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주나라 몰락의 시작 주여왕(周厲王)의 공포정치와 공화시대,

올드코난 2015. 2. 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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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몰락의 시작 주여왕(周厲王)의 공포정치와 공화시대 의미

*서주(西周) 제10대 왕 여왕 희호(西周 厲王 姬胡, ? ~ 기원전 828년) 재위기간 기원전 877년 (혹은 기원전 855년) ~ 기원전 842년.


1. 주여왕의 공포 정치

주 여왕이 즉위를 할 무렵 이미 주 왕실은 약해지고 있었다. 각 제후들이 주나라에 대해서는 명목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지만, 권위가 떨어진 주왕실에 절대 복종을 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즉위한 여왕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주 왕실의 세력을 만회하고 천자의 위엄을 갖겠다는 생각에 많은 실정을 저지르게 된다.

무엇보다 세금을 더 걷어야 겠다는 생각에 간신인 영 이공(榮 夷公)을 등용하게 되는데, 이공은 영나라(榮)의 공작의 지위를 갖고 있는 자로 노골적인 착취로 영국의 백성들에게도 많은 원성을 받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과 주여왕은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주여왕은 이공의 제안한 방식대로 가혹한 조세정치를 펼치는데, 경대부(卿大夫) 등의 국인(國人)에게 나누어주었던 토지와 산림(山林), 소택(沼澤) 등의 관리권을 회수해 그 이익을 독점하는 등 갈수록 주여왕과 이공의 착취는 극에 달하고 착취의 대상은 귀족과 백성을 가리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현신인 예량부(芮良夫), 주 정공(周 定公), 소 목공(召 穆公) 등의 간언을 물리치기에 이른다.

제후는 물론 백성들이 주여왕을 비방하자 주여왕은 공포정치를 시작한다. 감시와 형벌을 강화하여 이를 억눌렀고 당시 백성들은 말하는 것을 조심하고 눈짓만으로 그 의도를 서로 전했다고 한다. 주여왕은 비방하는 자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공포정치에는 제후들도 불만이라 제후들 조차 왕을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의 기세는 쇠락했으며 조정은 부패하였다.


2. 공화시대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결국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려고 들었다 (국인폭동). 주여왕은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호경을 탈출해 황하를 넘어 체(彘, 현재의 산시 성 훠저우 시)로 피했다. 이 때문에 주 정공과 소 목공이 대신해 조정을 보는 공화제가 시행되었다.

공화시기는 기원전 828년(공화 14년)에 왕이 사망해, 주공 및 소공에 의해 왕자 희정이 즉위해 주선왕이 될 때까지 14년간 지속되었다. 주선왕은 여왕의 아들 희우를 정나라에 봉해 정의 환공이 된다.



3. 공화시대 명칭 유래

죽서기년(竹書紀年)이나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제후에게 추대된 공백(共伯) 화(和)라는 인물이 부재한 천자를 대신해 정무를 맡았다 하여 이것이 공화제의 유래라고 설명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 때(공화)부터 무력에 의한 정치가 횡행하여 강자는 약자를 괴롭혔고, 군대 동원령은 천자의 재가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왕실의 명분을 빌려, 이국(夷國)을 토벌한 공을 다투어 맹주가 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정국은 오패(五覇)에 의해 좌우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4.공화시대 의의

왕이 없이 신하들이 정치를 행하는 공화 행정은 기원전 841년에 시작되어, 여왕이 망명지인 체 땅에서 죽고 여왕의 아들이 선왕으로 즉위하여 주나라 왕실이 다시 회복되는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되었다. 국인폭동 이후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해졌으며, 주나라의 국세도 쇠락하였다. 서주시대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아 12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를 연대에 따라 상세히 기록하였다. 따라서 공화 원년인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해 구체적인 연대 확인이 가능한 최초의 시점으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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