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역대 주나라 왕 (周王) 계보 연대표 (서주, 동주 전체)

올드코난 2015. 2. 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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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국가이며 가장 긴 왕조였던 주나라 왕 계보 연대표 (서주, 동주 전체)

- 참고: 1)주 왕의 성은 희(姬). 2) 당시는 성과 이름을 같이 표기하는 성명의 개념이 없었다 3)추승, 서주, 동주 순으로 간략히 정리


1. 주 무왕 추승 (추존 왕)

-주 무왕이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왕(王)이 된 후 시호를 내린 선조들

1) 태공: 시호-태공 (太公) 휘-공조(公祖)

주 태공 희공조(周 太公 姬公祖)는 중국 상나라 시대 주(周) 제후국의 서백(西伯)이다. 성(姓)은 희(姬)고 이름은 공조(公祖)인데, 일명(一名) 조감제주(組紺諸盩), 자(字)는 숙류(叔類) 사기(史記)에서는 공숙조류(公叔祖類)라고 한다. 주 태왕의 아버지이고, 서주 무왕이 증손자이다.

索隱系本云:「太公組紺諸盩.」三代世表稱叔類, 凡四名. 皇甫謐云「公祖一名組紺諸盩, 字叔類, 號曰太公」也. 사기색은에서 이르기를 '태공 조감제주'라 하였다. 삼대세표에서 숙류를 칭했는데, 무릇 네 글자의 이름이었다. 황보밀이 이르기를 '공조는 일명이 조감제주이며, 자는 숙류인데, 태공이라고 불렸다.'라 하였다.

2) 태왕: 시호-태왕 (太王), 휘-단보(亶父) * 고공단보로 잘 알려져 있다.

주 태공(周 太公)의 아들이고, 훗날 주 호왕(周 昊王)의 아버지. 추존되기 이전에는 고공(古公)으로 불리었었다. (고공단보(古公亶父)) 서주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존했다.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중옹(仲雍) 대신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 계력(季歷) *시호 기록이 없음

계력(季歷)은 중국 상나라 시대의 주의 수장이다. 고공단보의 삼남이다. 훗날 서주 문왕 창(昌)의 아버지이다. 계력은 고공단보의 뒤를 이어 바른 정치를 해 제후들이 많이 따랐다. 상나라의 문정에게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4) 문왕(주문왕): 시호 - 문왕(文王), 휘 - 창(昌)

주 문왕 희창(周 文王 姬昌,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11세기?) 주나라(周) 창건자 무왕(武王)의 아버지.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지위는 서백(西伯)이었다. 흔해 서백창으로 알려진 인물


2. 서주 시대 계보: (*앞은 시호, 뒤는 휘 재위기간 순)

제 1대 주 무왕 발 (武王 發):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1043년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인데, 서백장의 둘째아들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중원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최초의 역성혁명) 형제들과 공신들에게 많은 제후국을 하사하고 즉위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사망했다.

제 2대 주 성왕 송 (成王 誦): 기원전 1043년 ~ 기원전 1021년

서주 성왕(西周 成王), 성왕은 시호가 아니고 생전의 칭호. 남동생은 진의 시조인 당숙우(唐叔虞;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이복형제). 즉위 했을 때는 아직 어렸으므로 실제 정무는 어머니 읍강, 숙부 주공 단(周公旦), 태공망 강상, 소공 석(召公奭; 연나라의 개조)등이 실재 정무를 봤다. 개국 초기 불안한 정국을 수습해 차대인 주 강왕(周康王)까지 주나라의 정치체계를 확립했다. (성강의 치라 부름).

제 3대 주 강왕 쇠 (康王 釗): 기원전 1021년 ~ 기원전 996년

서주 강왕 희쇠(西周 康王 姬釗), 기원전 1020년 아버지 성왕이 사망하자 즉위, 그의 치세는 '천하가 안정되어 형벌이 40여년간 행해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었다. 성왕 대에 주나라는 각국의 제후에게서 위신을 확립하여 국가 체제가 안정되었다. 실재 원정을 많이 했던 왕으로 고조선이 국경을 침범하기도 했다.

제 4대 주 소왕 하 (昭王 瑕): 기원전 996년 ~ 기원전 977년

서주 소왕 희하(西周 昭王 姬瑕), 즉위 후, 회이(准夷)의 반란을 평정하고 적극적인 남방 원정으로 동이 26방을 따르게 했다 초나라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었고, 초나라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 5대 주 목왕 만 (穆王 滿): 기원전 977년 ~ 기원전 922년

서주 목왕 희만(西周 穆王 姬滿), 주 소왕(周昭王)이 초나라의 원정 도중에 행방 불명되자, 임시로 왕위에 즉위했고, 이후 소왕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즉위했다. 무 묵왕은 주나라 전 국토를 돌아 다니다닌 것으로 알려졌는데 목왕팔준(穆王八駿)이라는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흙을 밟지 않을 정도로 빠른 절지(絶地), 새를 추월하는 번우(翻羽), 하룻밤에 5,000km를 달리는 분소(奔霄),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하는 월영(越影), 빛보다 빠른 유휘(踰輝)와 초광(超光), 구름을 타고 달리는 등무(謄霧), 날개가 있는 협익(挟翼) 등 8마리의 말을 타고 견융 등의 이민족을 토벌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서나라의 언왕이 난을 일으켜 대서제국(大徐帝國)을 세우자 초나를 끌어들여 멸망시켰다. (자세한 내막은 차후 정리)

제 6대 주 공왕 예호 (共王 繄扈): 기원전 922년 ~ 기원전 900년

서주 공왕 희예호(西周 共王 姬繄扈), 치세 전반에는 할아버지 주 소왕, 아버지 주 목왕의 영토 확대 노선을 계승했다. 후반에는 원정을 미루고 내정에 충실히 힘을 쏟았다.

제 7대 주 의왕 간 (懿王 囏): 기원전 900년 ~ 기원전 892년

이서주 의왕 희간(西周 懿王 姬囏), 시기에 주 왕실이 현저하게 쇠퇴해 험윤(玁狁)의 공격을 가끔 받았다. * 의왕 원년, 정(鄭)(지금의 섬서성 화현)에서 '하늘이 두 번 밝았다'는 일식 기록이 있으며, 이 기록을 바탕으로 의왕 원년이 서기 기원전 899년으로 정해져 공화 이전 서주 기년 연구에 중요한 참조 지점이 되었다.

제 8대 효왕 벽방 (孝王 辟方): 기원전 892년 ~ 기원전 886년

서주 효왕 희벽방(西周 孝王 姬辟方)은 서주(西周), 목왕(穆王)의 차남 주 공왕(周共王)의 아우이자, 주 의왕(周懿王)의 숙부.

제 9대 주 이왕 섭 (夷王 燮): 기원전 886년 ~ 기원전 879년

서주 이왕 희섭(西周 夷王 姬燮)은 서주(西周), 주 의왕(周 懿王)의 아들로 재위기간 7년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9년 혹은 12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제 10대 주 여왕 호 (厲王 胡): 기원전 879년 ~ 기원전 841년

서주 여왕 희호(西周 厲王 姬胡, ? ~ 기원전 828년), 재위기간을 기원전 855년 ~ 기원전 842년으로 보기도 한다. 탐욕스럽고 잔인했던 왕으로 폭정을 실시해 제후들도 왕을 조회하러 오지 안을 정도였다. 기원전 841년국인 폭동 사건(반란)이 일어났다. 주여왕은 호경을 탈출해 황하를 넘어 체(彘, 현재의 산시 성 훠저우 시)로 피했고 주여왕이 죽을때까지 주 정공과 소 목공이 대신해 조정을 보는 공화제가 시행되었다. 기원전 828년(공화 14년)에 왕이 사망하자 왕자 희정이 즉위해 주 선왕이 되었다.

(공화정 시기: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14년동안) *차후 설명

제 11대 주 선왕 정 (宣王 靜): 기원전 828년 ~ 기원전 782년

서주 선왕 희정(西周 宣王 姬靜, ? ~ 기원전 782년), 기원전 828년에 아버지 주 여왕이 사망한 후 즉위. 재위 중에 주 정공(周定公), 소 목공(召穆公)이 정치를 도와 국세가 중흥해 선왕중흥(宣王中興)으로 불리는 시기를 구축하였다. 동생 우(友)를 정나라(鄭)의 군주에 봉했다.(정환공) 이 시대에 주(籀) 의해 사주편(史籀篇)이 저술되어 서체의 하나인 대전(大篆)에 해당하는 전서가 완성되었다. *주선왕 원녕에 대한 이설: 사기 진기세가에서는 진 유공 12년에 서주 여왕이 달아났고, 진 유공은 재위 23년 만에 죽어 아들 진 희공이 뒤를 이었고, 진 희공 6년이 선왕 원년에 해당한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공화의 시작이므로, 진 유공 12년은 서기 기원전 842년에 해당한다. 진 희공 6년은 진 유공 12년의 17년 후에 해당하므로, 서기로는 기원전 845년에 해당한다. 주 본기에 따른 주 선왕 원년과는 2년의 차이가 있다. 이는 서주 왕들이 즉위 후 1년과 3년 각각에 두 번 개원했을 것이라는 이중칭원법 가설의 한 증거가 된다.

제 12대 주 유왕 궁녈 (幽王 宮涅): 기원전 782년 ~ 기원전 771년

서주 유왕 희궁녈(西周 幽王 姬宮涅, 기원전 795년 ~ 기원전 771년). 서주의 마지막왕, 기원전 780년에 관중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백양보(伯陽甫)라는 인물이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창했다. 사서의 기록에도 주의 국세의 쇠퇴기인 것은 확실하다. 포사(褒姒)가 후궁으로 들어와 유왕의 총애를 받았고,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유왕은 정실인 신후(申后) 및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포사는 웃지 않았기 때문에 유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웃기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사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유왕은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찢었다. 봉화를 실수로 잘못 피워 제후가 집결하자 포사가 웃었기 때문에, 자주 장난으로 봉화를 피워 제후의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봉화를 사용해도 제후가 집결하지 않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또 유왕은 아첨과 추종에 뛰어난 간신의 괵석부(虢石父)를 경으로 임명해 백성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실정에 폐후, 폐태자의 일도 있어 신후의 아버지인 신후(申侯)의 원한을 샀고 그는 서이 견융과 협력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이 때 유왕은 봉화로 구원을 부탁했지만 이미 제후 중에 유왕 밑으로 모이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유왕은 여산(驪山)에서 살해당하고 포사는 붙잡혀 행방불명이 되어 서주는 멸망했다. 유왕이 사망한 후 제후들과 신후는 폐태자였던 의구를 주 평왕으로서 즉위시켜 주사를 맡게 했다. 그러나 이 병란에 의해 호경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평왕은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 해 동주가 시작되었다.



3. 동주 시대 계보: (*앞은 시호, 뒤는 휘 재위기간 순)

제 13대 주 평왕 의구 (平王 宜臼): 기원전 771년 ~ 기원전 720년

동주 평왕 희의구(東周 平王 姬宜臼) 주 나라 전체로는 13대, 동주 시대로는 첫 번째 왕. 주평왕은 유왕의 태자였지만 포사가 후궁으로 들어와 주유왕의 총애를 받아 백복을 낳았고, 백복이 태자가 되면서 폐태자되어 신(申)나라로 달아났다. 외할아버지 되는 신후(申侯)는 서쪽의 견융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고 기원전 771년 유왕과 백복은 여산에서 살해되고 제후들에 의해 당시 폐태자 의구가 왕으로 옹립된다. 서주의 도성 호경이 전란으로 황폐해져 기원전 770년 낙읍(현재의 뤄양 시)의 왕성으로 천도해 동주 시대가 시작된다. 평왕은 51년간 재위했다.

제 14대 주 환왕 림 (桓王 林): 기원전 720년 ~ 기원전 697년

동주 환왕 희림(東周 桓王 姬林) 평왕의 손자며 태자 예보의 아들이다. 평왕이 사망했을 때 태자 예보가 이미 요절했기 때문에 즉위했다. 즉위 후 제후의 힘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또 주와 영지를 접하고 있는 정이 경계선을 넘어 기장을 수확한 것을 빌미로 정 장공을 경사의 직위에서 파면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장공은 일절 조현하지 않게 되어 주와 정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기원전 707년, 환왕은 채, 위, 진과 연합해 정을 공격했지만 패하여 주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수갈 전투). 환왕이 왕권의 강화에 노력했지만 주 왕실의 쇠퇴는 멈추지 않았고 제후 사이의 분쟁을 저지하는 영향력을 잃었다. 기원전 697년에 환왕은 사망했고 태자 타(주 장왕)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생전에 차자 극을 사랑해 후계 문제가 생겨 사후 왕실의 분란을 초래했다.

제 15대 주 장왕 타 (莊王 佗):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2년

동주 장왕 희타(東周 莊王 姬佗) 재위 3년 되던 기원전 694년 주공 흑견이 장왕을 살해하고 장왕의 동생인 왕자 극을 옹립하려던 계획을 대부 신백가 고하자 흑견은 장왕과 신백에게 살해되었고 왕자 극은 남연(현재의 허난 성 옌진 현에 있던 나라)으로 피신하였다. 사랑하는 첩 왕요(王姚)가 낳은 아들 왕자 퇴(頹)를 사랑해 대부 위국(蔿國)을 자퇴의 스승으로 삼았고, 나중에 자퇴는 조카 혜왕을 몰아낸다. 재위 15년 만에 죽고 아들 호제가 희왕으로 즉위했다.

제 16대 주 희왕 호제 (僖王 胡齊): 기원전 682년 ~ 기원전 677년

동주 희왕 희호제(東周 僖王 姬胡齊, ? ~ 기원전 677년) 장왕의 장자로 아버지 장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기원전 679년(진후 민 28년), 진 무공(晉武公)이 진을 쳐 격멸하고, 진의 보기 몇을 주 희왕에게 뇌물로 바쳤다. 희왕은 1군(1만 2천 5백 명의 군 편제)만을 두는 조건으로 무공을 진후로 승인해, 마침내 환숙에서 갈려나온 곡옥백 분가가 진 종가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 임금이 되었다. 주 희왕은 재위 5년만에 죽었다.

제 17대 주 혜왕 랑 (惠王 閬):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52년)

동주 혜왕 희랑(東周 惠王 姬閬, ? ~ 기원전 652년) 희왕 5년(기원전 677년)에 아버지인 희왕이 사망하자 기원전 676년에 즉위했다. 할아버지 주 장왕의 애첩 왕요의 아들로 장왕에게 사랑을 받은 작은 아버지 자퇴(子頹)의 반란에 의해 났고 자퇴는 겨울에 주왕으로 등극했다.(폐왕 퇴 (廢王 穨))

혜왕 4년(기원전 673년), 정은 괵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혜왕은 정에는 은상으로서 호뢰(현재의 허난 성 싱양 시) 동쪽의 땅을 하사했으며, 괵을 순수하고 주천 이북 땅을 주었다. 혜왕은 괵공에게 정여공보다 더 좋은 하사품을 주었고, 이는 주나라와 정나라 사이가 벌어져, 나중에 주 양왕과 정 문공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혜왕 10년(기원전 667년), 혜왕은 제환공에게 패자(방백)의 지위를 하사했다.

혜왕은 후처 혜후의 아들 숙대를 사랑해 장자 정(주 양왕)의 위치를 불안정하게 했다. 혜왕은 태자를 폐하고 숙대를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패자인 제환공이 이를 저지하자 정나라를 꾀어 뜻을 이루려 했지만 혜왕 24년(기원전 653년) 정나라가 제 환공에게 굴복하면서 혜왕의 공작도 무위로 돌아갔다. 기원전 652년 혜왕은 사망하였다.(혜왕 25년)

제 18대 주 양왕 정 (襄王 鄭): 기원전 652년 ~ 기원전 619년

동주 양왕 희정(東周 襄王 姬鄭) 아버지 혜왕이 전처의 사후에 후처(혜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대(숙대)를 총애했으므로 양왕은 왕위 계승이 이복동생에게 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기원전 652년 혜왕이 사망하자 희정(양왕)은 혜왕의 상과 동시에 당시의 패자인 제의 환공에게 사자를 보내 그 지원을 얻어 즉위했다.

양왕 3년(기원전 649년), 자대(숙대)의 반란이 있었고 제의 환공은 관중을 통해 주와 융을 화해시켰고 습붕을 통해 진과 융을 화해시켰다. 양왕 12년(기원전 640년), 숙대는 주로 복귀했다. 양왕 13년(기원전 639년), 정이 활을 정벌하자 양왕은 유손·백복을 보내 활의 땅을 헌상하도록 요구했으나 정은 두 명을 잡아두었다. 양왕은 분개해 정을 정벌하려고 했다. 문관인 부신이 만류하였으나 양왕은 듣지 않고 다음 해(기원전 637년), 양왕은 군을 인솔해 정을 정벌했다. 양왕은 이 때, 적인의 딸(적후)를 아내로 맞았다. 양왕 16년(기원전 636년), 양왕이 적후에게 싫증나자 적후는 분개해 혜후의 아들 숙대를 세울 계획을 세웠고 혜후와 적후·숙대는 내응해 융·적을 맞아들이고 양왕을 추방했으며 숙대를 천자에 즉위 시켰다. 양왕은 정으로 도망쳤고 정은 왕을 사(汜)에 머물게 했다. 양왕 17년(기원전 635년), 양왕은 진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문공이 융·적을 추방하고 숙대를 주살해, 양왕은 복위할 수 있었다. 양왕은 진문공에게 방백의 지위와 하내의 땅을 주었다. 양왕 32년(기원전 620년), 양왕이 사망하고 아들인 임신(경왕)이 즉위하였다. * 양왕의 시대에 제환공과 진문공 2명의 패자가 등장한다.

제 19대 주 경왕 임신 (頃王 壬臣): 기원전 619년 ~ 기원전 613년

동주 경왕 희임신(東周 頃王 姬壬臣) 아버지 양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주 왕실의 재정은 빈궁함이 극에 달해 양왕의 장례도 치를 수 없을 정도였다. 경왕은 모백위를 노에 파견해 재정 원조를 청했고 노문공의 지원으로 양왕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시기부터 주왕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다.

제 20대 주 광왕 반 (匡王 班): 기원전 613년 ~ 기원전 607년 동주 광왕 희반(東周 匡王 姬班)

제 21대 주 정왕 유 (定王 瑜): 기원전 607년 ~ 기원전 586년, 동주 정왕 희유(東周 定王 姬瑜)

제 22대 주 간왕 이 (簡王 夷):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2년,

동주 간왕 희이(東周 簡王 姬夷) 재위 기간중 진, 초, 진, 송, 정이 서로 전쟁을 벌였고 오가 발흥했으며, 그 공격에 의해 초가 멸망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

제 23대 주 영왕 설심 (靈王 泄心): 기원전 572년 ~ 기원전 545년

동주 영왕 희설심(東周 靈王 姬泄心, ? ~ 기원전 545년) 재위 기간 동안 태자 진(晉)이 이(伊)와 낙(洛) 땅을 순수하다 죽자, 그후 아들을 그리워 하다가 꿈에서 태자 진이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고 하여 영왕은 잠을 자다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귀(貴)가 왕위에 올라 주경왕이된다.

제 24대 주 경왕 귀 (景王 貴):기원전 545년 ~ 기원전 520년,

동주 경왕 희귀(東周 景王 姬貴), 경제적 어려움이 커 제후에 구걸을 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거절당할 정도로 주왕실의 권위가 사실상 사라졌다.

제 25대 주 도왕 맹 (悼王 猛): 기원전 520년

동주 도왕 희맹(東周 悼王 姬猛), 기원전 527년에 태자 수가 죽었기에 태자가 되었다. 기원전 520년, 아버지 주 경왕이 서장자 왕자 조와 대부 빈기(賓起)를 총애했고 빈기도 왕자 조를 총애해 태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결단하지 못하고 4월 을축일에 경왕이 병으로 죽었다. 빈기를 싫어한 유분(劉蚡)이 단목공(單穆公)을 섬기고 있었는데, 마침 유분의 아버지 유헌공(劉獻公)이 무진일에 죽자 단목공이 유분을 유헌공의 후사로 세웠고, 단목공과 유분이 빈기를 죽였다. 5월 4일, 왕자 맹(猛)은 유분과 단목공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6월 11일, 경왕의 서자인 왕자 조(朝)가 주 왕실이 경왕을 안장하자 구관(舊官) 및 백공(百工)으로서 봉록을 잃은 사람들과 영왕과 경왕의 족인들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켜 왕자 개(匄)와 왕위를 다투었다. 이때 교(郊)와 요(要), 전(餞) 땅의 갑사들을 이끌고 주 왕실을 공격했다. 유분은 양으로 달아났고, 도왕은 장궁에 있다가 단목공의 집으로 갔는데 왕자 조의 일파인 왕자 환(還)에게 신변을 탈취당해 다시 장궁에 있었다. 왕을 잃은 단목공이 도성에서 탈출하자 왕자 조의 일파가 유분과 단목공을 공격했으나, 단목공이 왕자 조의 일당 여덟 사람을 죽이니 왕자 조는 경읍으로 달아났고, 유분은 왕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공 간공과 감평공이 모두 왕자 조에게 패배했다. 11월 12일, 이때까지 주 왕실이 왕자 조와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도왕은 왕자 희조에게 시해 당하였다. 그러자 진(晉)나라는 왕자 희조를 치고 왕자 개를 옹립했다. 개는 주경왕이다.

제 26대 주 경왕 개 (敬王 丐): 기원전 520년 ~ 기원전 477년

동주 경왕 희개(東周 敬王 姬丐), 경왕의 서장자인 희조가 도왕을 살해하자 진이 파병을 해 희조를 토벌하고 희구를 왕으로 세웠지만, 경왕과 희조 사이에 충돌이 계속 되어 기원전 516년, 희조는 초로 피신했지만 기원전 505년 봄, 경왕은 자객을 초로 보내 희조를 살해하였다. 이에 대해 희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경왕은 주도를 탈출했다가 기원전 503년에 진의 원조 하에 주로 되돌아왔다.

주는 평왕에서 낙읍을 도성으로 정해 왕성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경왕의 대에 희조의 세력이 강한 도왕 때까지의 수도를 피해 동쪽(한대의 낙양성, 현재의 한위 고성의 근처)으로 천도 했다. 천도한 새로운 도성를 성주(成周), 옛 도성를 왕성(王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제 27대 주 원왕 인 (元王 仁):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69년

동주 원왕 희인(東周 元王 姬仁),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를 멸했고 그 후에 북쪽의 낭야(琅琊)로 천도해 제, 진 등의 제후와 서주(현재의 산둥 성 텅저우 시 동남쪽)에서 회맹했다. 원왕은 구천을 패자로서 승인하였다.

제 28대 주 정정왕 개 (貞定王 介):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41년

동주 정정왕 희개(東周 貞定王 姬介), 정정왕 16년, 진(晉)나라의 3경(卿) 위(魏), 한(韓), 조(趙)가 지씨(智氏)를 멸하고 그 땅을 삼분했다. 이때부터 3가(家)가 진나라를 삼분하는 형세가 형성된다.

제 29대 주 애왕 거질 (哀王 去疾): 기원전 441년

동주 애왕 희거질(東周 哀王 姬去疾),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아우 숙습(叔襲)에게 시해되었다. *수신기(搜神記) 권6에 애왕 8년에 정(鄭)나라 여자가 한꺼번에 4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20여 명만 장성해서 성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 30대 주 사왕 숙습 (思王 叔襲): 기원전 441년

동주 사왕 희숙습(東周 思王 姬叔襲) 기원전 441년 3월, 형인 애왕(哀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지만 얼마안가 8월에 동생인 외(嵬)에게 시해당했다.

제 31대 주 고왕 외 (考王 嵬): 기원전 441년 ~ 기원전 426년

동주 고왕 희외(東周 考王 姬嵬), 사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왕자 조의 잔당이 두려워서 도읍을 성주(成周)로 옮겼다. 기원전 440년, 동생인 왕자 게(王子 揭)를 이전의 도읍지였던 왕성(王城) 지역에 봉하고 제후로 삼아 왕성에 도읍을 정해 서주 환공이 되었다. 이후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는데, 도읍지인 성주 부근 밖에 지배가 미치지 않게 된 동주는 왕권의 약화가 표면화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전국 시대의 시작을 고왕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제 32대 주 위열왕 오 (威烈王 午): 기원전 426년 ~ 기원전 402년

동주 위열왕 희오(東周 威烈王 姬午) 기원전 403년, 진의 대부의 한건, 조적, 위사를 각각 한후(韓侯), 조후(趙侯), 위후(魏侯)로 봉해 삼가분진(三家分晋)이라 불리는 책봉을 실시했다. 삼가분진은 춘추시대의 종식이며 이때부터 전국시대로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해부터 『자치통감』의 기재가 시작되고 있다.

제 33대 주 안왕 교 (安王 驕): 기원전 402년 ~ 기원전 376년

동주 안왕 희교(東周 安王 姬驕) 안왕 16년(기원전 386), 제(齊)나라 대부 전화(田和)를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안왕 26년(기원전 376) 죽고 아들 희(喜)가 뒤를 이었다.

제 34대 주 열왕 희 (烈王 喜):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69년

동주 열왕 희희(東周 烈王 姬喜) 열왕 2년(기원전 374), 주나라의 태사(太史) 담(儋)이 진헌공(秦獻公)을 보고는 말하였다. "원래 주나라와 진나라는 한 나라였다가 갈라졌는데, 5백년 뒤에 다시 합쳤다가 17년 후에 패자(覇者)가 나타날 것이다." 열왕 10년(기원전 369)에 죽고 아우 편(扁)이 뒤를 이었다.

제 35대 주 현왕 편 (顯王 扁):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21년

동주 현왕 희편(東周 顯王 姬扁), 현왕 2년(기원전 367년) 서주 환공의 손자인 서주 혜공이 자신의 소자(少子)인 반(班)을 공(鞏, 현재의 허난 성 궁이 시) 지역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으며, 공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동주 왕실을 받들어 소자 반이 서주 혜공의 호를 습용(襲用)하여 그 자신을 동주 혜공이라고 칭했다. 이때는 전국 시대로 동주 왕실이 안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갈라진 것이다.

이와 같이 도읍지인 성주 부근 밖에 지배가 미치지 않게 된 동주는 왕권의 약화가 표면화되었다. 현왕 48년(기원전 321년) 죽자 아들 정(定)이 뒤를 이었다.

제 36대 주 신정왕 정 (愼靚王 定): 기원전 321년 ~ 기원전 315년, 동주 신정왕 희정(東周 愼靚王 姬定)

제 37대 주 난왕 연 (赧王 延): 기원전 315년 ~ 기원전 256년

동주 난왕 희연(東周 赧王 姬延, ? ~ 기원전 256년) 주나라의 마지막왕. 재위 중에 난왕의 영향력은 성주(현재의 뤄양 부근)로 한정되어 있었다. 왕실도 서주 무공과 동주 정공의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난왕은 서주 무공에 의지해 서주(西周, 하남)로 천도했다. 조부인 동주 현왕의 시대부터 진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어 여러가지 정책에도 동주의 세력 만회는 성공하지 못했다. 난왕 59년(기원전 256년), 진나라 장군 영규(嬴摎)의 공격을 받자, 서주 무공과 함께 진나라에 항복한 뒤 영토를 헌상해 주나라는 마침내 난왕 때에 이르러서 멸망하였다. 이 때문에 난왕은 진나라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고, 이후 난왕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곧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59년으로 주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였다. 


진나라는 구정을 진의 수도로 옮겼고, 동주 정공을 동주군(東周君)으로 격하하였다. 이후 기원전 249년, 동주 정공이 주나라를 다시 재건하려고 계책을 꾀하자, 진나라는 동주를 공격하여 멸하고 동주 정공을 진나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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