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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58

임진왜란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 생애와 평가

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에 대해 알아 본다. 1.출생 및 가계김천일(金千鎰, 1537년 ~ 1593년)은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렬(文烈)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현감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때 상소를 올렸다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며, 1578년(선조 11년) 임실 현감을 지냈다. 이후 담양부사·한성부 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2.임진왜란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

역사/인물 2015.04.06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임진왜란하면 칠백의총과 의병장 조헌 선행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인 중봉 조헌에 대해 알아본다.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참고로 배천 조씨는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다. 2.생애, 관료생활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했지만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

역사/인물 2015.04.05

임진왜란 의병장 임진사충신 제봉 고경명

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곽재우에 이어 고경명에 대해 설명해 본다. 1.출생과 가계고경명(髙敬命, 1533년 ~ 1592년)은 1533년 광주 압보천에서 대사간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명종시대 관료 생활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 공조좌랑이 되었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역사/인물 2015.04.05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영웅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일대기와 평가

임진왜란 3대대첩 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의 영웅 위대한 승리를 남기고 전사한 충무공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일대기와 평가 1.출생 및 가계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 2.전쟁 전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의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

역사/인물 2015.04.01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지도자로 호남 의병장인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진주에서 전멸한 뒤 다시 광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병이 조직되었다. 일본군이 침략하자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항전하였으나 이몽학의 난 관련자로 무고되어 억울하게 처형된 비운의 인물이다.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1.출생과 가계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1567년 광주(光州)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

역사/인물 2015.03.31

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당시 강화협상중이던 시기 정유재란 발발 1년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해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1.반란 전왕족 서얼 출신인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2. 반란 선동과 진행수년을 끈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흉년까지 겹쳐 ..

임진왜란 위대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郭再祐) 생애 평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양한 의병장으로 초야에 묻혀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 당하자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임신사충신 곽재우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의병장이며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훌륭한 인물이며 위인이었다. (곽재우의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곽재우는 1552년 8월 28일 경상도 의령(宜寧)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역사/인물 2015.03.31

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한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1.광해군의 활약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해 한양으로 진군한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고 신립의 탄금대에서 대패하자. 조선 선조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다.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1.왜의 한양 입성과 도망치는 조정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

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 제2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장수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 1.배경임진년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부터 13일(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약 3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쳤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한다. 이듬해 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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