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태양의 나라 '아스테카'의 멸망

올드코난 2010. 6.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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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나라 '아스테카'의 멸망

(출처 : daum)

아스테카 문명

 

 기원 3세기 무렵부터 13세기 무렵까지 멕시코 동남부로부터 과테말라 및 온두라스에 걸친 대밀림 지대에 일어난 마야 문명에 대신하여 테노치티틀란 (현재의 멕시코시티)을 중심으로 13세기 무렵부터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 '아즈테카 문명'이다.

 

 

 

불길한 징조

 

 1510년대에 테노치티틀란에 살고 있던 아스테카의 왕 몬테수마는 여러 해에 걸쳐 불길한 징조에 번민하고 있었다. 우이칠로포치틀리의 신전이 갑자기 불을 뿜는가 하면 불타는 꼬리를 늘어뜨린 혜성이 대낮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호수의 물이 갑자기 가장자리에 흘러 넘쳤다. 그것은 그의 주위에 있는 신관이나 예언자도 해석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었다.

 

 불길한 징조에 번민하고 있던 몬테수마에게 1518년 어느날 숨가쁘게 달려온 파발꾼이 멕시코만 난바다에 "탑 또는 작은 산과 같은 것이 파도 사이에 떠다니고 있다."는 보고를 가져왔다. 그것은 배였다.

 

 두 번째 파발꾼은 "우리들보다 훨씬 흰 피부를 갖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사람이 그 배에 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갑자기 여러 해 전부터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케찰코아틀신"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케찰코아틀에 대한 신앙은 아스테카 왕국보다 앞선 테오티우아칸 왕국에서 활발하였다. 그것을 받아들인 아스테카 왕국에서는 케찰코아틀신은 흰색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학문과 성직자의 신이라고 하였다. 케찰코아틀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싫어하여, 그 때문에 끊임없이 우이칠로포치틀리와 싸웠다.

 

 우이칠로포치틀리와의 싸움에 지고 동쪽 바다 위로 사라질 때 그는 다시 한번 돌아와 자기 나라를 요구하겠노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세 아카틀(줄기)의 해에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아스테카 왕국에서는 그렇게 믿어지고 있었다.

 

 세 아카틀의 해는 1363, 1467, 1519년 등이었다. 다음 해가 바로 세 아카틀의 해가 아닌가. 흰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내년에 돌아올 케찰코아틀이 보낸 심부름꾼이 아닐까? 아스테카왕 몬테수마는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에스파냐인들의 상륙

 

몬테수마는 알 까닭이 없었지만, 배를 타고 온 이들 흰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케찰코아틀의 심부름꾼도 아니고 케찰코아틀 자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쿠바에 기지를 둔 에스파냐인들이었다.

 

 이보다 앞선 1492, 에스파냐의 재정적 원조를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그후 1504년까지 콜럼버스는 신대륙으로 모두 4회에 걸쳐 항해하였으며, 4회째는 중앙 아메리카의 동해안을 발견하였다. 그때 그는 마야족이 세운 툴룸의 탑을 보았다.

 

 1518년 이곳을 찾아온 것은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가 파견하고 후안 데 그리할바가 인솔한 에스파냐인들이었다. 그들은 쿠바에서 출발하여 카리브해를 거쳐 유카탄 반도의 동쪽에 있는 툴룸으로 접근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깎아지른 길벽 위에 세워진 백악의 신전을 보았다. 그것은 "에스파냐의 도시 세고비아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고 그들이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그후 그들은 바닷길을 따라 유카탄 반도를 돌아 멕시코만으로 들어갔고, 타바스코등으로 상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몬테수마가 보낸 사신과 접촉하였다. 아스테카왕 몬테수마는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그들에게 식량 등을 지급하라. 지급한 음식을 그들이 먹는지 먹지 않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그것을 먹거나 마시거나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케찰코아틀이다. 그들은 이전에 우리나라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으며, 다시 한번 그것을 맛보고 싶어 우리나라를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라. 내가 목숨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라.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곳으로 와서 왕위에 올라도 좋다. 원래 이곳은 그들의 나라였으니까."

 

몬테수마의 명령에 따라 멕시코(아스테카)인들은 식량과 선물을 해변에 늘어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멕시코인들을 알아차린 그리할바는 그들을 배 위로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멕시코인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케찰코아틀이라는 사실이 이리하여 확실해졌다. 안심한 멕시코인들은 에스파냐인이 내놓은 포도주에 취하여 배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까지 하였다.

 

 헤어질 때 에스파냐인들은 다시 한번 오겠노라고 하면서 왕에게 주는 선물로 유리 구슬로 만든 머리 장식과 비스킷을 내놓았다. 선물을 받아든 몬테수마는 유리 구슬을 보석으로 착각하였으며비스킷이 강바닥에 있는 탄산석회와 같은 맛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심한 끝에 그는 이 비스킷을 케찰코아틀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하여 케찰코아틀 신전 아래에 묻어 두게 하였다.

 

 

 

코르테스의 군대가 아스테카에 상륙

 

 그리할바를 대신하여 다음해에 11척의 배를 이끌고 멕시코로 찾아온 것은 나중에 아스테카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코르테스는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의 비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그의 권유를 받아 멕시코에 원정대를 파견하는 데 드는 비용의 반 이상을 부담하였다.

 

 벨라스케스가 자기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다고 생각한 코르테스는 11척의 배에 550명의 병사, 16마리의 말, 10문의 대포 및 4문의 소형 포를 싣고 벨라스케스 몰래 쿠바를 출발하였다. 도중에 있는 유카탄 반도 난바다의 코수멜섬에서 에스파냐인 조난자 아길라르를 구출하였다. 아길라르는 8년 동안 인디오 추장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원정대로서는 뜻밖의 훌륭한 통역자를 얻은 셈이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먼저 타바스코에 상륙하였다. 이곳은 지난해에 그리할바 일행이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지난해 그리할바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비난도 있었으므로 코르테스 일행보다 약 20배나 되는 1 2000명의 타바스코 군대가 공격해 왔다. 그러나 코르테스 군대의 철포와 기병이 그들을 압도하였다. 타바스코 군대는 그때까지 말을 구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선물과 더불어 20명의 소녀가 코르테스가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 가운데 하나였던 말린체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스테카어와 마야어를 모두 알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그녀에게 에스파냐어를 가르쳤고, 그녀는 헌신적이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통역자가 되었다.

 

 

 

 

테노치티틀란 입성

 

거기서 더 북상하여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동쪽으로 약 320km 떨어져 있는 베라크루스에 상륙하였다. 여기서 그는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를 앞질러 직접 1척의 배를 에스파냐로 보내 국왕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타고 왔던 배를 모두 침몰시켜 병사들의 결심을 굳혔다. 이어 아스테카의 속국이었던 토토나카와 교섭하여 이 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토토나카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아스테카인에게 굴복한 적이 없던 틀락스칼라인이 있는 지방을 통과하기를 권하였다. 틀락스칼라 군대는 코르테스 일행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윽고 항복하였으며, 그후로는 코르테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맹자가 되었다.

 

 틀락스칼라에 머물고 있는 도중 코르테스는 몬테수마로부터 초대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몬테수마는 코르테스 일행이 도중에 촐룰라에 들르기를 원하였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에게 "이것은 에스파냐 군대를 공격하려는 아스테카인의 음모"라고 속삭였다.

 

 코르테스 군대는 촐룰라에 들어섰다. 코르테스는 평화 교섭을 하자면서 주요한 주민을 거리의 광장에 모이게 하고는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갑자기 일제 공격을 명령하였다. 겨우 살아 남은 아스테카인들은 피라미드 위로 올라갔다.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이 피라미드의 벽을 파괴하면 안에서 물이 흘러나와 홍수를 일으켜 적을 삼켜버린다는 전설이 아스테카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안에서 나온 것은 그저 먼지뿐이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이 피라미드를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나중에 그리스도 교회를 짓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피라미드의 터는 그후 방치되어, 아주 최근까지 그곳이 피라미드의 터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나아가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이르는 마지막 산자락을 돌아나온 순간 에스파냐 군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인이 벙벙한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텍스코코호의 위에 자리잡은 인공 도시 테노치티틀란의 거리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공 도시였다.

 

 에스파냐인들은 이 테노치티틀란의 문을 향해 나아갔다. 보석을 곳곳에 박아 넣은 황금 수레를 탄 아스테카왕 몬테수마가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정말 당신이 몬테수마입니까?"하고 코르테스가 묻자, 몬테수마는 "제가 몬테수마입니다."하고 대답하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기가 케찰코아틀이라고 믿고 있는 코르테스를 향해 정황하게 환영 인사를 하였다.

 

 

 

몬테수마의 죽음

 

에스파냐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의 대광장에 면한 왕궁 하나에 자리잡았다. 몬테수마로부터 정중한 환영을 받았지만 코르테스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왕을 연금하고 단번에 아스테카 왕국을 지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00명의 병사와 가장 신뢰하는 장수, 그리고 말린체를 데리고 왕의 궁전으로 건너가 "당신을 우리 숙소로 데려가 감시하기 위해 왔다."고 알렸다.

 

 처음에는 코르테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왕도 말린체로부터 "동의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말을 듣자 코르테스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울며 붙잡는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곧 원래대로 될 것"이라고 말하고 몬테수마는 궁전을 나섰다.

 

 그런 다음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왕국의 신관들에게 그들의 신을 숭배하기를 중지하라고 요구하고, 쇠막대기를 휘둘러 돌로 만든 우이칠로포치틀리의 상을 깨트렸다.

 

 화가 난 몬테수마는 신관들을 통하여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한편 반란자 코르테스를 토벌하기 위해 쿠바 총독이 보낸 군대가 해안으로부터 상륙해 왔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된 코르테스는 신뢰할 만한 부하 장수인 알바라도에게 테노치티틀란을 맡기고, 쿠바에서 온 군대를 무너뜨려 이들을 자기편으로 삼았다.

 

 코르테스가 떠난 뒤 테노치티틀란에서는 한 신전에서 다른 신전으로 우이칠로포치틀리상을 옮기는 행사가 벌어졌다. 그 행사일에 무장하지 않고 아름다운 깃터로가 보석으로 몸을 감싼 수천 명의 아스테카인을 향해 알바라도의 군대가 공격을 가하였다. 성난 아스테카인들이 궁전으로 쫓겨 들어간 알바라도의 그의 부하들을 포위하였다. 그때 코르테스가 돌아왔다. 그는 몬테수마가 군중들에게 "안전이 보증된다면 에스파냐인들은 테노치티틀란으로부터 철수하리라고 한다."는 것을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몬테수마는 왕의 의관을 갖추고 궁전의 발코니에 나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아스테카인은 이제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따. 그들은 이미 왕의 동생인 쿠아틀라우악을 새로운 왕으로 세워 반란의 지도자로 삼고 있었다.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몬테수마는 세상을 떠났다.

 

 

 

1521, 아스테카 왕국 멸망

 

코르테스는 일단 테노치티틀란으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슬픈 밤'이라고 부르게 된 1520 6월의 그날 밤, 에스파냐 군대는 어둠을 틈타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아스테카인들은 이미 그것을 알아차렸다. 섬에서 본토로 철수하면서 많은 에스파냐인이 죽었다. 슬픔에 젖은 코르테스는 한 그루의 노송나무 아래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 나무를 '슬픈 밤의 나무'라고 하며, 지금도 멕시코시티 안에 남아 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동맹자가 있는 틀락스칼라까지 160km 이상의 길을 코르테스 일행은 퇴각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1521 5월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 사이에 쿠이틀라우악이 병으로 이미 사망하여 몬테수마의 조카인 22세의 청년 콰우테목이 새로운 왕이 되어 있었다.

 

 코르테스는 우선 테노치티틀란섬으로 들어가는 물자와 물의 보급을 끊었다. 기아와 역병과 싸우면서 아스테카인들은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거리에 있는 집을 모두 쓰려뜨려 납작하게 만들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80일동안 싸운 뒤인 1521 8 13, 최후까지 저항한 왕 콰우테목이 사로잡혀 아스테카 왕국은 멸망하였다. 거리에는 돌조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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