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화페의 기원 - 동전의 기원(유래)
동전이 발달하기 전에 거래는 물물교환으로 이뤄졌었다. 고대 이집트는 추후에 우리가 돈이라고 알게되는 것 없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얻는데 성공한 나라의 한 예로 자주 언급된다. 이집트가 고대 국가들 중 가장 풍부한 금 생산 국가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두개의 주된 지역은 북이집트와 누비아라는, 북위 26도와 23도 사이의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주로 퇴적한 침전지이다. 이 지역의 하천계는 금광석을 제공했는데, 처음에는 패닝(접시사금채취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고대 기술로 채집되는 사금의 형태였다. 고고학적인 증거가 지적하듯 이러한 금광석은 BC5000년 말에서 4000년 초 무렵에 이집트에서 출현했다. 얕은 수면 채취법은 누비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금광업은 점차 발전해 남아있는 자료에 따르면 광산이 노예 노동자에 의해 채굴되기에 이르렀다.
구리 역시 BC5000년 무렵부터 사용된 금속이다. 키프로스 섬은 대량의 매장물을 보유했고, 섬자체와 아프리카에 여전히 상당량이 잔재해 있다. 보다 단단한 금속인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 구리가 합금되기 시작한지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중해 지역의 후기 청동기 시대는 BC1600년 경으로 보여지며, 초기와 중기 청동기 시대에는 지중해를 둘러싼 다양한 민족간에 서로 그리 대단한 마찰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BC1800년 경 카슈인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의 거대 문명이었던 바빌로니아를 침략했고, 시리아에서 온 힉소스 침입자들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BC1600년 무렵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는 경제적인 대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레타 섬과 헬라스 섬이 후기 미노스 1세 시대이자 후기 헬라스 시대였던 이 시기는 이집트에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일부는 말 덕분인데, 이 말이라는 동물이 BC1800년 무렵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점차 말 다루는 데 익숙해진 이집트인들이 정복자들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고대의 고립을 단념한 채 일련의 복수전을 거쳐 아시아로 나아갔다. 말은 이때 경제적인 지표가 되기 시작했다. 말을 다루게 된 이집트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대상단을 보호하기 시작했는데, 이 대상단의 사람들과 상품들은 보다 느린 낙타나 당나귀로 운반됐다. 소위 ‘무장한 호위대’는 멀리 모험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과 교전한 후 평화조약이나 동맹을 맺고 거래하게 된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의 어려움이 극심해지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 쯤이다.
금을 가진 남방 민족들이 양과 소를 부의 기준으로 삼는 다른 민족들과 적극적으로 접선을 시도했다. ‘발달이 늦은 민족들의 자연적이고 확실한 가치 단위는 소나 젖소였다…반면에 북방민족들과 고지인들은 가축으로 평가했고, 이집트인이나 메소포타미아 민족들은 금, 은, 호박금(금과 은의 자연산 합금)과 청동을 사용했다. 이들은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천칭으로 무게 재는 법을 배우게 됐다.’
지중해 연안과 보다 먼 곳으로부터 온 다양한 민족들이 교류하기 시작했고, 소가 가치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교역을 어렵게 했다. 린넨과 염색한 양모, 반지와 금이나 호박금으로 만든 여러 물품들을 가진 이집트인과 유대인; 은과 가축을 가진 히타이트인과 구리 주형을 가진 키프로스인들은 소와 같은 물건으로 그들의 다양한 거래 방정식을 풀기위해 노력했다. 금속과 제조 물품은 나눌 수 있는 반면에 분명한 것은 소는 통째로 살아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가 저하된다. 이러한 불가분성 때문에 소는 금속의 양을 결정하는 표준이 되었다. 금 상응물은 정해진 무게(지금으로 보면 약 8.5g 정도)의 막대나 링 형태의 작은 덩어리가 됐다. 소 한 마리가 60파운드나 되는 무게의 주형과 맞먹기 때문에 구리로 거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단위를 탤런톤이라고 불렀는데, 구리나 청동 탤런트는 그 크기 때문에 무게가 작은 금 조각의 3천 배와 맞먹었다. 무거운 구리와 청동 탤런트들은 머리와 꼬리를 떼어낸 소가죽 모양을 띄기 시작했다. 금속자원 부족과 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이 가죽모양 탤런트는 나라마다 무게를 달리했다. 금속이 풍부한 키프로스의 한 단위는 37kg, 아케이온의 한 단위는 25.5kg으로 달랐다.
무게에 기초한 다른 방식들도 전개되었다. 바빌로니아에는 8.34g 무게의 금 셰켈과 30kg 무게의 빌투라는 기본 금속 단위가 있었다. 수학적 능력이 보다 뛰어난 이 곳 사람들은 마나라는 제 3의 무게 단위까지 사용했는데, 이 세가지 단위는 서로 다음과 같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1 셰켈(8.34g), 60 셰켈 = 1 마나(500.40g), 60 마나 = 1 빌투(30,024.00g).
니네베(아시리아의 수도)에서는 오리 형태의 돌덩이가 발견되었는데, 통치자의 이름 Dungi, 기원전 약 2472년이라는 연도나 ‘10 마나’의 가치 등과 같은 흥미로운 정보가 새겨져 있는 것도 있었다.
‘바빌론의 에리바마덕 왕궁, 30 마나’라고 새겨진 다른 돌덩이는 이 왕이 기원전 770년 정도까지 살았던 것을 감안할 때 상당기간 동안 이러한 단위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돌 오리들의 무게로 계산하면 약500g인 1마나가 된다. 이 사실은 계산 문제에 도움이 됐고, 기원전 대략 1000년에서 800년 사이에 그리스인과 아마도 아이오니아인까지도 그들 자신의 탤런트 무게를 ‘mna’라는 이름의 마나 단위에 맞춰 조정했다. 그들은 페니키아 상인과의 교역을 통해 우연히 마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그램(g) 단위는 아직까지 발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양한 단위들이 무게로 매겨진 숫자에 의해 균등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무게와 관련한 현대의 용어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차기 방식으로 바뀌었다.
동전이 여전히 발명되지 않았음에도 막대한 부의 축적이 이뤄졌다. 이집트의 왕과 상인들은 금으로 재산을 비축했고 따라서 보관할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신성한 목적 때문에 보호받을 사원이나 궁전의 보고보다 좋은 곳이 어딜까? 이런 장소들이 은행의 기원이다. 귀중품은 경비가 철저한 보물 창고인 단단한 건축물에 저장되었다. 수령과 반납 정보는 출납일과 보관인의 이름으로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이런 출납부는 종종 진흙평판에 씌어졌다. 크레타의 크노서스 대궁이 아서 에반스 경에 의해 발굴되었을 때 그러한 평판이 발견되었는데, 왕족 보물 창고에 소가죽모양 구리 탤런트를 보관한 기록이 있었다. 그 평판에는 탤런트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각 세 개의 수평획이 그어진 두 개의 수직선, 저울, 세 수평획이 그어진 수직선 하나, 두 획이 그어진 또다른 수직선, 위 아래로 배열된 두 개의 수직선(뒤집어진 S자 같은 두 개의 기호)와 사이가 넓은 두개의 수직선이 새겨져 있었다.
아서 경은 이러한 새김 기호를 등식으로 해석했다. 60개의 소가죽 주형(한 개가 10의 가치를 지닌 수평획 6개로 표현됨)은 저울로 무게를 재었을 때 52와 1/2 탤런트와 같음이 발견되었다. 52와 1/2이라는 값을 제시한 저울 오른편의 5개 수평획과 그 밖의 기호들은 그 탤런트들이 중량미달임을 의미했는데, 정확히 60 탤런트가 되어야 한 개가 1탤런트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탤런트들이 중량 미달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기록되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집트와 크레타의 보고는 왕가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상인들과 사무역업자들은 맡기거나 찾을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바빌론에서는 이런 일들이 한단계 진보해 있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보물보관소와 출납 기록을 독립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생각된다. 셈족들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더한 가능성을 보았고, 일개 개인들도 귀중품과 금을 안전하게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서비스에 요금이 부과되었는데, 여행에 의존하는 부유한 상인들은 누구든 재산을 지켜준 데 대한 보답으로 기꺼이 지불했다.
그 다음 명확한 단계가 곧 이어졌다. 현물 보안 대신, 자본이 더 필요한 상인은 담보물에 대해 동종의 금속으로 대출을 받았는데, 요금은 금속의 손실 위험에 따라 ‘은행업자’가 부과했다.
상인들은 곧 자신의 담보물을 저당잡고 있는 보고와 규격화된 장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은행과 대출 제도가 화폐제도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페키니아로, 다시 그리스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가지 무게측정과 측량법들, 금속과 사용된 다른 물건들의 다양한 형태들, 다양한 교역방법들이 점차적으로 출현했다. 무생물인 금속이나 공예품으로 생활물품과 동일한 값어치를 필요로 한다면 특히, 그 방식 자체로 사용하기 쉬운 통합된 제도는 당연히 없었다.
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을 때의 시장의 혼란이 한순간에 윤곽이 잡히듯 상상이 될 것이다. 모두들 인정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이 개발되었다.
그럼에도 동전의 발달은 지금과는 다르게 느렸고, 거의 2,700년 후에 하나의 화폐제도로 발전했다.
동전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물물교환에 사용된 다양한 금속 조각들을 봐왔다. 이들 중 가장 편리한 것은 크기나 무게가 나르기 쉽게 만들어진 금이나 호박금(동,니켈,아연 합금) 덩어리였다. 이제 왕이나 상인, 또는 일련의 통치자나 교역인을 위해 해야할 것은 그러한 ‘dumps(돈, 짤막하고 똥똥한 것)’에 통치자들이나 교역인들 사이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의 출처나 가치에 대한 보증 등을 표시하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서, 상인A가 상인B로부터 서로가 인정하는 특정 방식으로 표시된 금속 한 개를 받았다면, 상인A는 그 표시가 상인C에 의한 것으로 그가 승인한 표시이자 표기된 양만큼의 가치를 지닌 금속임을 보증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단순한 방법이 돈에 의한 교환에 있어서 전체 체계로 성장했고, 동전을 디자인하고 주조하는 것, 잘라내고 변조하는 것, 본래의 가치를 높이고 낮추는 것 둥 화폐제도의 모든 선과 악으로 자라났다.
동전에 표시하는 기술은 큰 어려움 없이 발전하게 되었다. 아이오니아 상인이 우연히 금 덩어리에 짧거나 부러진 못으로 새긴 표시로 특징짓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그 조각의 무게와 가치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다시 한번 그의 손을 거쳐 지날 때 무게를 다시 재지 않기 위해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했다. 그 아이디어를 누가 생각해냈건 간에, 현실화 됐었고, 그렇게 표시된 조각들이 유통되었다. 비교적 BC 665년 무렵의 고대에는 사용된 ‘돈’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표시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해, 돈들이 적당한 빈도로 표시자의 수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상인의 표시를 본 리디아의 왕이 그의 금에 왕실 옥쇄(인장)로 ‘coins(동전)’라고 표시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표시를 새기기 위해 망치 사용을 필요로 하는 방법과 바로 전에 설명한 간단한 방법, 두 가지 표시법 덕분에 화폐제도가 생겨났다.
'역사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인과 이스라엘 (0) | 2010.06.07 |
---|---|
합스부르크 가문 (0) | 2010.06.06 |
가문 콤플렉스로 몰락한 나폴레옹 (0) | 2010.06.06 |
유럽 왕족들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0) | 2010.06.06 |
면죄부의 실체 (0) | 2010.06.06 |
알렉산더대왕 (Alexander)의 동방원정 (0) | 2010.06.06 |
민족의 이동 역사 (0) | 2010.06.06 |
로마의 군대 - 시대순 정리 (0) | 2010.05.31 |
로마사 정리 (로마 역사 대략 정리한 것) (0) | 2010.05.31 |
로마시대 연표 (서로마 재국 기준) (0) | 2010.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