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8백년 주 천하의 기틀 다진 주 문왕 (서백 창)

올드코난 2015. 2. 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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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문왕 희창(周 文王 姬昌,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11세기?)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주나라(周)의 창건자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서백(西伯)은 그의 직위로 흔희 서백 창이라고 부른다.


주나라는 시조 후직의 11대인 고공단보 때에 이르러 기산에 도읍을 정하고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주라고 불렀다. 고공단보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백, 우중, 계력이었다. 막내 계력이 창(주문왕)을 낳았는데, 보통 사람과 확연히 구별되는 인품과 지혜를 가졌다.

당시 주나라는 장자 상속의 원칙이 있었다. 태백과 우중은 아버지 고공단보의 뜻을 알고 왕위를 포기하고 형만 땅으로 떠나 후일 오'나라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계력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바로 공계이다. 공계가 사망한 후 고공단보의 소망대로 손자인 희창(姬昌)이 즉위한다. 바로 서백 창으로 후대에 문왕(文王)으로 불렸다.


서백은 후직과 공류의 유업을 계승하고 고공단보와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노인을 공경했으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는 특히 어진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했고 낮에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렇게 인재를 소중히 여기자 천하의 많은 재사(才士)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상나라의 임금은  희창을 서백후(西伯侯 서쪽 제후들의 우두머리란 의미)로 봉해 상왕조의 삼공(三公)으로 삼았다. 그리고 궁시(弓矢 활과 화살)와 부월(斧鉞 큰 도끼와 작은 도끼)을 하사해 주변 제후국들을 정벌할 권한을 주었다. 서백은 귀국한 후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바치며 주왕에게 포락이란 잔혹한 형벌을 없애줄 것을 청했다. 주왕은 영토가 탐나 서백의 요청을 승낙했다.


이후 서백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의 보좌 하에 겉으로는 놀고 즐기며 주왕에 순종하면서 실제로는 선행을 쌓고 덕을 닦아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생산을 발달시켜 더 많은 제후들이 부귀하게 했다. 그러자 많은 제후들도 나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그에게 찾아와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한편 서백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상나라의 대신인 숭후호(崇侯虎)가 주왕에게 서백을 참소했다. "서백이 선행과 미덕을 쌓아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왕은 서백을 유리[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북쪽으로 상나라의 감옥을 말함]에 감금했다. 서백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해 미녀와 준마(駿馬), 진귀한 보물을 구해 주왕이 총애하는 비중(費仲)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 한 가지 물건(미녀)만으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충분한데 이렇게 많이 주는가?"하며 서백을 사면했다.


억울하게 유리옥에 감금되었다 풀려난 후 서백은 포악무도한 주왕을 토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강력한 상왕조를 타도하자면 훌륭한 인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천제(天帝)가 나타나 "창(昌)아, 네게 훌륭한 스승이자 너를 보좌할 지혜로운 인물을 보내주겠다. 그의 이름은 망(望)이라고 한다."라고 계시했다.

 

꿈속에서 그가 본 인물은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었다. 서백은 얼른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췄고 그러자 그 노인도 답례를 했다. 꿈에서 깬 후 서백은 천제가 내려주신 이 위대한 현인이 반드시 나라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도처로 사냥을 다니며 사람을 찾았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에 태사(太史)에게 점을 치게 하자 다음과 같은 점괘가 나왔다.

 

"위수(渭水)가에 사냥을 나가시면 풍성한 수확이 있으리라.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나 곰도 아니며, 어진 현인(賢人)을 만날 조짐이니 이는 하늘이 주신 훌륭한 스승이다."

서백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태사가 알려준 대로 많은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위수가로 사냥을 나갔다. 초목이 울창한 위수 가에 이르자 과연 수염이 하얀 한 노인이 대나무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시끄러운 수레와 인마 소리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고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놀랍게도 서백이 꿈속에 보았던 그 노인과 똑같았다. 이에 노인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눈 후 서백은 강태공의 탁월한 식견과 깊은 학문에 감탄하며 이 노인이야말로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바로 그 사람임을 확신하고는 예를 갖추며 말했다. "세상을 떠나신 저희 태공(太公 고공단보)께서는 늘 "머지않아 반드시 성인이 나타나실 것이며 그 성인 덕택에 우리 주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르신이 바로 태공께서 바라시던 그분이 아니신지요? 태공께서는 늘 그분이 나타나시길 학수고대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서백은 특별히 준비한 수레에 노인을 오르게 하고 자신이 직접 수레를 몰아 도읍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노인을 국사(國師)로 모시고 이름을 태공망(太公望 태공께서 바라시던 사람이란 의미)이라고 불렀다. 이 이가 바로 강태공으로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업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후 제(齊)나라의 개국시조가 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여상(呂尙) 또는 강상(姜尙)이라고도 하는데 후대에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서백의 덕행을 설명하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우(虞 지금의 산서성 平陸縣)나라와 예(芮 지금의 섬서성 大?縣)나라 사람 사이에 밭의 경계를 정하는 문제로 분쟁이 발생해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주나라의 서백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함께 주나라로 들어갔다. 그런데 주나라 경내로 들어서자 농부들이 서로 경계를 양보하고 백성들이 모두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우나라와 예나라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우리처럼 분쟁하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바이니 소송하러 간들 무엇 하겠는가? 부끄럽기만 할 뿐인데…."하고는 서로 양보하고 헤어졌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서백이 천명을 받은 군주일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제후들은 사실상 서백을 왕으로 존중했다.

 

서백은 스스로 왕을 칭한 후 상나라의 법률제도를 바꿔 새로운 역법(曆法)을 제정했다. 그는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자신의 할아버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 아버지 공계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다. 이후 역대 왕조에서 개국시조가 자신의 조상을 왕으로 추존하는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얼마후 상나라의 29대 임금 문정에 의해 죽고 주무왕이 뒤를 잇게 된다. 


[참고] 유리(羑里)라고 불리는 감옥에서 유교의 고전인 주역(周易)의 괘사(卦辭)를 지었으며, 복희 선천 팔괘를 연역(演易)하여 문왕 후천 팔괘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후대에 문왕을 찬미하기 위한 서술로 지적된다. 오늘날에는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문왕, 주공, 공자가 주역을 나누어 지었다는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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