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사도세자의 부인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생애 설명

올드코난 2016. 3. 14. 15:20
반응형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친모인 헌경왕후는 혜경궁홍씨로도 불린다. 오랜 궁중생활을 담은 한중록은 모든 내용이 정직하다고는 볼수 없지만, 역사적인 가치는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

사도세자의 부인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생애 설명

1.개요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 한중록의 저자.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 정조의 어머니.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 고종때 왕후에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이다.

생전에 받은 존호로는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고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정조의 생모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혜빈이었지만 혜빈이라는 칭호 대신 혜경궁으로 불렸다. (*경의왕후(敬懿王后)는 잘못된 표기)



2.출생 및 가계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서울 출생. 본관 풍산. 선조의 7대손, 선조의 부마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후손. 영풍부원군 익정공 홍봉한(永豊府院君 翼靖公 洪鳳漢, 1713~1778)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 고조부는 예조판서 정간공 홍만용(禮曹判書 貞簡公 洪萬容, 1631~1692). 증조부는 증 좌찬성 홍중기(贈 左贊成 洪重箕, 1650~1706), 조부는 예조판서 증 영의정 정헌공 홍현보(禮曹判書 贈 領議政 貞獻公 洪鉉輔, 1680~1740)


3. 세자빈

1743년(영조 19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는데, 이는 영조가 홍봉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홍봉한은 31세 영조는 50세였는데, 홍봉한은 알성시에 2번 낙방을 했던 때였다. 이런 시기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면서 홍봉한이 지극정성을 다한 것은 당연하고 실재 혜경궁 홍씨 덕에 가세가 기울고 있던 홍봉한의 집안에 광영이 비치게 된 것이다. 영조의 명으로 홍봉한은 딸에게 소학(小學), 내훈(內訓), 어제훈서(御製訓書)를 가르쳤다 한다. 영조 20년 1744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4.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장성하면서 둘 사이에는 점차 멀어지게 되고, 또 영조는 노론에 의해 임금이 된 한계가 있었고,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정통성 문제도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이런 것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여기에 경종이 노론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게된 사도는 소론의 편에서기 시작하고 이게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후 설명한다.)

영조와 사이가 벌어지던 중 나경언 사건이 발생하는데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고 1762년 7월 4일(윤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데, 1762년 7월 12일(윤5월 21일)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고 말았다. (임오화변) 여기에는 사도에게는 장인이 되는 홍봉한 또한 가담했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


5. 정조 즉위와 죽음

1776년 영조가 83세로 죽고 대리청정중이던 세손 이산(정조)가 25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를 혜경궁(惠慶宮)로 궁호를 높였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10살 아래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대비가 되면서 서열상 2위가 된다. 정조 즉위후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계되 이들을 처형하는데, 여기에는 홍씨의 친정들과 포함되었다.

홍씨는 나름 말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조의 피바람에는 조선의 개혁 또한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조는 1800년 어머니 홍씨보다 먼저 죽고만다. 그리고 조선의 개혁은 그렇게 끝나 버리고 만다.


6.한중록과 최후

1795년 회갑을 맞는 해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 《한중록》 저술을 시작한다. 한중록은 이후 십수년에 걸쳐 여러 번 쓰였는데, 내용은 집안의 명예회복이 우선이었다. 한중록의 완성되고 홍씨는 아들 정조가 죽은 후 15년을 더 살아 순조 15년 1815년 12월 15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고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2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후인 1903년에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 있으고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위치해 있다.



7. 한중록 평가

한중록의 내용은 자신의 친정 집안의 명예회복을 위해 만든 변명들로 가득차 있다. 아버지가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등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지만, 직접적인 그래도 참고할 수 있는 당시 시대상과 정치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젊어서 청상과부가 홍씨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당시 조선 사대부와 왕비의 인고의 세월과 궁궐 생활을 70년을 하면서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들 또한 발견하게 된다. 조선후기 궁궐과 당대 풍속에 대해 많은 것이 담겨있는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인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