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중국 최초의 왕조 상(商)나라 (=은(殷)나라)

올드코난 2014. 12. 1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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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옮긴 마지막 도읍이 은(殷)이기 때문에, 은이라고도 부른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장사치를 일컫는 상인(商人)이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글 출처:위키백과)


역사상 중국 최초의 왕조 상(商)나라 (=은(殷)나라)


1. 상나라 개요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고 이후 상나라의 마지막 왕 30대 주왕(紂王)이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 상라라에 대해서는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고 있다.



2. 상 왕조의 시조 설(契, 卨)

상 왕조의 시조는 설(契, 卨)로 알려졌다. 자설(子契)이라고도 부르며 사마천 ‘사기’에 의하면 유융씨(有娀氏)의 딸이자 제곡의 차비인 간적이 수영을 하고 있을 때, 제비의 알을 먹어서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또 요의 시대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설은 순 임금 시대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사도(司徒)로 임명하고 상(商)에 봉하였으며 자(子)라는 성을 주었다. (다만 시경에는 요가 상에 봉했다고 쓰여져 있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상의 건국왕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3. 상 왕조의 건국 탕왕

설로부터 13대째의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이름은 리(履)이다. 천을(天乙), 대을(大乙), 태을(太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이라고도 한다.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당시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포학한 정치를 해 인심은 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하의 신하인 탕은 명신 이윤의 보좌를 받아 걸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서경에는 걸을 멸할 때에 제후를 향해 연설했다고 여겨지는 『탕서』가 있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추방해 하 왕조를 멸망시켰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탕 왕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함께 성군으로서 후세에 숭상되고 있다.


4. 상 왕조의 왕들의 치세

탕이 상나라를 일으킨 후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왕조는 다시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傅說)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신(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주(西周)의 무왕에게 주살되었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이후 상왕조를 주(周) 왕조가 계승했다.


5. 상나라 시대의 사회와 문화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6.정치와 행정

1)정치: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2)행정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7.은허

은허(殷墟)(기원전 1600년 ~ 1046년)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의 안양 현(安陽縣) 북서 일대에 있는 상나라 시대의 유적이며, 그 유적을 남긴 고대 도시의 이름으로서 상나라 후기의 수도로 여겨진다. 주요 유물로는 고대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이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

1899년 이 곳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중앙 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5회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량의 갑골, 십수 좌(座)의 큰 묘, 1000좌에 달하는 작은 묘, 은(상)나라의 궁전 및 주거지가 발견되어 이 땅이 반경(盤庚) 이후의 은나라 수도였음이 확인되었다.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올린 궁전초석과 토단 주위에 수혈식(竪穴式)으로 된 주거 유적이 있는데, 제왕(帝王)·왕족의 주거는 지상식인 반면 일반 백성의 주거는 수혈식이었다. 또한 그 외곽에서는 도기·골기 등을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큰 묘는 네모꼴이거나 아형(亞形)이며, 중앙의 관을 둘러싼 부장품으로는 청동의 용기, 무기, 악기, 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이 놓여 있었다.

1976년에는 궁전 및 종묘 지구에서 처녀분인 부호(婦好)묘가 발굴되어 최고 수준의 청동기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부호는 은의 임금 무정(武丁)의 비(妃)로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여장군으로 유명하며, 그의 아들들은 무정의 사후 은의 왕위를 이었다. 이 무덤은 축조 연대가 확실하며, 피장자의 이름 역시 명확하여 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수습된 유물은 1,928점인데 청동기 468점, 옥기 755점, 골기 564점이며 그외 석기류도 발굴되었다. 주목할 점은 16구의 순장 인골의 출토이며, 그외 6마리의 개가 순장되었다. 그외 무덤의 위에는 제사용 건물인 향당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이들은 세계 청동기문화의 제1급 작품으로, 발굴된 유물들은 안양의 은허박물관을 비롯 정주의 하남성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8.갑골문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갑골 문자(甲骨文字)는 중국 대륙에서 청조 말기 1899년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 수도였던 은의 폐허에서 王懿榮(왕의영)이 최초로 발견했는데 당시 한약재로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중국 도처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중국 고대 문자로서 거북이의 배딱지[龜甲]와 짐승의 견갑골[獸骨]에 새겨진 상형문자였으므로, 거북이 배딱지[腹甲]를 나타내는 갑(甲) 자와 짐승의 견갑골을 표현한 골(骨)자를 합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명명하였다. 발견된 지역의 명칭을 따라 은허 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골문자는 상형문자이고 한자의 초기 문자 형태에 해당한다. 발굴된 뼈의 연대는 대부분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으로 상말기에 해당한다. 현재까지는 은허(殷墟)를 위주로 중국 대륙에서만 발견되었다. 요하 동부에서는 갑골은 발굴되지만, 갑골문이 새겨진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1928년 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동작빈 선생 주도하에 본격으로 발굴하고 조사하였다. 현재까지 십육만 편, 오천 자가 발견되어 그중에 천 자 정도가 완벽히 해독되었다. 세계 각국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다.

은허에서 출토된 거북이의 배딱지와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져 있는 상형문자로서 한자의 원형이다. 이것은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으므로 복사라고도 하는데 반경에서 주왕까지 12왕, 273년간에 제작되었다.

거북이의 배딱지나 짐승의 견갑골을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에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상(商)뿐이다. 현재 알려진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성 요소가 있으나 순수한 회화문자보다는 진보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 연구로써 밝혀진 내용은 제사·풍우·전렵(田獵)·농경·군사·사명(使命)·질병·복점 등이다.

발굴 이후 상의 제사·정치·사회·경제 등이 연구됐고 전설로만 전해졌던 상이 중국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라는 사실이 규명됐다.


9. 상나라 멸망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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