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후손입니다. 우리와는 6.25전쟁당시 파병으로 인해 혈맹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데, 사실 터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저역시 그러합니다.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2002년 당시 한국-터키전 생각이 나길래 갑자기 터키에 대해 궁금해 졌습니다.
앞으로 터키에 대해 가끔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우선 터키의 역사중 투르크 제국의 황제들에 대한 소개부터 먼저하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다음 카페'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투르크 제국의 황제
The Imperators of Turkey Empire
(Osman Turk 1299(1453)~1922)
(출처 원문:http://cafe.daum.net/r9119/FyOs/238)
세계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이룩했던 대제국은 다음의 3제국이다.
몽고족의 원(元)제국,만주족의 청(淸)제국..그리고 터키족이 세운 오스만 투르크제국이다.
중국과 북방문화라는 한가지 문화로 통일되었던 원제국과 청제국과는 달리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였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그 제국의 수명도 겨우 91년 (북원과 세조 전의 추존 4대 황제를 제외하고,1279년부터 1368년까지)이었던 원제국의 여섯 배,1643년부터 1912년까지 280년간 존재했던 청제국의 세 배에 달하는 자그마치 623년이나 되는,세계역사상 유례없는 장수 대제국이다.
미개인이라 느껴지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는 달리 오스만제국은 훌륭한 통치제도(엄격한 관료제였으나 매일같이 각료 회담을 열어 국무에 열중했다고 한다.그 위계질서는 재상/하지르-재무대신-사법대신-총독-아그하/호위대장-육군과 해군사령관-비서관 순이다)를 를 가지고 있었고,각 부서의 관료임명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수상제도를 훌륭하게 시행해 황제 1인 독재체제라기보다는 유능한 인물을 기용하여 제국의 운영을 맡기는 정책으로 발전의 큰 원동력을삼는 등 선진화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튤립시대를 구가했던 명재상 이브라힘 파샤,지중해 상권을 장악한 하둠 아메드 파샤,카톨릭의 대함대를 무찌른 무진타드 알리 파샤-그리고 마지막 재상이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케말 아타튀르크 파샤- 발칸전쟁의 영웅 엔베르 파샤- 이들은 오스만제국의 훌륭한 행정제도가 낳은 영웅들인 것이다. 오늘날의 터키는 서구의 근대화된 문명과 전통이 잘 어우러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이슬람세계 제1의 문화국이며,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이다. 이들의 전통과 무역에 대한 열린태도,다른 여러 민족들을 이해하는 태도, 훌륭한 문화유산들을 남긴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비록 세계 1차 대전에서 패배해 화려했던 제국의 깃발을 허무하게 내려야 했지만 분명 위대했던 제국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성립>
12세기,라틴 제국을 무너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영웅 미카엘 팔레올로구스(Michael PalaioloGus)는,제위를 탐내어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어린 황제 요하네스 4세(Johnes IV)의 두 눈을 멀게 하는 끔찍한 찬탈행위를 저지르고 황제 미카엘 8세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2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을 지배하게 된 팔레올로구스 왕조는,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타락하고 허약해져 결국 천년을 이어온 비잔틴은 황혼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었다.13세기 말인 1288년 비잔틴의 영토였던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일칸국에게 멸망당한 셀주크 투르크의 일개 영주였던 에르 토그릴(Ertoghril)은 본격적으로 투르크 족을 규합해 무능한 팔레올로구스 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본시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은,강성한 몽고제국에 쫓겨 중앙아시아로부터 동유럽까지 퍼져 있었다. 그들은 발달한 공예를 가지고 있었지만,비잔틴 제국은 이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들은 결국 약탈자의 면모로 변신해 지하드(Jihad:성전 聖戰)이라는 이름하에 기독교의 비잔틴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이들의 반란은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얼마 가지 않아 기독교에 대항한 전 이슬람교도의 성전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고,셀주크의 멸망 후 수많은 영주들 중에서도 소영주에 지나지 않았던 오스만 부족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비잔틴제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정도로 강성해지게 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든 1326년,토그릴의 손자인 오르칸(Orkhan, 재위 1324∼1360)은 아나톨리아의 중심도시 부르사를 비잔틴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수도로 삼았다,이들은 폐쇄적인 비잔틴사회와는 달리,기독교도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행정 체계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 기초가 된 비잔틴 제국보다 발전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막강한 세력 앞에서 천년동안 이어오며 나약해진 비잔틴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오르칸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선조들의 대망이던 유럽진출을 이루기 위해 발칸반도에 착실히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결국 오르칸의 아들 무라드(Murad, 1360∼1389)는,발칸반도 진출에 성공하여 비잔틴의 제2도시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을 빼앗아,터키식으로 에디르네(Edirne)라 개칭하여 새로운 왕국,오스만 투르크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오스만이 발칸반도에 세력을 뻗침에 따라, 팔레올로구스 조의 미카엘 9세(Micheal IX)가 다스리고 있던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수도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으로 위축되어,멸망의 날만을 기다리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승승장구하던 오스만투르크에 강적이 나타났다. 15세기에 접어든 1402년,스스로 차가타이칸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을 맞서 싸운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은 대패하고,국왕 바예지드(B?yezid)이하 수만의 병력이 전사하고 오스만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소아시아의 백성들은,신흥강국이라 믿었던 오스만도 같은 터키 족으로 일칸국에게 멸망당한 룸 셀주크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이미 그들의 뇌리속에, 313년부터 자그마치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비잔틴제국은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의 최전성기>>
위대했던 황제들 초대 메메드 2세~제4대 술레이만 1세
<초대황제>
메메드 2세 Mehmed II 재위 1451~1481 초대 황제로써 1453~1481
별칭:메메드 빈 파티(Fati:Great Conquester Mehmed),정복자 메메드
-위대했던 정복자-
20여 년 동안이나 재기불능의 절망에 허우적대는 오스만에 회생의 기미를 마련한 국왕은 무라드 2세이다. 그는 1422년 폴란드와 헝가리를 굴복시켜 유리한 조건으로 협정을 맺어 오스만의 부활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그 후 궁중 암투에 휘말려 13세의 아들 메메드에게 양위하고 물러앉았다. 젊은 국왕 메메드를 얕잡아 본 헝가리와 폴란드는,협정을 어기고 영웅 후냐디를 지도자로 하여 오스만의 영토에 쳐들어온다. 그러자 메메드는 "당신의 나라이니 당신이 구하소서,당신이 이 나라의 왕이로소이다"라며
아버지를 설득하여 왕위를 다시 아버지에게 양도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대오각성하여 위대한 정복자의 면모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45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왕위에 오른 메메드-그가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년째 되던 1453년,
'그리스의 불'로,철옹성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투르크의 전사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부패한 팔레올로구스조에 수탈을 당할대로 당한 발칸의 농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오스만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비잔틴의 마지막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 XI)는 소피아 성당에서 밀려오는 투르크 군을 바라보며 화염속에 몸을 던져 자결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1,140년이라는 장엄한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한 뒤,발칸반도 전역을 통일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초대황제로 등극한 메메드 2세는 모슬렘은 물론 기독교도들에게도 대정복자의 면모와 함께 위대한 황제로써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세력은 전유럽을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중앙아시아,심지어는 인도에서까지 그에게 조공을 바치고 인재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아랍세계를 통일하여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그는 유목민에게는 칸이었으며,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술탄이었고, 비잔틴의 기독교도들에게도 그의 위대한 면모는 백성들이 그를 기독교도들의 황제로써 받들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학술을 애호했던 메메드 2세는 비잔틴의 학자들을 오스만에 그대로 포용하여, 오스만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키는데에 성공했다. 원래 공예에 뛰어난 터키 족은,우상숭배를 철저히 배제하는 이슬람세계의 원칙에 따라 모든 미술에 독특한 문양을 탄생시켰는데,오늘날에도 대부분의 타일 문양이 따르고 있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바로 그것이다. 몽골족의 원제국이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나,그들의 제국은 120여 년을 버티지 못하였다.하지만 위대한 술탄 파티가 세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4세기 동안이나 동유럽,서남아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의 빛이라는 뜻인 이스탄불(Istanbul)로 개칭되어,아직까지도 이스탄불로 불리우고 있다.
<제2대>바예지드 2세 Bayezid II 1481~1512
동생 젬므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신생제국으로 분쟁에 휘말리기 시작한 오스만제국을 훌륭히 꾸려나가는데에 성공했다.하지만 제위 계승 전쟁으로 너무 막대한 힘을 탕진해 그의 재위기간에는 별다른 정복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수성에는 성공했지만 내정에도 별 치적은 없었다.
<제3대>셀림 1세 Selim I 재위 1512~1520 별칭:공포의 황제
맘룩조를 멸망시키고,칼리프를 양위받아 터키 제국을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만든 셀림 1세-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무자비한 가신 숙청 과정과 두 형은 물론 자신의 네 아들을 죽였고,조카 일곱을 모두 죽인 잔인했던 황제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탓에 셀림1세를 아주 싫어한다. 그러나 업적도 만만치 않게 커서,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샤와 대립하여 찰드란 전투에서 승리 후 사파비의 수도 타브리즈를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최강자가 되었다. 이후 페르시아 문화는 오스만 투르크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1512년 재위 8년 만에 갑자기 사망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위대했던 황제 술레이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셀림 1세는 우리나라 조선조의 태종대왕과 닮지 않았나 생각된다.
<제4대> 술레이만 1세 Suleiman I 재위 1520~1566 별칭:입법자,번영의 황제(Emperor the Magnificent)
-유능했던 통치자,실패했던 아버지-
1495년 트라브존에서 셀림 1세의 두 번째 황후인 하프사 하툰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술레이만 1세는,셀림 1세의 외아들이다.원래 셀림 1세에게는 술레이만 말고도 아들이 넷이나 더 있었지만 셀림 1세가 모두 죽였던 것이다. 잔인했던 황제 셀림 1세가 이룩해놓은 업적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대발전의 기반을 쌓아놓고, 유능한 황제의 출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해,지중해의 상권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오스만 제국이었고, 제국의 국고는 넘쳐 흘렀으며 몇 년치 세금을 탕감해줄 정도였다.정예부대 예니체리는 눈에 불을 켜고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스만제국 황제의 호위부대 예니체리는 원래 노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스만이 정복한 세계 각국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인 이들은, 노예신분에서 해방되는 조건으로
일생을 결혼조차 하지않고 황제만을 위해 그 목숨을 바치는 전사로 키워졌다. 이들에 대한 대우는 대단했으며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훈련에 임했던 이들은 오스만의 최정예 전사로 전세계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예니체리는 6대 무라드 3세 이후 군율이 약화되어 결혼이 허용되고 병력과 훈련이 절감되었다.그러나 원래 목적과는 달리 궁중 암투조직에 이용되는 비밀군대로 전락해 버렸고,황제를 암살하기도 하는 등 정치 세력화 되었다) 아버지 셀림 1세에게 멸망당한 맘룩 조의 유민들은 다마스쿠스와 알렉산드리아를 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25세의 젊은나이에 즉위한 술레이만의 첫 번째 시련이었다.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반란을 쉽게 진압한 술레이만은 그 여세를 몰아 1521년부터 발칸 반도 정복을 시작했다.이들은 이슬람 성전 지하드의 이름아래 발칸의 중심도시인 베오그라드를 정복하고,에게 해에 남아있던 비잔틴 팔레올로구스조의 잔당들을 모조리 제거한 뒤,기독교의 성 요한 기사단령인 로도스 섬을 정복하여 제국은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한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이때 활약했던 인물들이 북아프리카의 해적왕-바르바로사 파즐 하이레딘-기독교의 동맹함대를 크게 무찌른 무진타드 알리 파샤-그들은 기독교도들의 해군을 무자비하게 침탈한 뒤 지중해 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제국에 선사했다.질풍노도처럼 중부유럽의 헝가리로 밀어닥치는 술레이만의 대군은 헝가리왕 루이 2세를 맞서 모하치 평원에서 대전투를 일으킨다.그리고 예니체리의 전광석화같은 기습공격으로 루이 2세 이하 헝가리의 대군은 전멸하고 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다.당시 오스만의 화약제조기술과 소총 사격술은 세계 제1이었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이라 했던가..그러나 1529년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합스부르크조의 수도로 유럽의중심이라 할 수 있던 비엔나를 포위공격하던 술레이만 1세는,그만 보급에 실패하여 군사의 태반을 잃고 이스탄불로 철수하고 말았다. 비록 유럽 전체를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오스만 터키제국은 동남 유럽 전체를 손아귀에 쥐었으며,유럽 국가는 술레이만을 두려워하여 '지구상 제일의 공포는술레이만이다'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시 이슬람의 영향권은 동부 독일,남부 폴란드,서부 페르시아,코카서스 지방에까지이르렀고 북아프리카 전역을 차지했으며(현재의 모로코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함대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동서남북으로 누비며 기독교의 함대들을 격파하였고,기독교 서방국가들과 인도와의 무역을 막은 뒤 그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였다.게다가 지혜가 뛰어났던 술레이만은 각 이권을 유럽의 국가들에게 교묘하게 배분하여 유럽 서방제국의 반 오스만 연합 결성을 와해시키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정화의 동남아원정을 성공시키며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명왕조와 더불어 세계 최강이었다. 그가 입법자라고 불리는 이유는,이슬람 경전 코란에 의거한 샤리아법을 과감히 폐지하고 수니파,시아파,기독교,유대교의 습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만든 세속법 카눈(kanun)을 제정했기 때문이다.그의 신념은,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평등사상이었고,당시로써는 파격적이던 이 평등 사상은 오스만 투르크를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역동력이 되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재상으로 전기에는 이브라힘 파샤. 후기에는 소쿨루 메메드 파샤가 있었다.이들은 투르크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지르들의 하나로 이슬람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훌륭한 보좌역을 수행했다. 그러나..술레이만 황제의 말기 치세는 위대한 정복자의 면모는커녕 피비린내 나는 궁중 암투에 휘감겨 무능한 황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에 그쳤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이슬람교를 믿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는 항상 후계구도에 대한 내분이 큰 말썽거리었다. 메메드 2세는 이를 막기 위해,황제로 즉위한 왕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형제들은 각 별궁에 유폐하여 평생동안 감시하는 제도를 실시했을 정도였다. 술레이만의 아버지 셀림 1세도,두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외아들로 자상한 어머니 품에서 귀하게 자란 가정적인 남자 술래이만은 아내 록셀란 황후(슬라브족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의 오데사가 고향이다)를 끔찍히도 사랑했다. 원래는 노예로 삼으려 했던 것을 그 미모를 보고 황제가 사랑에 빠져 결국 황후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4남 1녀를 낳았는데,장남이 메메드,차남이 지한기르,3남이 셀림이었고 4남이 바예지드였다.이 형제들은 원래 우애가 좋았다.장남으로 황태자였던 메메드가 요절했지만,이들에게는 술레이만의 사생아로 몬테네그로의 귀족 딸이었던큐르헴이 낳은 무스타파라는 공적(共敵)이 있던 것이다.그러나 4남매(메메드를 제외하고 술레이만의 세 아들과 딸,그리고 사위가 힘을 합쳐 배다른 형제 무스타파를 자살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 뒤 그들의 사이는 곧바로 갈라져,얼마 뒤 차남 지한기르가 자결했으며 셀림과 바예지드는 한술 더 떠 서로 군대를 이끌고 이스탄불 성안에서 시가전을 벌이기까지 했다.결국 형 셀림에게 바예지드가 죽음을 당했고 노환으로 정신을 잃은 술레이만 황제는 아들들이 셋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알지조차 못했다. 황제는 시게토와르 전투를 수행하던 도중 노환으로 사망했다.
<<쇠퇴하는 오스만제국>>
무능하고 방탕했던 황제들 제 5대 셀림 2세~제 12대 이브라힘 1세
<제5대> 셀림 2세 Selim II 1566~1574
위대한 아버지의 형편없던 아들.술레이만 대제의 4남,어머니는 록셀란 황후.
형 지한기르와 무스타파,동생 바예지드를 모두 죽이고 제위에 오른 황제.술주정꾼에 여색만 탐하던 무능한 황제로,명재상 소쿨루 메메드 파샤의 보좌가 없었다면 술레이만 황제 말기에 혼란에 휩싸인 오스만제국은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재위기간 중에 항상 술과 여색에만 탐닉해 있었으며 모든 전권은 재상 소쿨루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재상 소쿨루는 동아프리카 진출에 성공하고 튀니지 하프스조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술레이만 말년 느슨해진 북아프리카 에서의 제국 영향력을 다시 세웠다. 키프로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뒤에도 방탕한 생활을 멈추지 않던 황제는 결국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6대>무라드 3세 Muraad III 1574~1595
셀림 2세의 맏아들.어머니는 카딤(귀비로써 황제는귀비를 4명 두는 것이 관례였음)이였던 자히.예니체리의 지지를 받던 동생 하미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역시 소쿨루 메메드 파샤의 보좌를 받았다. 그의 재위 기간에 오스만제국은 카프카스를 재정복했다.신흥 왕조로 오스만제국과 대립관계에 있던 페르시아(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전투를 벌여 트란속사니아 북부와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빼앗았다. 기독교를 탄압하여 1586년 이스탄불 내의 가장 큰기독교 사원인 파마카리스토스 교회의 예배를 금지했다. 소쿨루 메메드 파샤가 1578년 광신적 극단이슬람주의자에게 암살되자 더 이상 제국에는 위대한 재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급속도로 힘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무라드 3세와 그 아들 메메드 3세 시절에 재상은 23명이나 경질되었다. 1593년 황제는 신성로마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시토바토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황제는 굉장히 낭만적이였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변덕이 심하고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였다. 그의 하렘에는 자그마치 1,200여 명의 소녀들이 있었으며 점성술을 좋아하고 서방 기독교 문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탄압하고 황제의 권한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던 하는 철면피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제7대>메메드 3세 Mehmed III 1595~1603
무라드 3세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무라드 3세의 황후인 사피에 하툰.어머니는 베네치아 출신이었다.건축가 다우트마의 필생의 역작,모스크 '예니 자미'를후세에 남긴 황제이다.정치적으로는 무능한 황제였으나 무예가 뛰어나 전투의 지휘관으로는 탁월했던 그는 1595년,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을 메세-케르스테 전투에서 대승하여 전멸시켜 다시 한 번 유럽의 최강자로써의 투르크의 면모를 확실히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약한 황제라 불렸던 그는, 매일 밤 하렘에서 변태성욕을 즐기는 일에만 관심이 많았던 황제였다. 모후 사피에 하툰은 아들 메메드가 황제로 즉위하자, 메메드의 19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그들 중에는 갓 태어난 젖먹이도 있었다.(사피에 하툰은 8년 동안 발리데 술탄(섭정)의 자리에있었다)
<제8대>아메드 1세 Ahmed I 1603~1617
<제9대>무스타파 1세 Mustafa II 1617~1618,1622~1623
<제10대>오스만 2세 Osman II 1618~1622
<제11대>무라드 4세 Muraad IV 1623~1640
아메드 1세의 셋째아들로 어머니는 메이페이케르 발리데 술탄 meypeykr valide sultan이라 불렸던 아메드1세의 하세키(카딤 중 가장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아름답고 젊은 애첩을 지칭하는 오스만의 궁중용어)쾨셈 황태후(발리데술탄이란 섭정의 뜻)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즉위기간 내내 어머니가 궁중과 예니체리,그리고 오스만제국의 각 군단을 다스렸다. 서구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띤 모후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예니체리가 황실에 반항하였다. 모후는 모든 일을 상의함에 있어 황제와 재상을 배제하고 무라드 4세에게는 매제가 되며 모후에게는 사위가 되는 이집트 총독 메메드 파샤와 단 둘이 처리했기 때문에 모후와 궁중인사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재위기간 중 이란이 예레반(코카서스 지방의 도시로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과
바그다드에 침입하여 결국 제국은 1639년 불리한 조약인카스리 시린 조약을 맺어 아제르바이잔을 이란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12대>이브라힘 1세 Ibrahim I 1640~1648 별명:광인황제
방탕하고 무능력했던 폭군.28세에 요절해버린 무라드 4세의 동복동생이며 어머니는 쾨셈 황태후.형의 죽음으로 제위에 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당시 재상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는 유능한 재상이었으나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던 황제는 1644년 어머니 쾨셈 황태후 에게 재상을 모함하여 결국 그를 처형하고 독단정치를 일삼아 폭군이 되었다. 그는 하렘에 수많은 미소녀를 잡아들여 마치 종마처럼 능욕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고위관리와 귀족의 아내와 딸들을 능욕하기까지 했다. 그의 치세하에 하렘에 가두어져 있던 처녀들은 자그마치 280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만 되면,항상 처녀 한 명의 동정을 빼앗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스탄불의 대주교의 딸까지 건드렸고 딸이 하렘에 유폐되어 능욕한 것을 참지못한 대주교외 예니체리들의 반란으로 결국 1648년 폐위 후 살해되고 말았다.
<<개혁을 위한 노력>>
쇠퇴하는 제국을 되살리려 했던 황제들 13대 메메드 4세~25대 압둘 메지드
<제13대>메메드 4세 Mehmed IV 1648~1687 별명:사냥꾼 메메드(mehmed the hunter)
쾨셈 황태후의 손자이고,이브라힘 1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브라힘 1세의 황후 발리데 타르한.바그다드 키호크를 지은 황제.즉위 초반에는 할머니 쾨셈 황태후가,중반에는 어머니 타르한이 섭정을 했다.친정에 나선 메메드 4세는 훌륭한 입헌 군주로써 쇠퇴해져 가는 제국에 일침을 가한 훌륭한 황제이다. 1656년,어머니 타르한 황태후는 메흐메드 쾨프뢸루 파샤(Koprulu Mehmed Pasha)를 재상으로 기용해,부패한 행정기구의 정비에 나섰다.그들이 정비하는 과정에서 처형되거나 쫓겨난 부패한 관리의 수만 3만명에 육박할 정도였다니 당시 제국의 부패상황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사냥을 좋아하고 문학을 애호했던 그는 상대적으로 예니체리들에 대해 푸대접을 했고 결국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의 내란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제14대>술레이만 2세 1687~1691
메메드 4세의 이복형제,별궁에 갇혀 있다가 메메드 4세의 폐위로 짧은 기간 동안 황제가 되었다가 재위 4년 만에 도로 폐위된 뒤 살해되었다. 그가 별궁에 갇혀서라도 목숨을 유지할수 있던 이유는,아버지인 아메드 1세가 메메드 3세 때에 이루어진 19명이나 되는 자신의 이복형제를 처형한 사건에 혀를 내두르며 자신의 자식들의 죽음을 차마 볼 수가 없다는 계획하에 형제 간 살해를 성문법으로 금했기 때문이었다.
<제15대>아메드 2세 1691~1695
<제16대>무스타파 2세 1695~1703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중 제위에 오른 그는,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으나 1697년 예니체리의 반역으로 오스트리아군에게 젠타에서 대패하여 결국 카를로비츠 조약에 서명을 해야했고,170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조약(이스탄불조약)으로 아조프해 연안의 영향력도 한참 신흥발원하던 로마노프조의 러시아제국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1703년 예니체리에게 폐위당했다.
<제17대>아메드 3세 Ahmed III 1703~1730 별명:꽃의 황제 Ahmed the Tulip
아메드 3세는 즉위 직후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하여 상쾌한 출발을 보인 황제이다. 아메드 3세 시대의 재상이자 다마트(황제의 사위로,아메드3세의 맏사위)였던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와 그 후대의 코자 라기브 파샤(Qoja Raghib Pasha).서구화와 발전을 꿈꾸었던 이들은,그동안 무능한황제들이 집권하여 쇠퇴했던 오스만제국의 발전가능성은 오직 서구와의 교류와 무역에 있다고 믿었고,네덜란드와 프랑스와의 교역에 앞장섰다. 이들의 신념은 성공한 듯 했고 프랑스의 화려한 건축 양식과 귀족문화가 들어와이 시기 이스탄불의 귀족 문화는 꽃을 피웠다.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튤립이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고 한다-그들은 이 문화의 최전성기를 튤립 시대(Lale Devri)라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귀족층에만 적용된 소극적 개혁이었으며 서양의 앞선 제도를 받아들인 것에는 무관심하였고 오직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화려했던 시절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오스만제국의 쇠퇴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결국 1730년 파트로나 하릴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제18대>마흐무드 1세 Mahmud I 1730~1754
<제19대>오스만 3세 Osman III 1754~1757
<제20대>무스타파 3세 Mustafa III 1757~1773
<제21대>하미드 1세 Abdl hamid I 1773~1789
<제22대>셀림 3세 Selim III 1789~1807 -비운의 영웅-
하미드 1세의 장남(일설에는 조카로 양자였다고도 함),어머니는 미흐리샤. 지중해의 해적들의 손에 한 미소녀가 붙들려 왔다. 아름다운 금발을 지닌 작은 미소녀의 미모는 정말로 놀라웠다. 에메 뒤비크(Eme dubik),이 열 세 살 프랑스의 공녀가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처제였다는 사실은 차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스물일곱 살의 젊은 황태자 셀림은 하렘에 갇힌 이 소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났다-마흐무드- 하미드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 해 1789년. 셀림은 제위에 오르고 에메는 황후가 되었다. 셀림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에메는 훌륭한 내조자가 되어주었으며 그는 제국의 정부를 재상 하지르 이하 12부처의 장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각책임제로 개편하는 것을 시발로 유럽 각국에 정상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유럽식 군제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하미드의 또 다른 후처였던 시리아 비는 아들 무스타파를 내세워
유럽식 제도에 눌려 푸대접을 받고있던 전통 군대 예니체리를 선동했다. 나폴레옹이 그의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했던 세바스찬 장군이 급작스런 아내의 죽음 때문에 프랑스로 잠시 귀국해 있던 틈을 타서였다. 결국 1807년 예니체리는 궁중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목졸라 살해하고 황후 에메와 황태자 무하마드는 궁중안의 별궁에 유폐되고 무스타파가 황제 무스타파 4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제23대> 무스타파 4세 Mustafa IV 1807~1808
하미드의 아들로 셀림 3세의 이복형제.어머니는 시리아 비이며 예니체리가 이끈궁정 쿠데타로 제위에 올랐지만 8개월 만에 불가리아 군대의 개입으로 폐위당하고 모후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신식 군대와 개혁의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수구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예니체리들에게는 마흐무드 2세의 즉위는 큰 타격이 되었다.
<제24대>마흐무드 2세 Mahmud II 1808~1839-은혜로운 탄지마트개혁-
에메황후와 셀림 3세의 아들.오스만제국 유일의 금발 황제.즉위하자마자 어머니 에메 황후가 발리데 술탄이 되었다.그녀는 즉위하자마자 제도를 프랑스식으로 개혁하였고,터키의 수구적인 생활양식을 서구식,실용적으로 개혁하였다. 서양의 훌륭한 군대와 무기를 도입하여 신식군대를 키운 뒤 프랑스 식으로 훈련을 강행했다.터키의 전통 기병과 뛰어난 승마술은 15세기 전성기를 이룩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지만 신식 전법과는 전혀 맞지 않아 19세기 오스만제국은 쇠퇴 일변도를 걷고있었던 것이다. 예방 접종과 종두를 실시했으며 실용적이지 못한 터번을 서양식 양식과 터키 전통 양식을 조합해서 만든 터키 모자로 바꾸어 쓰게 했다.수백 년 동안 탄압받던 여인들의 차도르를 벗긴것도 에메 황태후였다. 1809년 언니 조세핀이 황후에서 폐위되자,에메 황후는 분노하여 프랑스와 관계를 끊고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이 감정적인 행동은 오스만 제국의 러시아 세력 압도의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았다.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 원정을 할 때 막강한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만,에메 황후가 단교를 선언하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탓에 결국 러시아에게 대패하고 황제자리에서까지 쫓겨났던 것이다. 1817년 세상을 떠난 그녀의 묘비에는, "동방에 새로운 빛이 되었던 아름다웠던 태후 폐하" 라 새겨져 있다. 모후의 죽음 이후,마흐무드 2세는 아버지 셀림 3세의 실패를 거울삼아 막강한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켰다.신식 군인들과 개혁적 세력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그는 결국 1823년 아버지의 원수들인 예니체리의 세력을 꺾고 예니체리를 폐지시켜 술탄의 권위를 세운 뒤 은혜 개혁:탄지마트 tanzimat:를 실행했다. 당시 예니체리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던 것이다.술레이만 1세 시절 전성기를 이룩할 때의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도 예니체리였으나 셀림 2세 이후로 예니체리들은 황제를 암살하고 옹립하는 것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타락한 정치 세력화 되어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터키의 서구화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 황제는 과감하게 예니체리를 폐지했다. 그러나 서양 열강의 세력은 이미 너무도 커져 있었고 1827년 제국은 나바리노 해전에서 패배해 결국 1832년 그리스를 독립시키고야 말았다.
<제25대> 압둘 메지드 Abdul Majid 1839∼1861 -실패한 은혜개혁-
마흐무드 2세의 아들,즉위하자마자 재상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를 기용하여,아버지의 개혁을 크게 확장하여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적인 대개혁을 목표로 탄지마트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정치,경제,군제,교육은 물론이고 이슬람 종교에까지 개혁의 손길을 뻗치던 그는 재상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의 도움으로 1839년 구르하네 헌장을 발포하여 반대파의 세력을 누르고 개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무능했던 그는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연합군의 도움으로 러시아와의크림전쟁에 간신히 승리하고 파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이 파탄이 나서 개혁은 더 이상 실행할 수 없었고,그는 결국 절망하여 하렘에서 유흥에 빠져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들은 무려 3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제국의 멸망>> 세계대전과 터키제국의 멸망 26대 압둘 아지즈~30대 메메드 6세
<제26대>압둘 아지즈 Abdul Aziz 1861∼1876
메지드 황제의 장남.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지마트개혁을 실행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결국 실의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치세속에 오스만 제국은 해외의 정복영토를 하나둘씩 잃어가며 쇠퇴의 길만을 걸었을 뿐이었다.
<제27대>무라드 5세 Muraad II 1876
메지드 황제의 둘째아들.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겨우 93일 동안 제위에 있다가 요절하고 말았다.
<제28대>하미드 2세 Abdl hamid II 1876~1909 -시대착오적인 피의 황제-
무라드 5세의 동생.제위에 오르기 위하여 헌법 제정을 약속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재상 미드하트 파샤와 대립하여 헌법을 황제의 뜻대로 좌지우지 하였다. 그다지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고,러시아와의 전쟁 상황에 있어 의회 폐쇄와 헌법 중단 등을 국민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황제에게 충성했다. 황제는 30년 동안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하며 전제정치를 실시했다.개혁적,진보적 세력과 인사들은 그에게 수없이 많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탓에 그는 피의 황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제국의 경제가 파탄되어 오스만제국은 멸망의 길을걷게 되었고,애국심 있는 청년들이 루메리(이스탄불이북의 오스만제국 영토)에서 발흥한 청년 터키당의 세력은 황제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청년 터키당의 압력에 굴복한 황제는 결국 1908년 헌법 개헌을 승인해 버렸다. 이듬해 황제는 테살로니키에 유폐되었다가 1년 만에 병사하였다. 피의 황제의 최후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쓸쓸한 최후였다.
<제29대>메메드 5세 Mehmed V 1909~1918
하미드 2세의 이복동생이며 압둘메지드의 넷째아들.즉위한 뒤 황궁을 재건하고 재상에 발칸전쟁의 영웅 엔베르 파샤를 기용했다.엔베르 파샤는 청년 투르크당과 결속하여 범 튀라니즘 운동을 일으켰다.그동안의 청년 투르크당은 만민 평등을 주장했지만,엔베르 파샤 집권이후에는 그 색깔이 약간 변모하여 투르크 민족에 한한 평등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엔베르 파샤는 범튀라니즘의 실현을 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과 동맹을 맺고 가담하였고 한때 승리를 예감했던 제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패전이 확실시되고야 말았다. 엔베르 파샤는 실각했으며 1918년 10월 투르크제국은 연합군과 종전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패색이 짙어가던 도중 황제는 73세의 나이로 이스탄불의 도르마바흐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30대>메메드 6세 Mehmed VI 1918~1926 -오스만제국 마지막 황제-
압둘메지드의 여섯째 아들이며,형 메메드 5세의 뒤를 이어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가던 1918년 제위에 올라 그 해 무드로스 휴전조약으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힘없던 황제는 1920년 세브르 조약으로 제국의 모든 정복지를 상실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수도 콘스탄티노플 일각으로 영토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영웅이 있었다. 청년 터키당에 우호적인 젊은 군인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켜내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개혁주의자 케말 아타튀르크 파샤 가 바로 그였다. 1919년 8월 동방 제주 대표자 회의를 열어 민주주의 제국 강령인 국민 맹약을 선포한 뒤 앙카라의 대국민회의 의장으로 취임해 이미 제국의 2인자로 급상승한 그는 실용적인 알파벳의 전국민에 대한 도입, 문맹률의 감소와 완전한 서구화, 입헌 군주제의 실시와 경제 발전 계획 들을 천천히 실행에 옮겨가고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연합군에게 빼앗길 상황이 되자,이 케말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였고 케말 파샤는 1921년 사카리아 전투에서 투르크 제국의 영토를 노리는 그리스군을 전멸시킨 뒤 1922년 7월 연합국과 맺은 세브르조약을 폐기하고 로잔조약을 체결하여 터키의 영토를 지켜내었다. 1922년 10월 황제 메메드 6세는 세브르조약의 조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회인 대국민회의는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황제의 모든 정치적 권력을 빼앗고 황제를 영국으로 망명하게 하였다. 192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과 동시에 칼리프제(制)가 폐지되어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480년간 이어져 내려온(투그릴로부터는 623년)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비록 제국은 멸망했지만,오스만 투르크제국의 멸망 원인은 내적인 원인이였다기 보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봐야 했다. 물론 피의 황제 하미드 2세가 국민들의 개혁요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제정치를 휘두르려다가 황제의 권력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나,그 당시만 해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거대한 세력은 감히 유럽의 국가들이 도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은 케말 파샤가 도입한 선진적인 제도덕분에 유럽 제국의 하나로 진입하여 매년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으며 곧 EU의 정회원국이 될 예정이며,문화도 이슬람교의 바탕에 자유롭고 진취적인 서구 문화가 합쳐져 독특한 터키 문화를 이룩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623년간의 위대하고 훌륭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유적은 터키 공화국을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통틀어 최고의 관광 대국으로 발돋움할수 있게 해줌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써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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