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

올드코난 2014. 12. 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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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은 전설상의 주나라 희씨의 조상이다. 신농과 함께 중국의 농업의 신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사기』주 본기에를 참고해 정리해 보면 주나라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으로 이름은 기(棄)이다. 후직의 모친은 원래 유태(有邰)씨의 딸로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오제의 일원인 제곡(帝?)의 정비(正妃)였다. 어느 날 강원이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본 후 애모(愛慕)하는 마음이 생겨 그 발자국을 밟고 싶어졌다. 그녀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자 마치 아기를 가진 듯 뱃속이 꿈틀거렸다.


열달 후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가 불길하다고 여겨 좁은 골목에 버렸다. 그러자 말과 소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아이를 피하며 밟지 않았다. 이번에는 숲속에 버렸지만 마침 산속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도랑의 얼음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주었다. 그러자 강원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신(神)이라고 여겨 데려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잘 키웠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고자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버릴 기(棄)"로 불렀다는 것이다.


기는 어릴 때부터 아주 출중했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가 놀이를 하면서 심은 작물은 무성하게 잘 자랐다. 성인이 된 후 토지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작물을 심자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 배웠다. 요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그를 농사(農師)로 등용해 농업을 주관하게 했다. 이렇게 하자 백성들에게 수익이 많았다. 요임금은 그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고 불렀으며 희씨(姬氏) 성을 하사했다. 이처럼 후직이 흥성한 시기는 요, 순과 하나라 시대였으며 후직의 종족은 농업에 뛰어나다는 아름다운 덕망을 지녔다.


후직이 사망한 후 아들인 부줄(不?)이 즉위했다. 그러나 부줄의 만년에 하나라의 정치가 쇠퇴해 농사(農師)라는 관직을 폐지하고 더는 농업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줄은 이에 관직을 잃고 이민족들이 사는 곳으로 떠났다. 부줄의 손자가 바로 공류(公劉)이다. 공류는 비록 이민족이 사는 지역에 살았지만 여전히 농경에 힘썼다. 사방으로 다니며 토지의 특성을 살폈고 각종 목재를 채취해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고향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모두 재물이 쌓였고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졌다. 주나라의 정교(政敎)는 이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공류의 덕을 기렸다. 공류가 죽자 아들인 경절(慶節)이 즉위해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쪽 땅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천 사기는 검증 되지 않은 내용이 있기에 이를 모두 사실로 받아 들일 수는 없다. 역사라기 보다는 전설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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