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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58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 의미와 결과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도 불리고,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로 불린다.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幸州大捷) 의미와 결과 1. 전투 배경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된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임진왜란 왜의 장수 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종의지) 생애와 평가

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宗義智(종의지) 1568년 ~ 1615년 1월 31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왜의 무장 겸 다이묘. 소(宗) 가문의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 키리시탄(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다리오. 임진왜란 초기 왜의 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의 사위(딸의 이름 고니시 마리아)로 고니시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었다. *참고: 실재 발음은 '소오~'라고 하지만 한글 표기는 '소' 요시토시로 한다.임진왜란 왜의 장수 신중하고 영리했던 소 요시토시(종의지 = 평의지)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으로 출생.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

역사/인물 2015.03.29

임진왜란 경기도 수원 독성산성 전투 (독산성 전투)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 혹은 독산성(禿山城)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벌인 전투로 이치전투 이후 승리를 거둔 전투다.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들을 궤멸시켰다.임진왜란 경기도 수원 독산성 전투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독산성(禿山城)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1.전투전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용인 전투에서 5만 명의 남도근왕근이 궤멸당한 후 용인 전투 참전 장수 중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임진년 말경에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 패배의 전철을..

임진왜란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인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에 대해서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1.전투전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 공략을 명령했다. 2.전투 상황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은 군사 3만 명을..

임진왜란 함경도 탈환 북관대첩(北關大捷) 승리과정

북관대첩(北關大捷)은 1592년~1593년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과 여진족들을 모두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로 최악의 상황에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임진왜란 함경도 탈환 북관대첩(北關大捷) 승리과정 1.전투전 상황임진왜란 발생후 얼마 안 돼 한양을 함락시킨 왜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2만 2000명의 군대는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무능한 장수와 훈련이 덜 된 조선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가토는 함경도를 손쉽게 장악한다. 여기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붙잡힌 상황이었고, 조선 영토의 끝 온성까지 왜군이 진격해 올랐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이 틈을 타 북쪽의 여진족이 침입하고 정말수,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까지 일으키..

임진왜란 의병 이정암의 연안전투

[들어가기전] 연안전투의 주역 이정암(李廷馣, 1541년 ~ 1600년):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연안성을 지켰다. 본관은 경주, 자는 중훈, 호는 사류재와 퇴우당, 월당이고 시호는 충목이다. 1558년 진사가 되어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자와 주서를 거쳐 1578년 양주시 목사가 되었다. 이후에 장령, 사성, 장악원정을 거쳐 1587년 동래 부사가 되고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개성을 방어했으며 개성이 함락당하자 황해도로 후퇴해 의병들을 모아 활약해 황해도초토사가 되었다. 그리고 연안 전투에서 일본군 3000명을 격파해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어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593년 전라도관찰사, 1596년 충..

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제해권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들을 격멸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는 4차 출정은 부산 등지에 주둔에 있던 왜의 수군들을 차례로 몰살시키 위한 출정으로 여러차례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부산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남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 1. 전투 전 상황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임진왜란, 원주 백성을 살린 영원산성 전투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원주 목사 김제갑이 강원도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항해 영원산성에서 벌인 항전으로 군민 모두가 항전하여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강원도 지역 중 유일하게 원주 백성들만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임진왜란, 원주 백성을 살린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 1.배경원주 목사 김제갑은 1592년 1월 3일(1591년 음력 11월 19일) 68세의 늙은 나이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많이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에 ..

임진왜란, 의병들의 혈전 패전 아닌 패배 금산 전투, 칠백의총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과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임진왜란, 의병들의 혈전 패전 아닌 패배 금산 전투(錦山戰鬪), 칠백의총 1.배경충청도 금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2. 1차 금산전투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의병장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으로 막내 아들 고인후와 의병 7000명을 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해전사에 남을 학익진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한산도 대첩과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데 한산도대첩에 대해 알아 본다.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의 전략적 승리 세계 해전사에 남을 최고의 작전 학익진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전투 전 상황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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