 왕위공위시의 제국대리직에 임명되었다. 인가권과 대리직요구를 둘러싼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대립은 특히 루트비히 4세 시대에 심해졌는데, 칙서에는 1338년의 <선제후판고(選帝侯判告)>와 프랑크푸르트제국회의에서의 제국법에 담겨진 기본원칙(국왕선거의 완결성과 국왕선거는 곧 황제선거라는 점)이 관철되었다. <황제에 취임한 로마인의 왕>의 칭호에서 볼 수 있는, 선출된 독일국왕(신성로마황제)의 독일 이외의 제국 영역에 대한 지배권 요구는 칙서에 의해 제국법으로서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왕선거의 법제화에 따라 다수표(4표)
를 얻을 수 있는 세력의 왕위획득이 가능해졌다. 한편 동일 가문에 의한 왕위계승이 가능해져 룩셈부르크가에 이어 1438년 이후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계승했다. 결국 금인칙서는 13세기 이래의 기득권리 및 관습법의 성문화였으며, 영방국가와 가문왕권을 공인하는 것이었다.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
독일 역사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 몰락 때부터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 1세가 즉위할 때까지 명목상의 국왕만 있을 뿐 실질적인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1256~73). 1254년 국왕 콘라트 4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고, 그가 생존하고 있을 당시부터 대립국왕(對立國王)으로 선출되었던 빌헬름 폰 홀란트도 56년에 죽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영국·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독일의 왕위를 획득하려고 독일 국내의 성속제후(聖俗諸侯)에게 공작하였다. 그 결과 57년 쾰른·마인츠 두 대주교와 라인궁정(宮廷)백작·베멘왕(王)이 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 콘월백작 리처드를, 한편 트릴대주교·작센대공·브란덴부르크변방백작·베멘왕(2중투표)
은 카스티야왕 알폰소 10세를 각각 독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영국왕과 프랑스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으며 거의 독일에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72년 리처드의 죽음과 함께 이와같은 변칙상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2중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후보자 선정을 라인궁정백작에게 일임하였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국왕에 선출됨으로써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빈미술사박물관 -美術史博物館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대박물관. 합스부르크가(家)의 640년에 걸친 역대 군주의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시 중심에 있는 마리아테레지아광장의 자연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으며, 왕가의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는 데 어울리게 안팎으로 호화로운 의장을 갖추고 있다. 설계는 C.하제나우어와 G.젬퍼가 맡았으며, 건설에 20년이 걸렸고 1891년에 개관되었다. 분산되어 있던 수집품의 일부는 이미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었으나, 개관을 계기로 통합되었다.
미술사라는 명칭이 나타내듯이, 소장품은 회화를 비롯하여 이집트·그리스·로마 등의 고대미술, 중세이후의 조각·공예·악기·화폐·보물·무기·차량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르네상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회화에는 루돌프2세와 L.빌헬름 대공의 수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가 네덜란드와 에스파냐를 지배했던 사실 등을 반영하는데, 유럽 각 지역 거장들의 작품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명품은 물론이고, A.뒤러·L.크라나흐 등 북유럽 르네상스 작품도 많으며 특히 P. 브뢰겔(父)
의 작품 15점을 소장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 神聖-帝國 Heiliges Romisches Reich
962년 오토 1세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에서 시작되어 1806년까지 계속된 독일국가의 명칭.
〔명칭〕 신성로마제국의 정식명칭은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이 제국이 처음부터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다. 제국의 선구형태인 카롤링거제국은 물론, 오토 1세시대에도 특별한 명칭은 없고, 간단히 <제국(Imperium)>이라고 불렸다. <로마>라는 형용사가 추가된 것은 오토 2세(재위 967~983) 시대부터인데, 특히 로마제국의 부흥을 정치목적으로 내세운 오토 3세(재위 996~1002) 시대에 일반화되었다.
또한 <신성>이라는 형용사가 추가된 것은 슈타우펜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시대이다. 원래 신성로마제국은, 황제권과 교황권의 두 기둥으로 받쳐져 있던 일종의 신성정체(神聖政體)였지만,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투쟁 결과, 교황권?성권(聖權)과 황제권?속권(俗權)의 분리·대립이 표면화되어 황제권의 세속화가 뚜렷해져, 사태는 성·속 양권의 분화라고 하는 단순한 형태를 취하지 않고, 황제권·교황권 모두 성·속양면을 가진다는 주장을 고집하였다.
황제측은 <황제는 교황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접 신(神)의 은총과 제후의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했고, <거룩한 교회(Sancta Ecclesia)>에 <신성한 제국(Sacrum Imperium)>을 대치시켰다. 그 결과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의 황제 빌헬름 폰 홀란트(재위 1247~56) 시대에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출현하였다.
중세 말 황제는 이탈리아지배를 유지해 나갈 힘을 잃고 국왕으로 선출된 뒤, 로마원정을 단행하여 교황을 통해 황제로서 대관하는 관행도 1452년의 프리드리히 3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판도는 독일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해서 15세기 말부터 <독일민족의>라는 한정사(限定詞)
가 붙게 되었다.
〔제국의 변천〕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적 선례는 800년의 카롤루스대제의 대관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카롤링거제국인데, 이 제국 또한 476년에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간주되는 것이었다. 루트비히(루이) 1세(경건왕)가 죽은 뒤, 카롤링거제국은 3분되어 중부프랑크와 황제는 장남 로타르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각각 루트비히와 카롤루스가 계승했으며, 동프랑크는 독일왕국으로, 서프랑크는 프랑스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중부프랑크는 로타르가 죽은 뒤 다시 로트링겐·부르군트·이탈리아로 분할되어 카롤링거가의 왕통도 단절되었다. 로트링겐은 메르센조약(870)·리베몬조약(880)에 따라 동·서프랑크로 분할되었으나 부르군트·이탈리아에서는 현지의 대호족(大豪族)들이 각기 왕을 자칭해서 대립·항쟁을 계속하였다.
작센왕조 제2대 국왕 오토 1세는 이 부르군트와 이탈리아를 정복·합병하고, 이 지역에 남아있던 황제권의 전통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신성로마황제가 되었는데, 마치 카롤루스대제가 로마교황 레오 3세의 손을 통해 대관된 것처럼, 2차례에 걸친 이탈리아원정을 단행하고, 962년 교황 요한 12세의 손을 통해 황제로서 대관되었다. 그 뒤 역대 독일국왕은 즉위 후, 로마원정을 수행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서 가관(加冠)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황제의 독자적인 권한이란 것은 거의 없고 맹목적인 칭호에 불과하지만, 교황권의 보호자라고 하는 기능을 통해 이념적으로는 유럽의 그리스도교세계에서 일종의 우월성을 갖고 있었다.
이 우월성은 작센·잘리어·슈타우펜의 3왕조를 통하여 약간의 변동은 있었어도 계속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울러 후에 나타난 교권과 속권의 대립의 계기도 포함하고 있었다. 작센왕조시대의 독일왕국은 슈바벤·작센·바이에른·프랑켄 등 몇 개의 부족대공령(部族大公領)의 합성체였는데, 부족대공의 권력이 강해지고 현지 부족민과의 결합이 공고해지자 끊임없이 왕권을 분열로 유도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오토 1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가통일의 지주를 국내의 교회세력과의 결부에서 찾는 이른바 <제국교회정책>을 채택하였다.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 등 고급성직자에게 소령(所領)을 기증 또는 봉토(封土)로서 주고, 여러 가지 특권과 보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들을 국내통치상의 중요한 지위에 두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작센왕조의 여러 황제 및 초기 잘리어왕조의 황제가 계승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하인리히 3세는 당시 활발했던 교회개혁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교황청의 개혁을 도와서 교황권 권위확립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융성기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교회개혁과 교황권의 강화는 제국교회정책에 있어 이른바 양날의 검이었다. 이 정책은 황제의 성직자에 대한 서임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고위성직자는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으로 서임됨과 동시에 황제의 봉신(封臣)이 되고 봉신으로서의 봉사의무가 지워졌는데, 이것이 교희개혁의 공격목표였던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속권에 의한 성직자서임 그 자체까지 부정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황의 지상권 확립을 의도한 교황 그레고리오7세와, 교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밀라노주교의 서임을 강행한 하인리히 4세의 다툼은 황제의 왕권강화정책과 그에 반발하는 국내 제후와의 대립이라고 하는 독일 국내의 정치상황과 결부되어서 전국적 내란, 이른바 성직서임권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내란은 보름스협약(1122)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그동안에 독일의 봉건화는 급속히 진전되어 성·속의 제후들은 각기 영방(領邦)의 수립과, 영방지배권 확립의 길로 나섰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슈타우펜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는 남서독일을 중심으로 황제자신도 자기의 영국(領國) 형성에 노력하여(帝國領國政策), 황제임과 동시에 한 지역의 영방군주이기도 한 성격을 띠게 되어서, 중세 후기 황제의 자리가 선거에 의하여 전전하는 이른바 <도약선거(跳躍選擧)> 시대에는 제국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1세는 숙적(宿敵)인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작센공:재위 1139~80, 바이에른공:재위 1156~80)을 실각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으나, 제후들의 강력한 요구로 수봉강제(授封强制)의 원칙(몰수한 봉토는 1년 이내에 재수봉해야 한다)을 승인하여 신성로마제국은 결정적으로 봉건국가로 바뀌었다.
손자 프리드리히 2세도 2차례에 걸쳐서 국내 제후들에게 대폭 양보하여 제방(諸邦) 지배권 확립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슈타우펜왕조의 단절, 대공위시대를 거쳐서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 1세(재위 1273~91)가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그 뒤 제국에서는 선거왕제의 원리가 지배적이 되어서 제위(帝位)는 선제제후(選帝諸侯)의 이해에 따라서 합스부르크가·룩셈부르크가·비텔스바흐가(바이에른가) 사이를 전전했고(도약선거시대), 황제는 제국 전체의 이해보다도 한 지역의 영방군주로서 자기 가문의 이해를 중시하게 되어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하였다.
중세 말, 제위는 합스부르크가에 고정되어 제국의 멸망까지 이어졌지만, 30년전쟁(1618~48)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영방군주에게는 거의 독립국가의 국가주권에 가까운 자립성이 승인된 결과, 제국의 영방국가로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근세의 황제권은 완전히 명목뿐인 것으로 변하여 합스부르크가는 가령(家領)인 오스트리아와 남서독일의 일부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데 지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1세의 보호 아래 결성된 라인동맹에 가입한 남독일의 16영방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게 되자,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관(帝冠)을 사퇴함으로써 제국은 약 84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국의 기구〕 제국의 영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지만, 중핵을 형성한 것은 독일·부르군트·이탈리아(중부 이북)이다. 덴마크·폴란드·보헤미아·모라비아, 그리고 한때는 헝가리에도 어느정도의 주권을 행사했고, 슈타우펜왕조시대에는 시칠리아섬도 제국에 포함되었다. 황제는 독일국왕이 겸했기 때문에, 국왕선출의 원칙이 동시에 황제선출의 원칙이기도 했다.
국왕은 즉위 후 로마원정을 하고,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1338년의 렌제선제후회의(選帝侯會議)와 프랑크푸르트제국의회의 결정에 따라 선제후회의에서 선출된 독일국왕은 교황의 가관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신성로마황제이기도 하다는 원칙이 확립되어, 로마원정의 관행 자체도 중세 말의 막시밀리안 1세 이후는 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왕제는 선거왕제와 세습왕제의 원리가 결합된 것으로서 왕조가 안정되어 있는 한 형식적으로 선거가 치러져도 실질상으로는 세습제의 원리가 지배적이었으나, 왕조가 단절되면서 선거제 원리가 대두되었다. 선거는 만장일치가 원칙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선거인의 의견조정에 성공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선거회의를 개최해서 대립황제를 선출하는 사태가 이따금 발생하였다.
이 결함을 시정하기 위하여 카롤루스 4세는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를 공포하여 다수결원리 도입을 시도함과 동시에 선제후의 수를 7명으로 한정시키고 선거절차도 확정하였다. 7명의 선제후는 마인츠·트리어·쾰른의 대주교, 라인궁정백작·베멘왕(王)·작센대공(大公)·브란덴부르크변경백작 등인데, 17세기 이후에는 그 수가 증감하였다. 중세의 독일국가는 기본적으로 봉건국가이고 황제의 전국통치는 황제와 봉신 사이의 봉건적 주종관계를 개재시켜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국직할령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지방행정조직이 없었다. 중앙의 행정기구도 그 주요 부분은 문서행정이었기 때문에 관리로 성직자가 임명되는 제국서기국(Reichskanzlei)이 주체였다.
그 최고관직은 제국서기관장(Reichserzkanzen)이며 마인츠대주교가 임명되었다. 그 직권은 독일에 한정되고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 관해서는 별개의 서기관장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는 쾰른대주교, 부르군트에는 트리어대주교가 임명되었다. 중앙행정기구에는, 그 밖에 소송처리를 담당하는 궁정법원(Hofgericht)·궁정고문회의(Hofrat) 및 그것이 발전한 제국의회(Reichstag)가 있었다. 황제의 봉신에는 대후(大侯)·변경백작·백작 등의 칭호를 가진 세속제후와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 등의 고위성직자 및 칭호가 없는 남작(Freiherr)이 있었다.
슈타우펜왕조시대의 제국제후 신분 성립과 연방지배권 강화 결과 백작과 남작의 대부분은 점차 황제의 배신(陪臣)이 되었다. 제국직속령에는 황제의 대관(代官)으로서 제국대관(Reichsvogt)이 배치되었고, 제국도시가 성립됨에 따라서 제국대관은 지방대관(Landvogt)과 도시대관(Stadtvogt)으로 나뉘었다. 중세 말기부터 제국도시의 대표자도 제국의회에 출석하는 관행이 성립되어, 베스트팔렌조약(1648)에 따라 제국도시의 제국의회 출석자격이 확인되었다.
(1218.5.1~1291.7.15)
루돌프1세
합스부르크가(家) 최초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273~91). 처음에 스위스의 소영주 중 한 사람이었으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의 국내 혼란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길러, 뵈멘왕(王) 오토카르 2세와의 독일 왕위 다툼에서 승리, 국왕으로 선출되어 대공위시대를 끝맺었다. 선제후들은 동방의 강자 오토카르의 실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힘이 약해 보이는 그를 선출해 독일왕권의 무력화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루돌프는 사실상 실력자로, 그의 왕위를 부인하는 오토카르를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격파하여(1278)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 및 케른텐을 영유하고, 뵈멘령(領)은 오토카르의 아들 벤첼 2세에게 상속시키고 자기 딸을 주었다.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본령(本領)으로 삼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루돌프는 독일왕권의 전통정책이었던 이탈리아 정책을 버리고 합스부르크가령(領)의 확대정책에 정력을 쏟아, 독일에 새로운 시대를 초래하였다.
(1552.7.18~1612.1.20)
루돌프2세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576~1612). 종교개혁 시대에 즈음하여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신교 관용책을 바꾸어 구교 장려책을 썼기 때문에 헝가리와 기타 영토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대공(大公)들로부터는 통치능력이 없다고 선언되어, 아우 마티아스가 통치를 대행하였고, 이에 오스트리아 등 기타 영토를 물려주었다. 정무(政務)를 싫어하여 케플러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물리·화학·천문학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1255?~1308.5.1)
알브레히트1세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독일왕(재위 1298~1308),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루돌프 1세의 장남. 1282년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대공이 되었다. 91년 부왕이 죽은 뒤 A.von 나사우와 왕위를 다투다가 패하였으나, 98년 나사우를 물리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유능한 국왕으로서, 내정에서는 제국의 평화를 확립하여 영토 회복에 힘썼다. 또 외정에서는 나사우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왕 필리프 4세에 접근하여 뫼즈강(江) 좌안의 제국권리를 포기하였다.
라인 선제후(選帝侯)와 그의 왕위를 인가하지 않은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필리프 4세가 영국과의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곧 교황과 화해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왕과 교황과의 싸움을 이용하여 교황의 왕위인가 및 왕위세습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교황이 갑자기 죽었으므로 왕위세습제와 선거제의 폐지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보헤미아왕 벤첼 2세 및 3세가 잇달아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왕위를 그의 장남 루돌프가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마이센·튀링겐도 그의 손에 들어와, 남동·남서 독일로부터 중부 독일에 걸쳐서 그의 권력이 확대되었다. 1307년 베팅가(家)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장남 루돌프가 죽었으므로 그의 권력도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이듬해 5월 1일 슈바벤의 반란 진압 도중에 조카인 S.요한에게 암살되었다. 따라서 그의 합스부르크가 세습세력에 의한 영역지배권의 확립 및 그것에 의한 독일왕권의 회복과 통일국가 건설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97.8.16~1439.10.27)
알브레히트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 1438~39). 합스부르크가(家) 출신. 오스트리아공(公:1404 이후)으로서는 알브레히트 5세이다. 룩셈부르크가 출신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죽은 뒤에 선출되었으며, 지기스문트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보헤미아·헝가리 두 나라의 왕위도 계승하여 동방 정책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439년 헝가리에 침입한 투르크인(人)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때까지 황제는 선거로 선출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부터 1806년까지 합스부르크가가 세습하여 독점하였다.
(1640.6.9~1705.5.5)
레오폴트1세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658~1705). 어렸을 때부터 언어학·역사·자연과학·음악 등 여러 방면에 취미가 있었다. 1654년 형의 죽음으로 합스부르크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55년에 헝가리왕, 56년에 보헤미아왕, 58년에 부왕 페르디난드 3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 황제가 되었다. 음악애호가로서 음악황제라는 말을 들었고, 신앙심이 깊고 교양도 높아 평화를 사랑했으나,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발흥기였으므로 결국 전쟁에 말려들어 형가리 귀족의 반란을 돕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카를로비츠 화약(1699)에서 터키의 헝가리 지배 영토를 회복하였다.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략 때에는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프랑스와 싸웠고, 스페인 계승전쟁에서는 프랑스를 반대하는 동맹을 결성하여 싸웠으나, 종전이 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치세하에서 오스트리아는 지도적인 기반을 쌓았고 빈은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717.5.13~1780.11.29)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여제(女帝:재위 1740~80). 카를 6세의 장녀이며, 토스카나 대공(大公)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였는데(1736), 부제(父帝)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하였다.
그러나 부제의 생존 당시의 상속법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이 이미 각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각국이 그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40~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넘겨주었으나, 숙적(宿敵)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손을 잡아 교묘하게 일을 처리하여, 아헨 화약(48)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중에 남편을 황제(프란츠 1세)로 세워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없어 그녀가 모든 국정(國政)을 담당하였다. 그 후 재정(財政)의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여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56~63)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하였다.
남편의 사망(65) 후로는 아들 요제프 2세와의 공동통치로 바꾸었다. 내정(內政) 개혁에는 급진주의적인 요제프 2세를 견제하면서 부역(賦役)의 경감, 수도원영지(修道院領地)의 몰수, 교육제도의 개혁 등에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딸의 제위(帝位)상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어 얌전한 여성으로 자라게 했으나, 마리아는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자녀를 16명이나 두었으며,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었다.
(1557.2.24~1619.3.20)
마시아스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612~19). 처음에 남(南)네덜란드 총독(1577), 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메렌(1608)·베멘(11)의 통치자가 되었다. 형 루돌프 2세가 죽자 황제가 되었다. 신구 양교의 대립, 터키군(軍)의 위협이 가중되는 정치적 위기의 시대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신교 관용정책, 형의 구교 권장정책을 이어받아 신구 양교간의 조정에 고심하였으나 성과가 없었으며, 30년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터키와의 굴욕적 강화를 맺었으며, 후사가 없어 제위계승의 분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사촌 동생인 페르디난트 2세가 계승하였다.
(1459.3.22~1519.1.12)
막시밀리안1세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재위 1493~1519) 겸 독일 왕(재위 1486~1519). 결혼을 통한 영지(領地) 확대정책을 추진하여 합스부르크가(家)를 크게 중흥시켰다. 1477년 부르고뉴공(公) 샤를 용담왕(勇膽王)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여 네덜란드(홀란드·벨기에)를 획득하였으며, 1504년 아들 필리프를 에스파냐 왕의 요하나 공주와 결혼시켜 에스파냐를 영토화하고, 또 베멘·헝가리 왕과의 혼인을 통하여 이 두 나라를 가령(家領)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위스 서약동맹(誓約同盟)과 싸움으로써 이를 독립시켰으며, 이탈리아 지배를 두고 프랑스 왕과 장기간 다툰 끝에 국력을 크게 소모했다. 독일의 국내개혁에서는 영구(永久) 란트 평화령(平和令)을 발포하고(1495) 제국 궁정재판소를 설치하였으나(97),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생활에서는 시문(詩文)을 좋아하는 풍류인이었으며, 인문주의의 학자·문인을 보호·장려하고 기사도정신에 넘쳐, 독일 최후의 기사라 불렸다.
(1678.7.26~1711.4.17)
요제프1세
신성 로마 황제(재위 1705~11). 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맏아들이다. 1687년 헝가리 국왕이 되고, 90년에 로마왕(신성 로마 황제) 계승자가 되었다. 1703년 동생 카를(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을 위하여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1705년 부왕(父王)의 죽음으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시는 에스파냐계승전쟁(1701~14)이 진행 중이라 합스부르크가는 카를을 에스파냐 왕위계승자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요제프 1세가 종전이 되기 전에 병사하였으므로, 동생 카를이 신성 로마 황제위를 계승하고, 또한 에스파냐왕으로도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합스부르크대제국(大帝國)의 재현(再現)을 두려워한 열강(列强)의 반대로 에스파냐왕 즉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아버지나 동생 카를과 같이 음악애호가여서 빈의 궁정음악을 보호하는 한편, 당시 유럽 최대의 오페라 극장을 빈에 건축하고 자신이 작곡에도 종사한 ࡐ작곡 황제ࡑ였다. 빈을 파리에 못지 않은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건축가들을 중용(重用)하여 로코코식 궁전을 조영(造營)
하였다.
(1887.8.17~1922.4.1)
카를1세
오스트리아 최후의 황제(재위 1916~18). 헝가리왕으로는 카롤리 4세. 오스트리아 페르젠보이크 섬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측과 화평교섭을 벌이고, 다음해인 1918년 <국가위기의 절박(切迫)>이라는 주제의 선언을 발표하여 연방제를 발포하고 통치권을 포기하였으나, 19년 4월 오스트리아 의회는 그를 퇴위시켰다.
21년 스위스로 도망가 헝가리 왕위의 복위운동을 시도하는 한편, 제위부활운동을 위하여 빈에도 갔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연합국측에 의하여 모로코 앞바다의 마데이라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00.2.24~1558.9.21)
카를5세
합스부르크가(家)의 독일(신성로마)·오스트리아황제(재위 1519~56). 에스파냐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재위 1516~56). 헨트 출생.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1세와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의 상속녀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부친 쪽에서 네덜란드, 외가에서 에스파냐·나폴리 및 신대륙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상속받았다.
1519년에 막시밀리안이 죽자, 경쟁자인 프랑수아 1세를 누르고 신성로마 황제에 선정되었는데, 그때 푸가가(家)가 재정을 원조하였다. 당시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휩싸여 있었는데, 카를은 21년 보름스에 소집한 국회에서 M.루터에게 자기 주장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실패로 그쳤다. 그 후 작센 선제후들의 비호 아래 루터주의 세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억제하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카를은 그의 세력을 적대시하는 프랑스와 만성적인 전쟁에 돌입해 있었고, 더욱이 동방에서 이에 호응하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공격을 계속하였으므로 독일 제후(諸侯)의 지지를 구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싼 프랑수아 1세와의 전쟁에서, 25년 그는 파비아에서 프랑스군에게 대승, 왕을 포로로 잡았으나, 이 때문에 교황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황제군이 27년에 로마를 공략한 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파국을 가져와 반종교개혁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독일의 종교문제를 해결하려 한 카를의 의도마저 배반당했고, 한편 프로테스탄트의 제후들은 슈말칼텐 동맹을 체결하여 무력투쟁에 대비하였다. 이윽고 프랑스와의 싸움이 44년 크레피조약에서 일단 종결되었고, 오스만 투르크제국과도 휴전이 성립하여, 간신히 분쟁에서 벗어나 슈말칼텐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카를의 전제적 태도는 가톨릭 제후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52년에 프로테스탄트 제후가 프랑스왕 앙리 2세의 지원을 얻어 재차 봉기하자 그는 고립에 빠져, 55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성립한 종교화의(宗敎和議)에서 제국 내에서 루터주의의 정치적 권리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실의에 빠진 카를은 이듬해 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에스파냐 왕위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이양하고, 자신은 에스파냐의 한 수도원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중세적인 황제 이념의 마지막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1685.10.1~1740.10.20)
카를6세
합스부르크가(家)의 독일(신성 로마)·오스트리아 황제(재위 1711~40).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빈 출생. 에스파냐 계승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부르봉왕조와 싸웠으나, 결국 벨기에와 북이탈리아의 에스파냐 영토를 확보하는 데 그쳤고, 오스만 투르크제국과의 싸움에서 한때 동방에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1716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후에 국본조칙(國本詔勅)에 입각하여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열강(列强)이 인정하도록 힘써 성공하였으나, 훗날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나는 불씨를 만들었다.
(1661.11.6~1700.11.1)
카를로스2세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家) 최후의 왕(재위 1665~1700). 펠리페 4세의 아들. 마드리드 출생. 광인왕 카를로스라고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불구였으나 4세 때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모후 마리아 데 아우스트리아가 10년간 섭정하였다. 이 기간 중 네덜란드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궁정 내의 음모로 고통을 받는 등 국내외적으로 다난하였다.
1675년 비로소 카를로스의 친정이 시작되고 이복형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를 중용하였다. 친정시대(親政時代)에도 루이 14세의 침략정책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97년 라이스바이크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2번이나 결혼하였으나 후사가 없어, 프랑스 부르봉가의 후계자(펠리페 5세)를 지명하였는데, 이 때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에스파냐계승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503.3.10~1564.7.25)
페르디난트1세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556~64). 1521년 오스트리아 대공(大公)이 되었고, 26년 베멘(보헤미아)·헝가리 왕이 되었다. 31년 독일의 왕이 되었다가 56년 형 카를 5세가 은퇴하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이 때부터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계(系)와 에스파냐계로 갈라졌는데, 그는 오스트리아계의 초대(初代)가 되었다.
황제의 과제 중 한 가지는 터키군 침공에 대한 방위로서, 오스트리아 대공 시대에 터키군에 의한 빈 포위(1529)를 당하였는데, 이를 무난히 격퇴하고 터키 점령지 영유(領有)를 인정하는 화친을 맺었다. 또 한 가지의 과제는 악화된 종교개혁 분쟁을 처리하는 일로 개인적으로는 구교 지지에 기울면서, 형인 카를 5세와는 달리 주민의 신앙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태도로 아우크스부르크화의로 종교개혁 분쟁을 해결하였다.
(1578.7.9~1637.2.15)
페르디난트2세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619~37). 1617년 베멘(보헤미아)왕, 18년 헝가리왕, 그리고 19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가톨릭주의자로서 베멘왕의 자리에 오르자 신교도 탄압정책을 강행하고, 선선제(先先帝)인 루돌프 2세가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였다. 그 때문에 신교파 베멘 귀족이 황제의 대관(代官)을 프라하성(城) 창문에서 떨어뜨린 사건(1618)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30년전쟁이 일어났다. 황제는 구교도연맹의 바이에른공(公)과 동맹하여 신교도가 베멘 왕으로 추대한 프파르츠 백작을 격파하고, 그 후 베멘의 신교도를 탄압하였으며 프라하대학의 예수회 교단(敎團)
에의 이관을 단행하였다.
(1608.7.13~1657.4.2)
페르디난트3세
합스부르크가(家)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637~57)
. 1625년 헝가리왕, 27년 베멘왕, 36년 독일왕, 37년에는 황제에 올랐다. 30년전쟁 중의 황제로서 발렌슈타인 처형 후 독일군을 지휘하여 에스파냐 침입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평화회복에 노력하여 베스트팔렌조약을 성립시켰다. 음악의 보호와 장려에 힘을 기울여 음악황제라는 별칭이 있다.
(1830.8.18~1916.11.21)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의 황제(재위 1848~1916). 1848년 3월혁명의 와중(渦中)에서 즉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죽을 때까지 다난한 시대를 반세기 이상 통치하고, 신비적으로 장수(長壽)한 백발의 노황제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49년 헝가리의 반란을 러시아의 원조로 진압한 것, 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패배하여, 다음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帝國)을 세운 것 등이 중요하다. 그 이후 내정적(內政的)으로는 입헌적(立憲的) 정치를 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독일과 협조하여 평화를 지키며 오스트리아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발칸문제로 러시아와 대립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황후 엘리자베트는 암살당하고, 황자(皇子) 루돌프는 변사(變死)
했으며, 황태자가 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등,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겹쳤다.
(1863.12.18~1914.6.28)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의 대공(大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로 종형(從兄)인 루돌프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황제계승자가 되었다. 육군의 개편, 독일·러시아와의 협조에 노력하였다. 또한 국내 슬라브인의 지위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남슬라브계(系) 여러 민족을 참여시킨 3중왕국(三重王國)을 기도하였으나 헝가리인·세르비아인의 반감을 사게 되어, 14년 6월 오스트리아가 병합(1908)한 보스니아의 주도(主都) 사라예보에 여행했을 때 비(妃)
조피와 함께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라예보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527.5.21~1598.9.13)
펠리페2세
에스파냐 최성기의 왕(재위 1556~98). 바야돌리드 출생. 포르투갈 왕(재위 1580~98)으로서는 펠리페 1세.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의 황태자로서, 1554년 영국 여왕 메리 1세와 정략결혼을 하여 구교반동(舊敎反動)을 지도하였다. 여왕이 죽은 뒤, 59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 프랑스 왕녀와 결혼하여 프랑스 종교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중세(重稅)와 종교재판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도발하였고, 국내 이슬람교도의 반란(68)을 완전히 탄압하는 한편, 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해군을 격파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가톨릭적 군사행동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얻은 부(富)를 낭비하게 되었다. 영국의 해적행위와 대결, 88년 네덜란드 파견군과 무적함대에 의한 영국 상륙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였고, 재정적으로도 곤란하여 평화를 찾게 되었다. 열렬한 가톨릭신자로서 수도원을 겸한 에스코리알궁전을 세웠으며(63~84)
, 회화 등 미술품을 보호하여 에스파냐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1578.4.14~1621.3.31)
펠리페3세
에스파냐의 왕(재위 1598~1621). 마드리드 출생. 펠리페 2세와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안나의 아들.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으므로 총신이던 레르마의 아들 우세다에게 독재권을 맡겼다. 네덜란드 북부 7개 주와 12년 간의 휴전협정을 체결(1609), 사실상 독립을 인정하였다. 발렌시아의 무어인(人)을 추방하여 농업의 쇠퇴를 초래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30년전쟁에 참가(20)
하는 등 국고의 낭비가 심하여 에스파냐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1768.2.12~1835.3.2)
프란츠2세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재위 1792~1806).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재위 1804~35). 프랑스혁명으로부터 나폴레옹전쟁에 걸치는 독일·오스트리아사(史)의 격동기에 재위(在位), 일관해서 구체제(舊體制)의 유지에 힘써 온갖 개혁을 배격했다. 캄포-포르메오 조약(1797) 및 뤼네빌 조약(1801)에서 오스트리아령(領) 네덜란드·베네치아·토스카나 등을 포기하고, 또 라인 서안(西岸) 지방의 프랑스에의 할양(割讓)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804년 합스부르크가(家)의 세습령(世襲領)을 총괄해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를 내세웠는데, 1806년 나폴레옹의 라인동맹 정책에 의한 압박을 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 이 제국은 멸망하였다. 10년, 왕녀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의 비(妃)로 보내고, 12년 러시아 원정에는 원군(援軍)을 제공해야만 했으며, 그 후의 해방전쟁에도 참가하였다. 15년 이후는 신성동맹(神聖同盟)과 메테르니히의 정책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의 보전(保全)
을 꾀하였다.
(1832.7.6~1867.6.19)
요제프페르디난트막시밀리안
멕시코의 황제(재위 1864~67)
.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멕시코를 점령한 나폴레옹 3세와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자유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멕시코 보수파의 추대로 멕시코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은 이에 반대하여 무력으로 저항하였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이 먼로주의를 내세워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프랑스군의 귀국으로 고립되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1527.7.31~1576.10.12)
막시밀리안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 1564~76).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1548년 카를 5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젊어서 루터파의 영향을 받아 신구(新舊)
양파의 조정에 노력하였으나, 루터 제후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62년 가톨릭에 복귀하였다. 같은 해 보헤미아 왕이 되고, 64년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종교적·정치적 대립에 대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대외적으로는 터키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또한 폴란드 왕위 획득에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술가·학자를 보호하고 빈대학을 지원, 서적을 수집하는 등 문화의 진흥에 힘썼다.
(이 글의 최초작성자는 모르고, 인테넷에서 퍼온자료입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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