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제국의 연대기
신성(神聖)로마제국(帝國) (Heiliges Römisches Reich, Holy Roman Empire)
(출처:http://cafe.daum.net/enoch/_know/36)
샤를마뉴 대제 대관식(800) 때부터 1806년에 이르는 동안 처음에는 프랑크족 황제가, 나중에는 독일인 황제가 통치한 영토.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을 구성한 독일·이탈리아의 여러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렇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를 제국 구성국들의 역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제국을 구성한 각 영역은 각기 자국의 본체를 유지했고 역대 황제는 대관식 때 각기 자기가 속한 나라의 왕관을 썼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했던 나라의 유일한 왕관을 소유한 것이 아니였다. 여러 왕이 존재했고 그 왕들 가운데 황제가 존재했다. 그러므로 왕국의 왕으로서 제국의 황제로 2 개의 왕관을 가진 황제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독일만의 역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주변국의 역사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에 서있음은 분명하다.
오토 1세 이전의 황제는 실제로 로마에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는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당연히 대관식을 치른 것처럼 예외없이 황제의 권위를 주장했다. 후자의 경우는 로마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황제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런 변칙이 있었음에도 적어도 중세 때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주의사항: 신성로마제국은 1000년 동안 이어진 제국으로서 상세한 자료는 매우 방대한 분량을 차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제국의 대략적인 소개만을 언급합니다. 왕조를 중심으로 황제에 대한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독일에 대한 역사에서 벗어난 부분은 곧바로 유럽 전체의 역사로 확대되어야 하는 문제점으로 생각되어 일부분은 생략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왕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개로 끝을 맺습니다.
[명칭의 유래]
신성로마제국의 정식명칭은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이 제국이 처음부터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다. 제국의 선구형태인 카롤링거제국은 물론, 오토 1세시대에도 특별한 명칭은 없고, 간단히 <제국(Imperium)>이라고 불렸다. <로마>라는 형용사가 추가된 것은 오토 2세(재위 967-983) 시대부터인데, 특히 로마제국의 부흥을 정치목적으로 내세운 오토 3세(재위 996-1002) 시대에 일반화되었다. 또한 <신성>이라는 형용사가 추가된 것은 슈타우펜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시대이다. 원래 신성로마제국은 황제권과 교황권의 두 기둥으로 받쳐져 있던 일종의 신성정체(神聖政體)였지만,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투쟁 결과, 교황권-성권(聖權)과 황제권-속권(俗權)의 분리·대립이 표면화되어 황제권의 세속화가 뚜렷해져, 사태는 성·속 양권의 분화라고 하는 단순한 형태를 취하지 않고, 황제권·교황권 모두 성·속양면을 가진다는 주장을 고집하였다. 황제측은 <황제는 교황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접 신(神)의 은총과 제후의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했고, <거룩한 교회(Sancta Ecclesia)>에 <신성한 제국(Sacrum Imperium)>을 대치시켰다. 그 결과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의 황제 빌헬름 폰 홀란트(재위 1247-56) 시대에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출현하였다. 중세 말 황제는 이탈리아지배를 유지해 나갈 힘을 잃고 국왕으로 선출된 뒤, 로마원정을 단행하여 교황을 통해 황제로서 대관하는 관행도 1452년의 프리드리히 3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판도는 독일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해서 15세기 말부터 <독일민족의>라는 한정사(限定詞)가 붙게 되었다.
[제국의 발전과 멸망]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적 선례는 800년의 카롤루스대제의 대관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카롤링거제국인데, 이 제국 또한 476년에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간주되는 것이었다. 루트비히 1세(경건왕)가 죽은 뒤, 카롤링거제국은 3분되어 중부프랑크와 황제는 장남 로타르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각각 루트비히와 카롤루스가 계승했으며, 동프랑크는 독일왕국으로, 서프랑크는 프랑스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중부프랑크는 로타르가 죽은 뒤 다시 로트링겐·부르군트·이탈리아로 분할되어 카롤링거가의 왕통도 단절되었다.
로트링겐은 메르센조약(870)·리베몬조약(880)에 따라 동·서프랑크로 분할되었으나 부르군트·이탈리아에서는 현지의 대호족(大豪族)들이 각기 왕을 자칭해서 대립·항쟁을 계속하였다. 작센왕조 제2대 국왕 오토 1세는 이 부르군트와 이탈리아를 정복·합병하고, 이 지역에 남아있던 황제권의 전통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신성로마황제가 되었는데, 마치 카롤루스대제가 로마교황 레오 3세의 손을 통해 대관된 것처럼, 2차례에 걸친 이탈리아원정을 단행하고, 962년 교황 요한 12세의 손을 통해 황제로서 대관되었다. 그 뒤 역대 독일국왕은 즉위 후, 로마원정을 수행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서 가관(加冠)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황제의 독자적인 권한이란 것은 거의 없고 맹목적인 칭호에 불과하지만, 교황권의 보호자라고 하는 기능을 통해 이념적으로는 유럽의 그리스도교세계에서 일종의 우월성을 갖고 있었다. 이 우월성은 작센·잘리어·슈타우펜의 3왕조를 통하여 약간의 변동은 있었어도 계속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울러 후에 나타난 교권과 속권의 대립의 계기도 포함하고 있었다.
작센왕조시대의 독일왕국은 슈바벤·작센·바이에른·프랑켄 등 몇 개의 부족대공령(部族大公領)의 합성체였는데, 부족대공의 권력이 강해지고 현지 부족민과의 결합이 공고해지자 끊임없이 왕권을 분열로 유도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오토 1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가통일의 지주를 국내의 교회세력과의 결부에서 찾는 이른바 <제국교회정책>을 채택하였다.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 등 고급성직자에게 소령(所領)을 기증 또는 봉토(封土)로서 주고, 여러 가지 특권과 보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들을 국내통치상의 중요한 지위에 두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작센왕조의 여러 황제 및 초기 잘리어왕조의 황제가 계승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하인리히 3세는 당시 활발했던 교회개혁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교황청의 개혁을 도와서 교황권 권위확립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융성기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교회개혁과 교황권의 강화는 제국교회정책에 있어 이른바 양날의 검이었다.
이 정책은 황제의 성직자에 대한 서임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고위성직자는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으로 서임됨과 동시에 황제의 봉신(封臣)이 되고 봉신으로서의 봉사의무가 지워졌는데, 이것이 교희개혁의 공격목표였던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속권에 의한 성직자서임 그 자체까지 부정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황의 지상권 확립을 의도한 교황 그레고리오7세와, 교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밀라노주교의 서임을 강행한 하인리히 4세의 다툼은 황제의 왕권강화정책과 그에 반발하는 국내 제후와의 대립이라고 하는 독일 국내의 정치상황과 결부되어서 전국적 내란, 이른바 성직서임권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내란은 보름스협약(1122)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그동안에 독일의 봉건화는 급속히 진전되어 성·속의 제후들은 각기 영방(領邦)의 수립과, 영방지배권 확립의 길로 나섰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슈타우펜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는 남서독일을 중심으로 황제자신도 자기의 영국(領國) 형성에 노력하여(帝國領國政策), 황제임과 동시에 한 지역의 영방군주이기도 한 성격을 띠게 되어서, 중세 후기 황제의 자리가 선거에 의하여 전전하는 이른바 <도약선거(跳躍選擧)> 시대에는 제국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1세는 숙적(宿敵)인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작센공:재위 1139-80, 바이에른공:재위 1156-80)을 실각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으나, 제후들의 강력한 요구로 수봉강제(授封强制)의 원칙(몰수한 봉토는 1년 이내에 재수봉해야 한다)을 승인하여 신성로마제국은 결정적으로 봉건국가로 바뀌었다. 손자 프리드리히 2세도 2차례에 걸쳐서 국내 제후들에게 대폭 양보하여 제방(諸邦) 지배권 확립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슈타우펜왕조의 단절, 대공위시대를 거쳐서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 1세(재위 1273-91)가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그 뒤 제국에서는 선거왕제의 원리가 지배적이 되어서 제위(帝位)는 선제제후(選帝諸侯)의 이해에 따라서 합스부르크가·룩셈부르크가·비텔스바흐가(바이에른가) 사이를 전전했고(도약선거시대), 황제는 제국 전체의 이해보다도 한 지역의 영방군주로서 자기 가문의 이해를 중시하게 되어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하였다.
중세 말, 제위는 합스부르크가에 고정되어 제국의 멸망까지 이어졌지만, 30년전쟁(1618-48)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영방군주에게는 거의 독립국가의 국가주권에 가까운 자립성이 승인된 결과, 제국의 영방국가로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근세의 황제권은 완전히 명목뿐인 것으로 변하여 합스부르크가는 가령(家領)인 오스트리아와 남서독일의 일부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데 지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1세의 보호 아래 결성된 라인동맹에 가입한 남독일의 16영방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게 되자,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관(帝冠)을 사퇴함으로써 제국은 약 84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국의구성]
영방국가 (領邦國家 Territorialstaat)
중세 후기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이 해체(1806)되기까지 독일왕국 즉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했던 지방국가. 단순히 영방이라고도 한다. 30년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1648)은 근대의 신성로마제국의 국제(國制)를 결정한 것으로 그것에 따르면 제국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는 있었지만 300여개의 영방국가와 다수의 제국도시로 구성되며, 각구성원은 외교권을 포함하여 근대적 국가주권에 상당하는 자립적인 권리를 가질 것이 승인되었다. 이후 제국은 다수의 주권국가의 연합체에 불과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체제는 이를테면 영방국가의 완성형태이며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영방국가의 실체]
호엔촐레른왕가의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 비터스바흐왕가의 바이에른 등을 비롯하여 몇몇 세속대제후령, 쾰른·마인츠·트리어의 세 주교령과 뷔르츠부르크주교령과 같은 몇몇 성계(聖界) 대제후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방은 영토의 크기로 보나 통치기구면으로 보나 국가라고는 할 수 없는 가산적(家産的)인 약소하고 힘없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근세 전기의 유럽 여러 국가는 등족제(等族制:신분제)적 국제를 취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대영방 국가에서도 사정은 같았으며 영방 내부는 군주의 직할령과 등족의 영유토지로 나뉘어 있었다. 등족과 영방군주는 원래 봉건적 주종관계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족제국가의 단계가 되자 등족상호간의 횡적인 결합이 강화되고 영방의회(신분제의회)에 결집하여 군주에 대항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그래서 다투게 된 중심적인 쟁점은 과세(課稅)를 둘러싼 문제였고 군주는 영방의회의 승인없이 새로 과세할 수 없다는 원칙이 형성되었다. 그 밖에 군주 지위의 상속이나 결혼, 나아가서 전쟁이나 외교문제, 법의 개폐 같은 정치상의 중요사항도 영방의회의 심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근세 몇몇 대영방에서 등족의 여러 권리, 특히 영지 내의 영민에 대한 지배권을 공동화(空洞化)하고, 관료제적 통치조직을 영방의 전영토에 침투시키려는 노력이 성공하여 영방군주의 절대주의적인 지배가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프리드리히대왕 치하의 프로이센은 계몽적 절대주의국가의 전형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조]
작센왕조(王朝) (Sachsen dynasty, Liudolfing dynasty)
중세 독일왕국 최초의 왕조 (919-1024). 동프랑크의 카롤링거가(家)의 왕통이 단절된 뒤, 프랑켄의 콘라트 1세의 과도적 통치를 거쳐서 919년 작센공(公) 하인리히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됨으로써 창시되었다. 그의 아들 오토 2세(973-983 재위)는 부왕의 정책을 계승했으나 손자 오토 3세(983-1002 재위)는 이탈리아 문제에 관심을 보여 독일에 손실을 입혔다. 오토 1세(대제)·2세·3세로 직계상속되었는데, 오토 3세가 요절한 뒤 1세의 동생 손자인 하인리히 2세가 계승하여 1024년까지 계속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잘리에르왕조로 넘어갔다. 마자르인·노르만인 등 이민족의 침입을 격퇴하여 독일왕국의 안전을 확보하였고, 서쪽에서는 잠시 서프랑크왕국에 복속되어 있던 로트링겐(로렌)을 탈환하였다. 국내에서는 교회 세력과 결탁, 이른바 제국교회정책을 수행하고 여러 부족 대공(大公)의 독립을 억제하여 중세 독일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로마황제의 제관(帝冠)을 받았고, 독일·부르군트·이탈리아에 걸친 신성로마제국을 수립하여 교황권을 그 지배 아래 둠과 동시에 동쪽 슬라브지역에 대한 그리스도교 포교에도 강력한 지원을 하였다.
[왕조의 황제]
하인리히 1세 Heinrich I (876-936)
독일 작센왕조 초대 국왕 (919-936). 포조왕(捕鳥王)이라는 별명이 있다. 류돌핑거가의 작센대공 오토의 아들이며, 912년 아버지가 죽은 뒤 대공위를 이어받아 세력확장에 힘썼다. 프랑켄 출신의 초대 독일국왕 콘라트 1세는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어 프랑켄과 작센호족은 프리츨라에서 하인리히를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나 슈바벤대공 에베르하르트와 바이에른대공 아르눌프는 이를 승인하지 않아 아르눌프가 대립국왕에 선출되었다. 하인리히는 영내의 교회지배권을 대공에게 인정하는 등의 양보로 두 대공과 타협하여 전국적으로 그의 왕위를 승인받는 데 성공하였다. 대외적으로는 911년부터 서프랑켄왕국에 병합된 로트링겐을 도로 빼앗고 거듭하여 독일에 침입한 마자르인을 리아드 부근에서 쳐부수고, 엘베강 동쪽의 슬라브인도 정복하고, 동쪽 국경지대에 성채망을 설치,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교회지배권을 다시 대공으로부터 돌려받아 대공에 대한 왕권강화에 힘쓰는 등 작센왕조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오토 1세 Otto I (912-973)
작센왕조 제2대 독일 국왕(936-973), 초대 신성로마 황제(재위 962-973). 오토대제(Otto der Grosse)라고도 한다. 이 왕조의 창시자 하인리히 1세 뒤, 부왕(父王)의 지명과 여러 부족의 선거로 왕위에 올랐으나 국내에서는 부족 대공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강하였고 외적의 침입할 위협도 컸다. 오토는 북방에서는 슐레스비히의 마르크(邊境領)를 두고 데인족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동방에서는 작센의 동쪽 국경에 두 변경령을 설치해 게로와 헤르만빌룽을 마르크그라프(邊境伯)에 임명하여 원주민인 베네디족을 지배하도록 하였고 또 968년에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구를 신설하였으며, 그 밑에 많은 주교구를 두어 베네디인의 그리스도교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955년에는 마자르인의 침입을 아우크스부르크 근교 레히펠트에서 결정적으로 타파하여 그 위협을 근절시켰다. 서방에서는 로트링겐을 탈환하려는 프랑스왕의 기도를 좌절시켰을 뿐 아니라, 프랑스 국내의 정책분열에 조정자로 개입하는 등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국내에서는 로트링겐 대공 기젤베르트, 프랑켄 대공 에버하르트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트링겐 대공에는 사위인 콘라트, 슈바벤 대공에는 아들인 루돌프, 바이에른 대공에는 동생 하인리히와 혈연자를 배치하고, 작센과 프랑켄을 황제 직할지로 하여 왕권확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953-954년 루돌프가 콘라트와 손잡고 반란을 기도하게 되자, 이 정책의 한계를 깨닫고 교회세력과 제휴하여 세속 제후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동생인 마인츠 대주교 브룬에게 로트링겐 통치를 위촉한 것을 비롯하여 측근 성직자들을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으로 배치하고, 많은 영토와 특권을 부여해 국가통일의 지주로 삼았다. 이것을 제국교회정책이라고 하며, 작센왕조 및 초기 잘리에르왕조의 여러 왕들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나, 뒤에 서임권 다툼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토의 왕권확립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탈리아정책이었다. 951년 이탈리아왕의 미망인 아델하이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1차 원정을 감행한 뒤, 그녀와 결혼하여 랑고바르트왕의 칭호를 얻었으나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철병하였다. 961년 이탈리아 왕을 자칭하는 베렌가리오에 대한 교황 요한 12세의 구원요청을 받아 재차 이탈리아를 원정하고 이듬해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이다. 오토는 이 황제 자리를 비잔틴제국에서도 승인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외교교섭을 계속하여, 972년 비잔틴의 황녀 테오파노를 아들인 오토 2세의 왕비로 영입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오토는 학문과 예술 보호에도 힘써 <오토의 문예부흥>시대를 이루었는데, 이 일로 후세에서는 그를 <대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레히펠트 전투 (Schlacht auf dem Lechfeld)
남독일 다뉴브강 지류(支流) 레히강(江)의 중류인 아우크스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레히펠트에서 955년 1월 15일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가 헝가리인을 맞아 싸워 큰 승리를 얻은 전투. 헝가리인은 10세기에 들어와 독일에 대한 침입이 잦아 954년에도 침입했는데 이 때 슈바벤공(公) 루돌프와 로트링겐공 콘라트(모두 오토 1세의 아들)는 헝가리인의 위협으로 부제(父帝)에게 반역하고 헝가리인에게 협력했다. 955년의 헝가리인 침입 때는 그 공국(公國)을 빼앗긴 루돌프와 콘라트가 부왕과 연합하여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 콘라트는 전사했으나, 오토 1세는 슈바벤 및 로트링겐을 회복했으며, 이 승리로 962년에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을 받았다.
오토 2세 Otto II (955-983)
작센왕조 제3대 독일국왕(961-983), 신성로마 황제(967-983). 972년 비잔틴제국의 황녀 데오파노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부왕 오토 1세가 독일 통치를 이어받았다.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부족의 대공의 자립화를 억압하였고 보헤미아왕과 결탁한 바이에른 대공 하인리히 데어 첸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공의 지위를 박탈하는 한편 보헤미아왕으로 하여금 복종을 맹세하게 하였다. 덴마크왕 하랄드에게도 독일의 종주권을 승인하게 하였고, 로트링겐에 침입한 프랑스왕 로타르 2세를 쫓아내고 그곳을 확보하였다. 그후 이탈리아 경략(經略)으로 전환하여 남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과 이슬람의 세력을 일소하려 하였으나 크게 폐하고, 해로를 통해 로마로 피해 재원정을 기도하였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이탈리아에서 객사하였다.
오토 3세 Otto III (980-1002)
작센왕조 제4대 독일국왕(983-1002), 신성로마 황제(996-1002). 부왕(父王) 오토 2세가 죽은 뒤 3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모후가 죽은 뒤에는 조모 아델하이트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였다. 한때 일족인 바이에른 대공 하인리히데어 첸카가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994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996년에 제1회로마원정을 단행하여, 종형제 브루노를 그레고리우스 5세로 교황에 오르게 하였고, 그레고리우스 5세는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그는 모친으로부터 고전적 교양을 받은 일도 있어서 고대 로마제국 부흥을 꿈꾸고 이탈리아통치를 기도하였으나 젊은 나이로 병사하여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하인리히 2세 Heinrich II (973-1024)
독일 작센왕조 최후의 국왕(1002-1024). 작센왕조 제4대 국왕 오토 3세가 아들이 없어 재종형인 바이에른대공 하인리히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꾼 오토 3세의 유토피아적 정책에 대해 하인리히는 다시 독일 국내지배강화정책으로 되돌리고, 국내 제후의 독립화를 막아 왕권강화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폴란드 대공 볼레슬라프 1세의 확대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교도 류티츠인과 동맹하여 마이센 변경백(邊境伯) 영토의 상실을 막았고, 대내적으로는 밤베르크주교구를 신설하여 새로운 문화·종교중심지로 만들고 고르체수도원이 지도하는 교회개혁운동을 원조하여 교회를 왕권의 기둥으로 삼은 작센왕조의 제국교회정책을 더욱더 추진시켰다.
잘리어 왕조(王朝) (Salian dynasty)
독일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던 작센 왕조가 1024년에 단절된 후 프랑크족 계통의 잘리어족인 슈바벤의 콘라트가 독일 황제로 선출되면서 권력을 잡았다. 1027년 콘라트( 콘라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에 즉위하고 부르고뉴 왕국을 복속시켰으며 이탈리아에서 독일의 세력을 다시 확립했다. 그는 새로운 관리 계급, 즉 황제에 직속된 하급 귀족(ministeriale) 에게 의존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왕조의 황제]
콘라트 Konrad (?-955)
별칭은 Konrad der Rote. 로트링겐(로렌)의 공작(944-953). 독일의 왕들을 배출한 잘리어 왕조의 조상. 슈파이어와 보름스 주변에 비옥한 영지를 갖고 있던 프랑켄 지방 백작가문에서 태어났다. 왕 오토 1세 (뒤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도와, 봉신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으며 뒤에 로트링겐 공작령을 받았고(944) 오토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했다. 후에는 오토에게서 멀어져 오토의 아들인 슈바벤의 리우돌프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다. (953-954).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공작령을 잃었으나 프랑켄 지방의 땅과 자신의 봉신은 보유할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오토 편에 섰으며 헝가리의 대군(大軍)이 독일에 쳐들어오자 레흐펠트 전투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헝가리군은 이 전투에서 크게 격파당했으며 그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콘라트 2세 Konrad Ⅱ (990(?)-1039)
독일 잘리어왕조의 초대 독일국왕·신성로마황제(1024-1039). 시파이어백작 하인리히의 아들로 1024년 하인리히 2세의 죽음으로 작센왕조가 끊어진 뒤 오토 1세의 딸의 증손 콘라트 2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교회세력과 결속하여 부족대공(部族大公)의 자립화를 억누르는 등 전(前)왕조의 제국교회정책을 답습하였다. 또한 하급 봉신층(封臣層)의 책봉에 대한 세습권을 승인함으로써 봉건 대제후의 세력을 꺾고 공훈귀족층을 등용하여 왕의 영지 관리·운영을 맡도록 지명하는 등 잘리에르왕조 왕권의 기초를 강화하였으며, 슈바벤대공 에른스트의 반란도 진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3년 부르군트왕국을 합병하였고 폴란드의 혼란을 틈타 라우지츠를 탈환하였다.
하인리히 3세 Heinrich Ⅲ (1017-1056)
바이에른 공작(하인리히 6세, 1027-1041 재위), 슈바벤 공작(하인리히 1세, 1038-1045 재위), 독일 왕(1039-1056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1046-56 재위). 콘라트 2세의 아들. 11세기에 서방교회를 정화하려고 애쓴 클뤼니 개혁 운동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교황권을 지배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였다.
하인리히 4세 Heinrich Ⅳ (1050-1106)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8세, 1055-1061 재위), 독일 왕(1054-1106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1084-1105/06 재위) 속인의 성직 임명권 문제를 둘러싸고 힐데브란트(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오랫동안 싸우다가 결국 파문당하고, 카노사에서 굴욕적인 속죄 행위를 했다. (1077). 그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 콘라트와 하인리히(나중의 하인리히 5세)와 싸우면서 말년을 보냈다.
부왕 하인리히 3세가 죽은 뒤 6세 때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모후 아그네스가 섭정하여 국정을 다스렸다. 친정(親政)을 시작한 뒤 작센 경영을 추진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작센 귀족층은 노르트하임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한 뒤 밀라노대주교의 서임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서임권투쟁이 벌어져 1076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였다. 이로써 국내 귀족층의 배반이 생기자 하인리히는 이듬해 은밀히 이탈리아로 가서 카노사성 밖에서 교황에게 참회하여 사면되었으나 (카노사의 굴욕), 반국왕파 귀족들이 슈바벤대공 루돌프를 대립국왕으로 선출하여 독일 국내는 국왕지지파와 반국왕교황지지파로 갈라져 내란상태에 빠졌다. 그는 내란을 수습하고 교황을 로마에서 축출하였으나 1105년 아들 (하인리 5세)에 배신당해 뤼티히(리에주)로 도망쳐 재기를 도모하던 중 죽었다.
하인리히 5세 Heinrich Ⅴ (1086-1125)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군주, 독일 왕(1099~1125 재위), 신성로마제국 황제(1111-1125 재위). 제국에서 참된 평화를 회복했고, 플랑드르·보헤미아·헝가리·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가 교황과 벌인 성직 임명권 논쟁을 계속했다.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토리노의 베르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황제가 된 뒤, 하인리히의 형 콘라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1099년 1월 6일에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104년에 교황과 아버지가 충돌했을 때, 그는 바이에른 및 작센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대항했다. 교회 개혁의 추진자로서 기꺼이 교황과 타협하고자 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아버지를 포로로 잡아 강제로 퇴위시켰지만 (1105. 12. 31), 1106년 8월 7일에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자신의 왕위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호엔슈타우펜왕조 (Hohenstaufen dynasty)
슈타우펜왕조 (Staufer dynasty) 라고도 함. 신성로마제국을 지배한 독일의 왕조 (1138-1208, 1212-54).
신성로마제국 제3대 왕가(1138-1208, 1215-1254). 슈타우펜왕조라고도 한다. 독일 슈바벤의 호족 호엔슈타우펜가 가문은 프리드리히 폰 뷔렌에서 시작되는데, 그 아들 프리드리히가 성직서임권 투쟁에서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여 1079년 슈바벤공(公)에 임명되었고 하인리히 4세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가명(家名)은 프리드리히가 슈바벤에 축조한 슈타우펜성에서 유래한다. 장남 프리드리히 2세는 슈바벤을 계승하였고, 차남 콘라트 3세는 프랑켄공이 되었다. 1125년 국왕선거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작센의 로타르 3세에게 패하였으나, 38년 콘라트 3세가 왕위에 올라 호헨슈타우펜왕조가 시작되었다. 52년 콘라트 3세가 죽고, 조카 프리드리히 1세가 왕위를 계승,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에게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착실한 가령(家領) 경영으로 실력을 쌓아 중앙집권적인 봉건국가를 실현한 다음, 벨프가와 싸우면서도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이탈리아 경영을 둘러싸고 교황권력과의 항쟁을 계속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하였고, 시칠리아 왕녀와 결혼하여 94년 시칠리아왕위까지도 계승하였으나 요절하였다. 1215년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과 호엔슈타우펜가에 의하여 추대되어 독일국왕에 즉위, 프랑스와 우호조약을 맺고, 오토 4세를 무찔러 왕조를 재흥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50년 콘라트 4세가 독일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가 이탈리아 원정중에 죽자, 독일 국내는 영방 제후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대공위(大空位)시대에 돌입하였다. 그의 아들 콘라딘이 시칠리아 왕위회복에 실패, 처형됨으로써 68년 호엔슈타우펜왕조는 단절되었다.
[왕조의 황제]
콘라트 3세 Konrad Ⅲ (1093-1152)
호헨슈타우펜왕조의 초대 신성로마황제 (1138-1152). 슈바벤대공 프리드리히의 아들이며 1116년 이후 작센대공 로타르 3세가 국왕이 되었을 때 반대파는 콘라트 3세를 대립(對立)국왕으로 추대하였다. 로타르 3세는 37년 사망 때 벨프가의 하인리히오만공(傲慢公;바이에른·작센대공 겸임)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지나치게 강력한 국왕의 출현을 두려워한 제후들은 콘라트를 즉위시켰다. 그 결과 그는 치세 기간동안 벨프가와 대립, 어려움을 겪었다. 1138년 오만공으로부터 두 대공령(大公領)을 빼앗았으나, 42년 벨프가와 화해하고 오만공의 아들 하인리히사자공(獅子公)에게 작센대공령을 돌려주었다.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해 소아시아로 건너갔으나 병을 얻어 돌아오는 길에 조카 프리드리히 발바로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1122-1190)
신성로마 황제(1152-1190). "붉은 수염왕"이라고도 한다. 슈바벤공(公) 프리드리히의 아들로 작은아버지인 전황제 콘라트 3세의 지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우선 국내평화령을 발표하여 치안확립에 힘쓰고, 대립하던 벨펜가(家)의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바이에른을 양보하고 일단 화해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및 기타 후국을 신설하여 이들을 왕권에 직결하였으며, 덴마크·폴란드·헝가리를 굴복시킨 뒤, 부르군트 왕위를 얻어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6차례에 걸친 이탈리아원정에서 처음에는 롬바르디아 왕위에 올라 교황을 누르고 황제가 되었으나, 뒤에 교황과 대립하여 겔프당(黨)의 롬바르디아 여러 도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민하였다. 1180년 그 동안 원조를 거부한 하인리히 사자공을 추방하고 그 영토를 제후들에게 분배하였으며, 86년 아들 하인리히 6세를 위해 시칠리아왕국 상속권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국내평화유지책과 봉건적 중앙집권정책은 영방(領邦) 제후의 대두를 초래하여 왕권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제3차 십자군원정 도중 소아시아의 살레프강에서 익사하였다.
하인리히 6세 Heinrich Ⅵ (1165-1197)
신성로마 황제 (1190-1197) 시칠리아 왕(1194-1197) 시칠리아의 왕 루제로 2세의 유복녀 콘스탄차(콘스탄체) 1세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함으로써 자신과 왕조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독일의 왕위를 시칠리아처럼 세습화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가 죽은 뒤 바로 시칠리아의 왕이 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후에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는 1169년 6월 밤베르크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고, 그해 8월 아헨에서 왕위에 올랐다. 1186년 1월 밀라노에서 11세 연상인 콘스탄차와 결혼했다. 1189년 부활절에 프리드리히 1세가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하인리히가 제국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1189-90년에는 과거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이었던 사자왕 하인리히의 반란을 진압했다.
오토 4세 Otto Ⅳ (1175-1218)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198-1215). Otto von Braunschweig라고도 함. 일의 반(反)호엔슈타우펜파(派)에서 추대된 황제 후보자였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왕 2명과 경쟁한 끝에 결국 폐위당했다. 벨프 왕가 사람으로 브라운슈바이크의 하인리히와 헨리 2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왕인 외삼촌 리처드 1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190년 요크 백작, 1196년에는 푸아투 백작과 아키텐 공작이 되었다. 리처드와 존 왕은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싸우는 오토를 외교적·재정적으로 많이 도왔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황제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9월에 죽었을 때 그의 상속자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므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지지하는 독일의 여러 제후들은 프리드리히의 삼촌인 슈바벤의 필리프를 1198년 3월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이끌던 그들의 반대파는 그해 6월 오토를 왕으로 뽑았다.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Ⅱ (1194-1250)
신성로마황제(1215-50). 시칠리아 출생. 하인리히 6세의 아들로 그가 죽은 뒤 4세 때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121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하여 오토 4세의 대립(對立)국왕으로 추대되어, 독일로 가서 프랑스 왕의 원조를 얻어 오토를 물리치고 즉위하였다. 그 당시는 교황권 전성기로, 황제는 종교상 권리를 포기하고 맏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성속제후에게 특권을 부여해 영방(領邦)체재 발전을 촉진하였다. 27년 십자군원정을 중지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파문당하였으나, 이듬해 원정하여 예루살렘왕국을 수립하고 왕이 되었다. 귀국 후 자기 영토에 침입한 교황군과 싸웠으며 독일로 가서 교황의 사주를 받아 배반한 하인리히를 체포하고 둘째 아들 콘라트를 왕위에 앉혔다. 뒷날 겔프당(黨)의 롬바르디아 여러 도시를 정벌하여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켰으나, 리옹의 종교회의는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독일에 대립국왕을 세워 제권(帝權)이 실추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절대주의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문예를 장려하여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라 불렀다.
콘라트 4세 Konrad Ⅳ (1228-1254)
독일 왕(1237-1254). 시칠리아의 왕(1251-1254)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2번째 아내 브리엔의 이자벨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권리 덕분에 예루살렘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또한 1235년 아버지는 그에게 슈바벤 공작작위를 주었다.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1235) 이복형 하인리히 7세를 대신해 1237년 2월 빈에서 로마의 왕으로 뽑혔다. 12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자 콘라트는 마인츠의 대주교 지크프리트와 쾰른의 대주교 콘라트가 주도하여 독일 내에서 성장하던 교황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124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들에 대항한 성전을 선포했다. 1246년 8월 5일 콘라트는 프랑크푸르트 근처에서 대립왕 하인리히 라스페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도시와 바이에른의 오토 2세로부터 계속 지지를 받았다. 1246년 9월 1일에는 오토 2세의 딸 이자벨레와 결혼했다. 1250년 12월 13일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
콘라트 5세 Konrad Ⅴ (1252-1268)
콘라딘(Konradin)이라고도 함.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혈손. 슈바벤의 공작이며 로마의 왕이자 시칠리아의 왕위 계승권 주장자이다. 이탈리아의 반(反)교황파인 '기벨린'(황제파)의 주요인사로서 1267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나가 앙주의 샤를로부터 시칠리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황제 콘라트 4세의 아들이며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로서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권과 예루살렘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1258년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였던 그의 삼촌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의 왕위를 찬탈했다. 콘라딘은 슈바벤 공작령의 남아 있는 지역을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The House of Habsburg, The House of Austria)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베르너와 그의 매부인 라트보트 백작이 1020년에 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르가우(지금의 스위스)지방에 세운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 라트보트의 할아버지인 군트람은 이 가문의 조상 가운데 기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이다. 군트람은 아마도 950년에 독일의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과 동일인물인 듯하다.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에 의해 1273년 루돌프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교묘한 정책결혼으로 오스트리아공령(公領)을 가령(家領)으로 몰수하는 등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스위스독립전쟁에서는 패하였으나 동쪽으로는 가령을 더욱 넓혔고 루돌프 4세 때는 대특허장을 위조하여 대공(大公)이라 칭하였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된 뒤 합스부르크가는 사실상 황제 지위를 독점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혼인정책으로 에스파냐·부르군트를 합병하였고 손자 카를 5세 치하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을 이룩하였다. 1522년 카를 5세는 상속에 관한 브뤼셀협약에 의하여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의 가령과 황제위 계승권을 양도하고 26년 보헤미아·헝가리를 합병하였으나 독일의 종교개혁 및 분쟁으로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맺고 56년 스스로 퇴위하였다.
카를 5세의 장자 펠리페 2세가 반(反)종교개혁을 추진하여 에스파냐왕국은 전성기를 맞았으나 프랑스·영국에 이어 네덜란드와의 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분쟁과 상속다툼으로 페르디난트 2세 때는 30년전쟁으로 발전하여 국토가 황폐하여 졌으나, 가령에서는 레오폴트 1세가 전(全)헝가리를 확보하여 빈은 다뉴브제국의 중심이 되어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에스파냐계는 카를로스 2세에서 단절되고 에스파냐계승전쟁 후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에 따라 왕위는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오스트리아계의 카를 6세는 1713년 국사조서(國事詔書)를 발표하여 전가령 비(非)분할과 일괄상속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7년전쟁으로 슐레지엔을 잃었다. 한편 바이에른에서는 황제 카를 7세를 선출하였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45년 드레스덴화약이 성립되어 제위를 되찾고 남편 프란츠 1세와 장자 요제프 2세의 공동치하에서 계몽적인 국내개혁을 추진하였다. 요제프 2세는 관용령(寬容令)·농노해방령 등으로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뒤의 국제적 반동화 속에서 계몽군주 레오폴트 2세는 국내의 반동화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 라인동맹이 채결되어 16영방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게 되자,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관(帝冠)을 사퇴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은 사라졌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황제는 루돌프 1세(1273-91 재위)에서 필립 1세까지 이어졌다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로 나뉘어져진다. 에스파냐는 카를 5세 (1519-56 재위) 부터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 (1556-64재위)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왕가 전체의 역사가 신성로마제국의 단일역사가 아니라 유럽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근접하고 합스부르크왕가의 역사가 매우 길어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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