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로마의 군대 - 시대순 정리

올드코난 2010. 5. 3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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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마(기원전 220년 경)의 군대 (내용출처 : [기타] 누리집 네이버 지식인 오픈사전 ) 

육군조직과 전법

로마의 안보와 안전은 시민군에게 달려 있었다. 17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성한 성인 남성들은 군에서 복무해야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는데 47세 이상의 군인들은 수비대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기원전 220년 경 로마의 병력동원수는 총인구 375만여 명에서 대략 75만여 명 정도 되었다. 로마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전쟁에 익숙한 베테랑( veteran )들은 언제나 넘쳐났다.

로마의 군사적인 성공에는 크게 네가지의 이유가 있다. 자부심과 애국시민정신으로 무장된 시민군이 첫번째 이유이고 레기온( legion )의 발달도 이유의 하나로 뽑을 수 있다. 또한 엄격한 훈련과 수많은 전쟁경험으로 다듬어진 명령체계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과감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결단성도 한몫을 했다. 그외 패배한 적들마저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정치력과 적재적소에 만들었던 동맹과 식민지 역시 로마의 패권을 유지시키고 성장시키는 버팀목이 되었다.

레기온의 탄생은 전설적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Servius Tullius )의 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많은 개조와 변형이 마르쿠스 카밀루스( Marcus Camillus )에 의해 이뤄졌는데 그 요는 레기온 내 재산과 무장의 정도에 따른 분류와 편성이 아닌 나이와 경험에 따른 분류와 편성이었다. 또한 군인 개개인의 무장은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장비와 무기는 국가로부터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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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3세기 무렵까지 일정한 전략전술만을 애용했지만 이탈리아 중부의 산악민족인 Samnite들과의 전쟁경험에서 보다 다양한 적들과의 결전을 대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300년 경에 이르러 로마는 cellular type의 레기온을 편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레기온은 피로스(Pyrrhus) Macedonian-Epirote 팔랑크스( Phalanx )와 일이차 포에니( Punic ) 전쟁 때 카르타고( Carthage )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운용되었다. 3세기 후반 동안 레기온의 발전은 그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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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군대에는 경험과 연령에 따라 네개의 계급이 있었다. 가장 젊고 민첩하며 훈련을 적게 받고 경험도 적은 군인들을 velite 혹은 경장보병이라 불렀다. 경험과 나이, 민첩성에서 velite에 이은 군인들은 hastati라 불렸으며 이들은 중장을 하고 레기온의 선두에 섰다. 평균연령 30에 레기온의 주력이자 숙련된 베테랑인 principes는 레기온의 두번째 라인을 이루었다. 가장 나이가 많고 침착한 triarii는 레기온의 후미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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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초적인 전략적 군단위는 현대의 중대( company )와 비슷한 maniple이었다. maniple은 두개의 century( 소대, platoon )로 이뤄져 있었는데 century에는 60에서 80명 까지의 인원이 있었다. 다만 triarii maniple에는 한개의 century만이 있었다. 현대의 대대( battalion )과 견줄 수 있는 cohort에는 450에서 570명 까지의 인원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120~160명의 velite와 같은 수의 hastati principes, 60~80명의 triarii 그리고 하나의 turma( 기병의 군단위, 열명을 decuriae로 묶었는데 decuriae가 셋이면 turma가 됨으로 turma는 기병 30명임 )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병들의 경우에는 이 maniple안에서 싸우기 보다는 더큰 기병들의 진형에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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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단( division )과 비견되는 레기온에는 300명의 기병을 포함한 4,500에서 5,000명의 군인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로마의 레기온과는 다른 동맹군의 레기온도 있었는데 조직은 로마의 것과 동일했지만 기병은 60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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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까지 합하여 군단( army corps )라고 할 수 있는 전체 레기온에는 구천에서 만명의 인원이 있었으며 그중 구백명 정도는 기병이었다. 두개의 로마 레기온과 동맹군 레기온은 하나의 야전군 ( field army )를 이루었으며 이 군대를 consular army라고 불렀다. 로마의 두 집정관(consul) 중 한명이 지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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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ular army
의 인원은 18,00~20,000 사이였으며 열의 길이는 2.5km 정도였다. 가끔씩 두개의 consular army가 서로 합치기도 했는데 이럴때는 집정관들이 서로의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로마는 평상시 8개의 표준레기온( 로마와 동맹시들이 각각 4개씩 )을 보유했지만 전시상황이나 국가위기상황에서는 군단을 증강시켰다. 이럴때 로마에는 임기 6개월의 dictator를 선출하여 군권을 그에게 맡겼다. 아무래도 여러명의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것보다 한명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dictator가 선출되든 안되든 로마에는 항상 전직집정관( proconsul )의 지휘를 받는 예비군이 있었다. 이 전직집정관들은 원로원( senate )이나 praetor( 뭔지 알것으로 믿습니다. Consul이나 proconsul이나 praetor나 죄다 집정괸이라고 번역해놓은 1996년판 동아 프라임 영어사전은 물러가라~! )에게 권한을 받아 군대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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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은 군사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국가의 최고공직자였다. 하지만 모든 지도자라고 반드시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평범한 전략전술이 뛰어난 전략전술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집정관은 일년마다 한번씩 바뀜으로 집정관이 군대를 지휘할때가 장기간의 전쟁기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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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이나 진직집정관 밑에는 quaestor라는 공직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회계를 감찰하거나 군대의 행정, 보급 등을 담당하는 직무를 맡았다. 그외 6명의 호민관이 있었는데 두명씩 하나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특수한 경우에는 여섯명의 호민관들이 돌아가면서 레기온의 지휘를 맡았는데 전체지휘관이 부재중일 때는 호민관이 레기온의 전체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두 호민관은 60명의 백부장( centurion )과 두개의 maniple을 각각 휘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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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온( legion )의 유연성은 maniple들 사이에 전략적인 관계와 보병들 사이의 진열에 그 비결이 있었다. 각각의 maniple들은 작은 팔랑크스( phalanx )와도 같았는데 군인들은 20명 씩 6줄로 늘어서 팔랑크스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지만 그들 사이의 간격은 팔랑크스보다 더 넓었다. 군인 일인이 차지하는 면적은 대략 1.5㎡ 정도 되었다. 또한 maniple 사이의 간격은 대략 20m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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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레기온의 장기판 모양의 포메이션은 팔랑크스보다 더큰 이점이 있었다. 험한 지형에서도 기동성이 높았으며 열이 무너져도 충분히 커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에 틈이 생기면 두번째 열의 병사가 앞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첫줄의 병사가 뒤로 갈수도 있었다. 즉 전체적인 생김새는 팔랑크스와 비슷했지만 유연성이나 기동성 면에서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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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tati
principes 2m 정도 되는 투창과 검신이 넓은 60cm 정도의 짧은 검( gladius )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투창은 적과 접전 직전 던졌으며 검은 백병전에 쓰였다. 이런 전략은 아마 현대전에서 라이플을 쏜뒤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Triarii의 경우에는 검 외에 3.5m 가량의 창도 휴대하고 있었다. Velites는 투창과 다트로 무장하였다. 로마의 군대는 백병전이 주 목적이었지만 원거리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발레아레스의 투석기병( Balearic slinger )이나 에게해( Aegean Sea )에서 궁수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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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um
이란 이름의 로마 투창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무기였다. Pilum의 촉과 자루 사이는 가느다란 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번 pilum이 던져지면 촉은 휘거나 부러지고 그렇게 되면 적이 재활용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촉은 적의 방패와 갑옷, 피부 속에 그대로 남아 적에게 불편을 끼치는데 한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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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공비결 중 하나에는 castrametation도 있었다. 작전 중 로마군은 밤마다 요새화된 진지를 만들었다. 이 진지는 상당히 견고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수도 로마나 아군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던지 상관없이 안전한 기지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안전했기에 심신도 비교적 안정되어 전력전술을 짜는데 유리했다. 진지를 만드는데 그리 긴 시간은 소요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의 병사들이 수많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건설과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었고 또한 역할분담도 꽤 잘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지건설용 장비들은 군대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진지 주변에는 도랑이 포위하듯 파여졌는데 이때 퍼낸 흙은 말뚝을 세울때 지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진지 내에서의 군대의 배치는 전투 때의 진열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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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중 군인 일인이 져야하는 군수품의 무게는 대략 20~40kg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행군은 빨랐다. 놀랍게도 로마군에게는 특별히 고정된 배치도가 없었다. 이것은 행군 중의 정찰이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였고 결국 한니발 (Hannibal )에게 호된 댓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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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다른 약점은 공성술이었다. 공성술에 탁월했던 마케도니아에 비해서 로마군은 포위하거나 소모전으로 적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것이 최고였다. 하지만 포에니( Punic ) 전쟁을 통해 로마의 공성술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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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조직과 전법


로마인들은 해상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박과 선원들의 공급은 동맹국들이나 속주민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 Magna Graecia )의 그리스인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이렇듯 해군에 약한 로마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해상전술로는 이기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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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해군사의 큰 발전은 일차 포에니 전쟁에 의해서였다. 전쟁에서의 가장 큰 고민은 카르타고( Carthage )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빈약한 해군력이었는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먼저 카르타고의 오단층 갤리( galley ) quinquireme을 모방한 전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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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라면 몰라도 육상전에서는 자신있어 하는 로마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상전을 육상전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이 바로 까마귀라는 뜻의 corvus의 발명이었다. Corvus 5~6m 정도의 일종의 다리로 뱃머리 위에 회전축(pivot)을 설치하여 360도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평상시에는 밧줄이나 도르래에 의해 거의 수직으로 놓여 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오면 적의 갑판에 끝에 달린 까마귀 부리같이 생긴 창( 그래서 이름이 " 까마귀 "였음 )이 떨어져 내리꽂혀 그대로 로마군선과 적선 사이의 다리를 놓게 되는 장치였다. 그외 뱃머리나 고물 쪽에 설치한 작은 탑( turret )으로 투척용 무기를 사용하여 적선의 병사와 선원들을 상대하는 기술이 쓰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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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조된 로마의 전함들은 어떻게 보면 비밀무기였다. 이 전함들이 모두 건조될 때까지 로마인들은 전투는 되도록 피하면서 결국에는 Mylae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예상치 못한 승리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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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에도 역시 castrametation이 적용되었다. 고대의 함대는 현대와 같은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밤이 되면 해안가에서 해병들과 노 젖는 사람들의 진지를 만들고 사람과 선박들을 보호했다.

 

2.로마(기원전 50년 경)의 군대

 

포에니 전쟁 이후의 정세변화와 세력의 재편은 로마의 군체제에도 변화를 주었다. 로마의 군인이 되는 자격은 일정량의 재산을 보유해야만 가질 수 있었다. 이 시대 재산의 척도는 곧 토지였으니 일정한 넓이의 토지를 보유해야만 군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해외출병이 많아지면서 군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 귀환했을 때 토지가 황폐화되는 일이 잦았고 그럴 경우 그 토지를 싼값에 팔아넘겨 무산자가 되어 로마에 들어와 식량을 배급받는 길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계층간 위화감이 생기며 또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징집 가능한 군인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패권국가가 된 로마로서는 자뭇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존의 병력수에 맞추기 위해 징집자격을 낮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군대의 질을 떨어뜨리는 또다른 문제를 낳았다.
로마의 군대는 시민이 중심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분위기는 군대에도 영향을 끼친다. 빈부격차와 계층간의 위화감은 그대로 군간부들과 일반병사들 사이에서도 들어났고 이것은 여태껏 무적의 로마군을 지탱해주던 정신이 깨어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나 나찬가지였다. 그 결과는 곧 전장 곳곳에서 들어났다.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위해 로마로서는 혁신이 필요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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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Marius )의 개혁


아라우시오( Arausio )의 비극은 시민중심의 군대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마리우스로 하여금 현실에 맞게 군제를 개편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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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있는 동안 새롭게 군조직을 개편했고 이 체제는 서력이 시작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카이사르( Caesar ) 역시 몇번의 개혁과 변화를 단행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가 태어날 때 마리우스가 만들어놓은 체제를 모델로 하고있다. 마리우스는 토종 로마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여러 군사적인 업적을 통해 그 자리에 이른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군사적인 능력에 비해 정치적인 관록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단행한 군사개혁은 그의 이름을 후세에 떨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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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개혁으로 군대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라던지 혹은 나이와 경험에 따른 hastati, principes, triarii 등의 구별도 명칭만을 남겨두고 모두 사라졌다. 이것은 로마의 군사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던 유연성을 대폭 강화시켜 주었고 기동성과 필요할 때 지원병력을 빨리 공수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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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군율과 규정은 마리우스의 동료인 푸블리우스 루푸스( Publius Rufus )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후일 술라( Sulla )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카이사르의 시대까지도 상당히 효율적인 규정이었다. 전문군인의 개념이 로마군대에게 도입됨에 따라 시민의 의무라는 개념 또한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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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레기온( Legion )


레기온이 팔랑크스( phalanx )보다 유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팔랑크스는 전체가 하나로 묶인만큼 개개인의 활동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비해 레기온은 소규모 팔랑크스라고 할 수 있는 maniple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동하여 조직적인 전략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활동을 얼마나 제한하느냐에 따라 유연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리우스는 기존의 레기온 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maniple 대신 cohort를 더욱 중요시했다. Maniple은 명령체계에서나 간신히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로 전락했지만 열개의 cohort가 하나의 레기온을 이루는 것은 그대로였다.

Cohort
50명씩 8에서 10열을 유지했으며 기동력을 요구하는 작전이나 투창을 던지기 위한 밀집대형을 만들 때는 각 병사들 간에 1m의 간격이 있었다. 가끔씩 백병전에도 밀집대형을 쓸 때가 있었다. 산개대형에는 1.5~2m의 간격을 만들었으며 전투 중에도 왠만해서는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밀집에서 산개대형으로 대열을 바꿀 때는 cohort들 사이에 거리를 전과 같이 유지해야 했다.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그냥 maniple 대신 cohort가 장기판 모양의 진형을 만들어 변화된 진열을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을테지만 이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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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hort
는 행군 중 4~5열로 행진했는데 이들은 좌우로의 전환이 매우 빨랐다. 이것은 측면공격에 불리한 보병밀집대형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레기온의 방향전환은 현대전에서 close-order drill, 혹은 다이아몬드 포메이션(diamond formation)과 비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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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레기온의 모양은 네개의 cohort가 제일 앞에 서고 세개씩 두번째와 세번째 라인에 서는 것이다. 즉 앞에 네개의 cohort가 서므로써 cohort들 사이에 세개의 틈이 생기고 그 틈을 뒤의 세개의 cohort들이 막아주는 형세였다. 라인이 두개일 경우에는 각 라인에 다섯개의 cohort가 배치되었다. 가끔씩 희귀하게 라인을 하나만 이루는 경우도 있었고 더욱 희귀하게는 네개의 라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Cohort의 폭과 cohort들 사이의 간격은 30~50m로 동일했다. 즉 세라인일 경우 레기온의 폭은 대략 300m가 된다는 뜻이다. 라인들 사이의 거리는 50m인데 라인이 셋일 경우 레기온의 길이는 150m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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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군은 평균 4,500명이 속해있는 8개의 레기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레기온이 세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을 경우 군대의 폭은 2.5km가 되었다. 계산해보면 군대의 폭을 1m씩 나눴을 때 첫 라인에는 평균 13명이 있는 것이다. 많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평균 25명이 밀집해 있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보다는 낳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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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온의 주요 방어진은 line, square, circle이 있었다. Line은 주로 수성전이나 진지방어전에 쓰이는 진형으로서 10개의 cohort가 참호나 벽 뒤에서 쭉 늘어서는 것이다. Square는 평지에서 적에게 측면이나 주위를 완전히 포위당했을 때 진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되도록 아군의 지원이 있을 때까지 오래 버티도록 고안된 진형으로서 세 라인인 레기온에서 쉽게 변형이 가능하였다. 이 진형은 10개의 cohort 7개가 이동하여 각각 3개의 cohort가 앞과 뒤를 맡고 두개가 측면을 방어하는 것이다. Circle은 기병으로부터 진열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변칙진이었다. 만약 레기온의 측면이 아군기병이나 기타 보조병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을 경우 기병의 돌격은 오히려 로마군에게 새로운 사냥감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팔랑크스에서도 어느정도 통하지만 방진으로의 정면돌격은 기병들을 상당히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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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온의 상징은 은독수리였다. 원래 레기온 마다 상징이 달랐지만 마리우스는 이들을 모두 하나로 통합시켰다. Cohort maniple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부대기의 역할을 했다. 이 기들을 사용하여 부대끼리의 구별과 편성이 가능했다.

경장 보병

작지만 빼놓을 수 없는 레기온( legion )의 주요병종은 열명의 정찰병( speculatores )이었다. 열명을 묶어서 정찰대가 된다. 여러 레기온의 정찰대가 합쳐 다함께 정찰임무를 수행할 때도 있었다.

경장병력, 혹은 보조병( auxiliary )들은 레기온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따로이 cohort와 비슷한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의 벨리테스( velites )처럼 레기온의 앞과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따로 레기온을 이루지는 않았고 또한 임무도 불규칙적이었다. 전통적으로 Cisalpine 갈리아( Gaul )의 리구리아( Liguria ) 출신의 경장보병들이 유명했다. 또한 투석기병( slinger )과 궁수들은 발레아레스 제도( Balearic Island )와 크레타( Crete ) 및 다른 에게( Aegean )지방에서 주로 공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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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마리우스( Marius )의 개혁으로 기사( equites 혹은 그냥 knight라고 쓸때도 있음. 중세의 기사는 아님 )나 귀족으로 이루어지던 기병체제는 사라졌다. 대신 동맹국이나 용병에 대한 기병의존도가 높아졌다. 마리우스의 시대 기병의 주공급처는 트라키아( Thrace )와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지방이었다. 카이사르( Caesar )의 경우 기병의 거의 전부를 갈리아나 게르만 용병들 혹은 동맹국들에 의존했다.

자연적으로 기병의 조직력과 훈련은 전보다 덜 엄격해졌다. 마리우스는 이러한 기병에도 손을 댔는데 기존의 30명이던 turma 32명으로 개편했으며 지금의 하사관 정도 되는 데쿠리온( decurion )의 지휘하에 전투 중에는 4열을 짓도록 했다. 12개의 turma는 대대( squadron )라고 할 수 있는 ala( 날개라는 뜻 )로 묶였으며 대대장( tribune )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장교가 지휘했다. 레기온의 cohort와 비슷하게 turma들은 ala 내에서 장기판 모양의 진형을 이뤘으며 두세개의 라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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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병( legionary )


레기온의 병사들은 주로 이탈리아의 농민이나 계급이 낮은 도시주민이었다. 카이사르의 시대에는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시민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만으로는 군대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래서 속주나 혹은 " 야만인 "들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들은 따로 레기온을 형성하기도 하고 이탈리아인들과 섞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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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개혁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효과 역시 나타났는데 그것은 군대의 사병화였다. 군인이 의무가 아닌 직업이 되면서 직접 일당을 줄 수 있는( 당시의 일용직 일당과 비슷함, 11 cent ) 장군을 국가 자체보다 더욱 섬기게 되는 것이다. 지휘관( 장군 )은 전리품과 약탈품을 분배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퇴역병에게는 퇴역금( 주로 토지 )을 줄 수 있었다. 물론 퇴역금의 분배는 원로원의 권한이었지만 군대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장군들을 거스르지 않기위해 대부분의 경우에는 장군의 뜻대로 따랐다. 이러한 병사들의 성향은 야만인( 갈리아와 게르만족 )들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을 했다. 아라우시오( Arausio )의 참패 이후 마리우스같은 유명한 장군들이 크게 활약하면서 야만인을 물리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지휘관에 대한 의지도가 높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충성의 대상이 국가에서 마리우스, 술라( Sulla ), 카이사르같은 장군들로 바뀐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 이들 군인정치가들의 치세에서 로마는 더욱 성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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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체계와 군행정


개혁 이전 시민중심의 병제에서는 백부장( centurion ), 대대장( tribune ), 참모 장교 등이 군대가 소집될 때마다 임명되어 위치를 배정받았다. 백부장은 정규계급이 아니었고 백인대( century ) 내에서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직급이었다. 군대의 전문화와 함께 군행정권은 두개의 계급으로 나눠졌다. 백부장은 여전히 백인대 내의 병사 중에서 선발되었지만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계속 백부장을 맡을 수 있을 뿐더러 군대 내 승진도 가능했다. 그들 중 현대로 치면 위관급 이상 승진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지만 이러한 primipilus( 백부장 출신의 장교 ) 중에는 독수리기를 들고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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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 tribune )급 이상의 장교들은 귀족들이었다. 백부장과 대대장의 관계는 현대로 치면 위관과 하사관의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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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 레기온의 지휘는 여섯명의 대대장이 돌아가면서 맡고 cohort는 전임백부장( primipilus )이 지휘했다. 하지만 대대장들이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legate의 참모 장교로 지휘하면서 cohort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휘하의 legate들의 임기를 종신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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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imperator )은 전처럼 군대의 병참과 행정을 책임지는 quaestor의 보좌를 받았다. 그외 젊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지원참모( comites praetori )도 보좌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장군과 참모부( praetorium )를 보호하기 위해 숙련되고 신뢰받는 군단병들이 호위대( cohors praetorians )를 맡았다. 이 호위대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Scipio Aemilianus )에 의해 누만티아 분쟁( Numantian campaign )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또한 제정 로마의 유명한 근위대( Praetorian Guards )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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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이러한 군행정은 엘리트들을 생산해냄과 동시에 경험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급간의 교류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군제개혁에도 바뀌지 않은 전통적인 소조직 편성은 아직은 그 효율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도들은 지방과 중앙의 교통과 교류, 경제와 군사적 동향을 살피거나 조종할 수 있는 효용성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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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중의 레기온


현대군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은 행군 중 군대의 주위를 경호하는데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 원인은 아마 이탈리아 반도 내에 머물던 과거와는 달리 해외출병이 늘어나면서 기습 등의 위협이 많아졌고 포에니 전쟁 중 트라시메누스 전투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한 레기온은 보통 500~550 mules의 짐을 지니고 다녔다. 짐은 주로 가죽천막 식량, ballista catapult 등의 무기들이었다. 이런 짐들은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위험한 적지 등을 지날 때는 짐들을 가운데 배치하고 사각을 이루며 행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지대가 넓고 평평하다면 모든 짐들을 한가운데 모으고 전군대가 정사각진으로 진군했다
.

전시가 아니면 갑옷은 그냥 짐에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마리우스( Marius )는 짐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갑옷은 군단병들이 스스로 가지고 다니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또한 15~20kg의 개인장비, 15일치 식량도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이것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갈래진 막대기를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이 막대기는 Marius' mule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

기존의 castrametation은 계속 되었지만 카이사르에 의해 더 발전된 형태가 되었다. 보통은 모서리부분을 방어의 용이를 위해 다소 둥글게 만든 사각형모양의 진지를 구축했지만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는 주로 식수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가 주위에 만들었다. 진지구축에는 도랑파기, 목책세우기, 길닥기( 진지내 ), 천막세우기 등이 포함되는데 모든 작업이 끝나는데는 대략 세네시간이 걸렸다 적지에서는 삼분의 일에서 절반에 이르는 병사들이 보초를 서야하기 때문에 진지구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법

전략상 당연한 것이지만 로마는 전쟁 중 적보다 높은 지대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고지에서는 적보다 투척무기 사용의 가거리가 늘어나는데다 돌진할 때의 충격효과와 함께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약간이지만 창검을 휘두르는 것이 저지의 병사들보다 더 편했다. 카이사르는 항상은 아니지만 주로 그의 정예들로 이뤄진 코호르트( cohort )들을 고지에서 저지로 돌격할 때 앞세워 첫충돌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작전을 즐겼다.

투척무기와 경장병력의 전초전이 끝나면 주력부대의 충돌이 그 다음으로 이어졌다. 레기온은 전진하거나 적이 대략 20m 정도까지 다가올 동안 기다렸다 첫 두줄의 병사들이 투창을 던졌다. 투창투척 순간 레기온은 산개대형으로 바뀌며 반팔랑크스( semiphalangial ) 상태가 된다. 물론 투창의 투척이 늦어지면 진형의 변형도 늦어졌다
.

이러한 방어적인 진법이 항상 이런 순서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 체력적인 우위에 있는 방어군이 적의 주력본대가 다가오는 중 갑자기 돌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첫 라인의 병사들( 앞의 8~10 )은 사납게 적의 대열로 뛰어들었고 투창투척이 전문인 첫 두줄의 병사들은 이미 창을 던졌기 때문에 검만으로 싸웠다. 이러한 선제공격 후 뒤의 열은 투창을 아군의 머리 위를 넘겨 던진 뒤 싸움에 동참했다. 맨 뒤의 열은 진열의 측면과 배후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경장병력들에게 계속 투창을 공급받아 투척했다. 이 경장병들은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투창과 다트( dart )를 찾아내 투척병들에게 공급하는 역할도 있었다
.

만약 첫 라인이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던가 충돌의 효과를 내지 못하면 두번째 라인이 다가와서 첫 라인에 진열 중인 병사들의 사이로 지나가 전투에 참여했고 그러는 사이 첫 라인의 병사들은 일시후퇴하여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전투가 길어지면 예비대로 남아있던 세번째 라인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전투 중에 열의 위치가 바뀌는 것은 예사였다. 하지만 경직되었던 그리스의 팔랑크스( phalanx )와는 달리 이런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로마군이었기 때문에 야만인들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이점이었다. 또한 소규모의 군대로도 뛰어난 지도자만 있다면 훨씬 많은 야만족의 군대를 상대해도 밀림이 없었다
.

장시간 전투에서도 승리한 군대의 사상자는 가벼운데 비해 패배한 군대는 비극적이라 할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스쿠툼( scutum )이라 불리는 커다란 안쪽으로 휜 사각형의 방패는 고대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패였다. 이 스쿠툼과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로 완전무장된 군단병들의 조직적인 진형은 적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열이 붕괴되거나 측면이나 배후를 기습당하면 진형은 공격에 무력하게 된다. 공격을 받고 붕괴된 진열이 다시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승리한 군대에게는 부상자의 숫자가 전사자보다 세배에서 열배에 달했다. 패배한 군대의 부상자들은 적의 동정이 없는한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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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발사기구의 사용량은 증가했다. 카이사르의 시대에 각 레기온은 열명의 담당자가 담당하는 catapult ballista 30개 가지고 있었다. 이 발사기구들은 주로 공성전, 야전진지방어, 도하작전 때 쓰였다. 이런 방어적인 목적 이외에도 필리포스( Phillip )나 알렉산드로스( Alexander )처럼 평지에서의 전장에 쓰이기도 했는데 그 목적은 보병밀집대형에 원거리에서 묵직한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화살은 따끔한 바늘, 발사기구들은 강력한 핵펀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3.로마(서기 300년까지)의 군대

 

로마가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패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적마저도 받아들이는 감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제국으로된 뒤 350여년간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것은 정상적인 전개의 결과였고 어떤 것은 내부의 분열과 긴장의 결과였으며 적에 의한 변화도 있었다. 로마가 수백년간 패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문제에 대해 실용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를 좋아했던 로마인들의 성격 덕분이었다.

로마인들은 전통을 중요시했지만 전통의 노예는 아니었으며 군사적 변화의 적응에 대해서 상당한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원전 50년 경에서 서기 300년 경까지 부가적인 요소 외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로마의 성향이 완고하게 변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한 어떻게 보면 그동안의 과학의 발전이 그만큼 뒤따라주지 않았거나 혹은 공화국시절부터 이어진 군사적 전통이 그만큼 유용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의 군사정책

아우구스투스는 어느 후계자도 더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군사정책의 근본을 쌓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군사적인 안정만큼이나 중요시 여겼다. 그의 시대 제국은 광대해져 수백명의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며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비춰졌고 무장한 군대는 최전방의 방어나 내부안정에만 이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경제에 되도록이면 적은 부담을 주기위해 되도록 군대는 작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조직력과 기술에 의해 군대는 소규모가 되었지만 효과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30만여명의 군대는 대략 오천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제국의 인구와 주변의 적들에 비해 적은 것같지만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를 지켜나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경제와 군사의 상관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소규모의 정예군이 대규모의 보통군대보다 cost effective하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거의 예외가 없던 그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최전방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숫자의 차이정도는 로마군대의 능력안이라고 믿으며 불필요하게 비싸고 비효율적인 증강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외압이 커짐에 따라 상비군의 숫자도 불어났지만 3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로마군의 숫자는 다른 시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군사경제정책은 제국으로 하여금 예산이 많이 드는 중앙예비군의 유지를 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여명의 근위대( Praetorian Guard, 보통 근위대라고 하면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보디가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로마의 근위대는 내부안정을 주목적으로 하였음 )를 제외하고 제국의 모든 무장한 군대는 전선마다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한 전선이 위험에 처하면 다른 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어 그 지역에 투입하였다. 로마는 예비군은 없다시피 했지만 전선 배후의 속주들마다 잘 정비된 도로망들은 예비군을 대신하는 든든한 지원군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레기온( legion )

아우구스투스는 레기온의 크기를 육천명으로 표준화하고 기존의 열개의 코호르트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중 첫번째와 열번째 코호르트는 천명이었고 나머지 8개는 오백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군단을 편성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지휘권의 배치는 카이사르( Caesar ) 때와 거의 같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25개의 레기온으로 편성하고 각 전선에 이들을 배치하였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병사들은 보통 20년간 복무하게 된다. 신병훈련은 대부분의 신병들이 베테랑( veteran )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병사들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병사들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제대한 군인이 받게되는 연금 중 일부는 전선 가까이에 있는 농지였다. 이것은 앞서 팍스 로마나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만약의 경우 현역으로 보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영토고착화의 효과를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제대군인들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속했던 부대에 되도록이면 배치되지 않았다.

레기온의 사기는 엄격한 훈련과 esprit de corps에 의해 유지되었다. 군사 개개인이 수세기 동안 존재해온 군단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과 전설처럼 들려오는 승리와 전투 그리고 영웅들을 조상으로 뒀다는 자부심이 군대사기에 주는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훈련과 단련은 거칠고 격렬했지만 또한 효과적이었다. 물론 시간이 갈 수록 훈련도가 약해진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로마의 훈련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오히려 적이 강할수록 로마군의 훈련은 강해졌다.


군대내 보조병( auxiliary )

로마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25개 군단만으로는 제국의 변경들을 모두 수비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같은 수의( 15만여명 ) 보조병들을 유지하였다. 보조병에는 궁병, 투석기병, 경보병, 기병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로마 주변의 야만부족들에게서 보충되었다.

보조병들은 군단병( legionary )들보다 더 적은 봉급을 받았다. 그들의 복무기간은 주로 25년 정도였다. 복무를 모두 마친뒤 보조병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었으며 가끔씩 군단병 베테랑들에 못지않은 토지와 돈을 보수로 지급받기도 하였다.

초기에 대부분의 보조병들은 그들고유의 부족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특수부대를 제외하고는( 제국동방에서 주로 공수되던 투석기병이나 궁병들 ) 보조병들은 그들의 거주지 근처에서 복무하였다. 이런 체제는 가끔씩 보조병들이 지방의 부족민들과 힘을 합쳐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기 쉽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에는 야만족출신의 보조병들은 고향에서 떨어진 곳에 복무하도록 하였으며 부대원들은 되도록이면 하나의 부족민들로 이루기 보다는 다른 부족에서 차출하여 부대내 부족간 동질감이 생기는 것을 억제하였다.

트라야누스( Trajan )의 시대가 되자 보조병들의 반란억제정책은 더욱 확장되어 그전까지 부족적인 틀을 유지하던 보조병부대들은 각기 다른 부족에서 차출되어온 보조병들로 편성되었고 지휘관은 더이상 부족장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부족민간 동질감은 esprit de corps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보조병들로 하여금 레기온의 코호르트에 비견되는 부대단위가 창설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 부대들은 숫자로 구분되었는데 그리하여 이 부대들을 숫자라는 뜻의 누메리( numeri )라고 불렀다. 부대네 영속성과 규율은 줄어든던 부대원( 야만인들도 점점 로마화됨 )간의 거리감을 더욱 줄여주었고 3, 4세기에는 레기온 내에서도 이들의 비중이 커졌다.

로마인들이 제공하는 야만인 보조병들의 훈련과 장비가 로마인들을 적대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시간 야만인들은 로마군과의 전투를 통해 로마군의 진형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이러한 야만인들의 경험을 통한 " 업그레이드 "는 로마가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된다. 이런 일이 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로마의 정치력과 뛰어난 장군들의 활약덕분이었다.


하드리아누스( Hadrian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 셉티무스 세베루스( Septimus Severus )의 혁신

비록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와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제국의 방어와 군사정책이 완벽했다지만 후대에도 계속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전임자가 정복해놨던 동쪽의 영토일부를 포기했고 트라야누스( Trajan )는 제국이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으로 지배하기에 너무 광대하여 확장정책을 중단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이동적인 방어체제를 고정적인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목적은 레기온( legion )의 탁월한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을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적인 강이나 산같은 자연적인 방벽에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보완하여 제국의 변경들을 지키는 방어벽을 건설했다. 이것은 야만인들이 전선을 넘어오기 어렵게 만들었고 설사 넘어온다해도 후방으로부터의 지원을 어렵게해 상대하기가 수월해졌을뿐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 지원군을 불러오지 않아도되는 플러스효과가 나타났으며 따라서 대규모의 토벌작전이 줄어들었으므로 재정을 아낄 수 있었다.

독일의 리메스( Limes )와 영국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흙을 높이 쌓아 그위에 목재방벽을 친 것이었다. 이들은 로마군에 의해 항상 관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넓은 전선들을 지키기에 병사의 수가 모자랐던 것이다. 이 방벽들의 주목적은 국경을 정찰할 때 병사들을 보호, 은폐하거나 야만인들이 비밀리에 넘어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설령 넘어온다해도 적이 후퇴할 때 이 방벽들은 방해물이 되어 추격해오는 로마군이 적을 섬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다뉴브( Danube )와 라인( Rhine ) 국경선에서의 선박정찰을 더욱 강화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또한 이미 존재하는 제국의 정보망을 국경선 밖으로 넓혀 침략계획 등을 미리 알아내기도 하였다.

로마의 용병술과 정보활용술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편제에 몇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상비군에 두개의 레기온을 추가하고 보조병( auxiliary )의 비율을 더 높였다. 그의 시대 로마의 전체병력은 아마 삼십오만이 넘었을 것이다.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세 레기온을 더 창설했으며 그중 하나는 항상 이탈리아내에서 예비군으로서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의 시대 로마의 전체병력은 대략 사십만에 육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베루스는 합법적인 결혼을 허락하는 등 군인들의 처우개선에 여러모로 힘쓰기도 했다. 그는 명령체계를 개편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지역전선의 지휘권을 나눠서 지역군사지휘관들이 중앙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성벽도 역시 세베루스에게는 개편의 대상이었는데 원래 목재방벽이었던 것을 석벽으로 바꾼 것이다.

기병들이 로마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여기에 관련하여 기마보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평소에는 보병이지만 급히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 )와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e )의 개혁

아우구스투스가 처음 틀을 잡아놓고 후계자들에 의해 조금씩 개정되었던 행정, 정치, 군사정책들은 3세기 중반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과감한 개정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예비군이 없는 로마의 방어체제로는 더이상 진보하고 로마화된 야만인들과 최대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막아내기 벅찼던 것이다. 편제의 변화없이 단순히 군대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일리리아( Illyria ) 황제들은 가중되는 위협으로 인해 개정이나 개혁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군대를 증강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군대의 수는 약 오십만으로 늘어났다. 이 군대를 질적으로도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 ), 프로부스( Probus ), 카루스( Carus )는 초기 제국의 훈련을 도입하였다. 일단 이러한 임시방편으로 그들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견제했다.

로마군대가 이렇듯 혼란에 빠지고 분열된 원인은 한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다른 교전중인 전선에 투입하는 낡은 체제가 주원인이 되었다. 이런 체제는 한 전선에 공백이 생겨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평화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이익이었을지 몰라도 혼란기에는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레기온, 최소한 레기온의 주력이 국경의 공백을 방치하고 주둔지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사태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방법으로 다른 코호르트( cohort ), 레기온, 누메리( numeri )에서 일부씩을 빼내 임시기동부대( vexillation )를 만들고 이들을 교전지역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다루기 쉬운 이들 임시부대의 숫자는 보병일 경우 천명, 기병일 경우 오백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임시부대의 운용은 처음에는 만족스러웠다. 위협이 사라지면 이들 임시기동대는 해체되어 원래 부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235년에서 290년 사이의 혼란기에는 이런 방법도 너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소속감에 혼란이 생겼고 따라서 로마군대의 전통이던 부대원들의 단결심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군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혁을 결심한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단결심의 상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개혁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완성된다.

기동성을 갖춘 예비군의 필요성에 따라 군대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선을 지키는 리미타네이( rimitanei ) 혹은 리파리엔세스( riparienses )였고 다른 하나는 기동야전군( 더 기동성있는 병종들로 이뤄졌음 ) palatini 혹은 comitatenses였다. 대략 삼분의 이 정도의 병력이 국경수비대( 리미타네이 )였다. 나머지는 황제( Augustus or Caesar )들이 자신의 근거지에 주둔시켰다. 이들 기동부대원들은 국경수비대원들보다 조금 더 높은 봉급을 받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임시기동부대의 경험을 살려 레기온 야전부대의 수를 천명으로 줄였다. 이것의 결과는 임시기동부대보다 상당한 전략전술적 유연성을 갖게 된 것이었다. 전선의 레기온들은 육천명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보조병( auxiliary )들은 국경수비군이나 기동야전군이나 모두 천명씩 딸렸다.

문제많은 근위대( Praetorian Guards )를 지휘하는 근위대장( Praetorian prefect )의 지위는 폐지되었다. 근위대장의 힘은 황제를 몰아내거나 혹은 직접 황제가 되는데 사용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근위대를 대신하여 정제( Augustus )와 부제( Caesar )들에게는 기병대장( master of cavalry )과 보병대장직을 부하로 두었다. 이러한 개혁은 단순히 군사적인 권력이 나뉘어 정치적인 위험이 줄어들었다는 것보다 로마군 내에서 늘어나는 기병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는 나중에 근위대를 폐지해버렸고 대신 각 황제들에게는 사천명의 호위대가 주어졌다.


새로운 진형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 )와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e )의 개혁으로 레기온( legion )의 크기는 변화했지만 전략적 조직력이나 병사들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 작은 변화만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개혁의 결과는 긍정적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공헌한 바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동야전군의 보병들은 국경방어군보다 경무장이었다. 이것과 이들이 받는 더 많은 봉급은 국경방어군으로 하여금 시기심이 생겨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단병( legionary )들과 보조병( auxiliary )들의 배경에 그리 큰 차이가 없어지면서 국경방어군단병들은 경훈련/경무장한 보조병들이나 기동야전군단병들에 비해 인기가 없어지게 되었다. 결과는 군대 대부분에서의 사기저하로 나타났다. 또한 군단병과 보조병 사이에 차별을 없애는 장비와 훈련 프로그램의 변화도 나타나게 되었다.

병사( 군단병과 보조병, 국경방어군과 기동야전군 )들은 대부분 야만인들이었다. 이것은 375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야만인전사들은 무기와 전술적으로 로마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군 내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생각했으며 전문적인 군인으로서 그들이 속한 부대와 지휘관에게 충성했다. 이들은 동족들과 싸우는데 로마지휘관( 주로 로마인 )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동족과의 전투명령은 내통, 폭동, 탈영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다.

표준 훈련도의 쇠퇴에 따라 로마군에는 새로운 병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첫째로 야만부족들이 제국의 영내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것이 허락됨에 따라 부족단위의 보조병들을 해체하려던 트라야누스( Trajan )의 정책은 반전되었다. 그들 고유의 지휘관과 무기, 전투방식을 유지하는 부족단위의 보조병들은 많은 수가 제국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federati라고 불렸다. 물론 야만인들의 상당수는 로마화되었기 때문에 그리 전략적인 영향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불안과 폭동의 가능성은 항상 상존하고 있었다.

두번째로 지원자들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제국의 일부에서는 징집이 행해졌다. 대지주들은 이때 일정한 비율로 혹은 교대로 신병들을 제공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징집병들은 정규군보다 적은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징집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지만 로마군의 전문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이것은 후일 중세 봉건제도로 가는 한 단계였다.

후기 제국의 병법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 )와 율리아누스( Julian )의 시대 사이에는 지휘관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써서 후세에 전한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류역사가들도 그들이 살던 시대의 전투들을 남긴 이가 없었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경험한 " 현장증인 "이 없었기 때문에 기원전 50년부터 서기 350년까지의 4세기 동안 어떤 병법이 주로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다.

레기온의 진형이 연구되는 동안 보기에는 다섯개의 코호르트( cohort )가 한 줄로 선 2-라인 포메이션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보병들의 진형이 기병의 발달과 훈련도의 저하로 인해 전보다 더 밀집된 형태를 띄었다는 것이다.

한편 백병전에서 마리우스( Marius )가 코호르트들에 도입한 오엽배열진( quincunx formation )은 공화국시절만큼이나 후기 로마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진은 콘스탄티누스의 타우리노룸( Taurinorum, 지금의 Turin ) 전투기록에서 나타나는데 그의 군대는 카이사르의 레기온 만큼이나 기병돌격에 잘 대처했고 군단내 소대들끼리 초기처럼 유기적으로 기동하였다.

보병들이 밀집과 산개를 유기적으로 행하여 전투를 치르는 근본적인 방식은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기병들의 비중은 점점 커져갔고 효과또한 상당했다. 훈련도가 높을 때는 진형은 오엽배열진과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지만 훈련도가 낮을 때는 장군들은 팔랑크스( phalanx )와 비슷한 형태로 밀집대형을 이루었다.

레기온의 쇠퇴와 기병의 융성에 기초하여 주목할만한 점은 필룸( pilum )의 투창화였다. 이 새로운 투창은 전의 것보다 가벼웠고 다른 보병들과의 백병전이 일어나기전 던져졌다. 아마 글라디우스( gladius )를 휘두를 공간을 얻기위해 앞열은 초기 레기온과 마찬가지로 산개진을 펼쳤을 것이다. 필룸의 변화는 줄어든 유연성과 공격능력, 훈련도의 저하 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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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기병은 전체군에서 사분의 일을 차지했고 그 비율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와 대적하는 동부사막지대에서는 더 높았다. 기병은 이제 승패를 결정짖는 병종이 되었다.

투척무기 역시 로마군에서 그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갔다. 이들의 발전은 전략적 딜레마를 가져왔다. 기병의 돌격에는 밀집진형이 효과적인데 이러한 밀집진형은 투척무기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고 또다른 기병대처법으로는 투척무기사용이 있는데 이 진형은 넓고 앏게 퍼졌기 때문에 기병의 조공을 막아내지 못하면 쉽게 무너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같은 딜레마를 적 역시 격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마는 투척무기와 기병의 비율을 점점 높여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자신들의 유연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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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이르자 로마는 원래 백명당 한개씩이던 ballista, catapult, onager의 수를 더욱 높였다. 아마 보조보병의 절반정도는 궁병이나 투석기병이었을 것이고 기병 역시 상당수 아시아의 것을 모델로 하는 궁기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투척무기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는 승패가 보병들의 백병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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