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임진왜란 58

정유재란, 조선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패배의 진실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정유재란의 첫 번째 해전이며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수군 최악의 패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시 수군을 지휘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 수군이 목숨을 잃었다.정유재란,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조선 수군의 전멸이 아니라 원균의 도주로 흩어졌던 것이다. 1. 이순신의 파면조선을 재침(정유재란)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표는 임진왜란과는 달리 전라도를 포함한 조선의 하삼도였다.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다.그리고 임진왜란에는 고니시가 1군이었지만, 명과의 협상 당시 풍신수길을 기만한 죄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탓에 정유재란의 1군은 가토였고 고니시는 2군이었다..

임진왜란 조선을 도운 일본군 항왜(降倭) 조선을 배신한 순왜(順倭) 설명

[들어가기전]어느시대 어느나라에서든지 위기상황이 되면, 우리 편에서 협력을 하려는 자들도 생기지만, 배신을 하는 자들 또한 생긴다. 임진왜란 중에는 조선을 도와 일본을 버린 황왜군이 있었고, 반면, 조선에 불만을 품고 일본에 투항한 순왜가 있었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조선을 도운 일본군 항왜(降倭) 조선을 배신한 순왜(順倭) 설명 1.항왜항왜(降倭)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이르는 말이다. 전쟁 당시 조선군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았다. 그들중 일부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군은 전쟁 초반에는 포로들을 그냥 살해했으나 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항왜 유..

왜(일본)의 제2차 침략 정유재란 발발 이유와 개요

임진왜란 전쟁 중이던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조선의 재침략을 명하고 다음해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가토에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다음해인 1598년 철군할때까지 1년가량 전투가 벌어진다.왜(일본)의 제2차 침략 정유재란 발발 이유와 개요 1.임진왜란과의 차이점정유재란과 임진왜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임진왜란의 최종 목적이 명나라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면, 정유재란은 전라도 일대를 점령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공격 목표가 분명해졌기에..

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심유경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로 명나라의 유격 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 70만 명을 파병 준비를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했고 당시 평양성에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강화 교섭을 체결하는 데 중심을 이뤘지만, 거짓된 외교로 삼국(三國)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다음해까지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지고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협상의 시간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일본과 명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명군도 벽..

임진왜란, 조선과 이순신을 살린 정탁(鄭琢)의 신구차 (伸救箚) 상소문 전문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 못지 않게 최선을 다한 인물들이 있다. 이분들 중 정탁은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을 천거했고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온힘을 다해 죽음을 면하게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70의 고령임에도 몸소 전장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만류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와 신구차 상소문에 대해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조선과 이순신을 살린 자정 정탁(子精 鄭琢)의 생애와 인물 평가, 신구차 상소문(伸救箚 上疏文) 전문 (원문 및 해석) 1.정탁 출생 및 가계정탁(鄭琢, 1526년 중종 21년 ~ 1605년 선조 38년) 예천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

역사/인물 2015.05.03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선조의 망나니 아들 임해군 (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

선조는 그 자신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자식들 역시 문제가 많았는데, 이들 중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이 대표적이며 간략히 정리해 본다.회령의 변고 사건,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과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𤣰) 등 선조의 망나니 아들들 정리우선 선조의 부인과 자녀들부터 요약해 본다.1.선조의 부인과 자녀(1)정비 :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자녀 없음, 광해군 혼(光海君 琿)이 법적으로 양자가 됨(2)계비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 1606 - 1614) *적장자, 광해군에게 처형당함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 1685년):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

임진왜란, 무능하고 비겁한 겁쟁이 장군 원균(元均) 생애와 평가

[들어가기전] 간혹 원균과 이순신 장군을 라이벌로 대립구도를 만들고는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라이벌은 서로 경쟁을 하고 어는정도 수준이 맞았을 때 하는 말이다. 원균은 충무공에 비할 바가 못되는 인물이었고, 얼마전부터 원균에 대해 동정론 혹은 맹장이었다고하는 잘못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특히 작년 2014년 10월25일에는 원균의 후손가문이 평택에서 원균의 기념 사업회조차 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역사왜곡과 역사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원균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보자.임진왜란, 원균은 용맹한 장수였다? 사실이 아니다! 무능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허세 겁쟁이였던 장군 원균(元均)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 1597년 8월 27일 (..

역사/인물 2015.04.14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명장이라 우겼던 윤두수 (尹斗壽) 생애와 평가

최근 KBS 사극드라마 징비록에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등장인물 중 윤두수에 대해 잠시 알아본다. 아마 국사 시간에 윤두수와 윤근수가 형제 정승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30년전 내가 학창시절은 박정희 유신과 전두환 군부독재의 연장선이었는데 이들을 지지해 어른 대접을 받은 극우주의자 윤치영의 9대조가 바로 윤두수였다. 윤두수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본다.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명장이라 우겼던 무책임한 정승 윤두수(尹斗壽)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오음 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년)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 윤두수보다 20여세 연상의 이복 형인 윤담수와 윤춘수가 있었고,..

역사/인물 2015.04.13

임진왜란, 유능한 행정가 무능한 지휘관 김명원 (金命元)

임진왜란하면 뛰어난 장수들도 있었지만, 무능한 장수또한 있었다. 여기에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고 반면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는 김명원에 대해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유능한 행정가 무능한 지휘관 김명원 1. 가계 및 관료김명원(金命元, 1534년 ~ 1602년 12월 13일) 승지 김만균의 아들이자 이황의 문인. 자는 응순, 호는 주은, 시호는 충익, 본관은 경주.조선 명종 대인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홍문관 교리로 임명된 형 김경원과 함께 홍문관 저작으로 임명, 다음해에 홍문관 박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권신 이량을 탄핵했다가 '몸가짐이 바르지 않고 여색을 탐하고 술을 즐긴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얼마후 복직해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 삼..

역사/인물 2015.04.13

명나라 장수도 인정한 임진왜란의 명장 장군 정기룡 (鄭起龍)

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한 조선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고 기록한다. 정기룡은 당시 나이가 30대초반의 젊은 장수였다. 수많은 장수들을 놔두고 그를 꼽은 것은 장수로 뛰어난 그의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정기룡에 대해 알아본다. 명나라 장수 마귀도 인정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젊은 명장 장군 정기룡 (鄭起龍) 1.출생 및 가계정기룡(鄭起龍, 1562년~1622년)은 1562년 명종 17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인 증좌찬성 정호(鄭浩, 본관은 진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곤양 정씨(昆陽鄭氏)의 시조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영조때 시호는 충의(忠毅), 아명은 무수(茂壽). 2.탄생과 이름에 얽힌 일화(1)탄..

역사/인물 2015.04.1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