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의 역사를 후퇴시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평가

올드코난 2016. 3. 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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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이 같아 많이 혼동되는 왕비 이름이 정순왕후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와 영조의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그 주인공으로 단종의 비 송씨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면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조선의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렸으며, 천주교 박해를 비롯해 조선의 발전을 저해시킨 인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조선의 멸망은 이때 시작된 것으로 봐도 된다. 정순왕후에 대해 정리해 본다.

조선의 역사를 후퇴시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평가


1.개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1745년 12월 2일 (음력 11월 10일) ~ 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 조선 21대왕 영조(英祖)의 계비. 정식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현재의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강빈(姜嬪)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金弘郁)의 현손인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이다. 영조의 총애는 컸지만 나이차가 커 아이는 갖지 못했다.



2. 영조의 계비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1759년 6월 9일 정식 중전간택을 통해 김한구(金漢耉)의 딸을 선택하고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린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이며 정순왕후는 15세로 할아버지 뻘이었던 영조에게 시집온 정순왕후는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신부였고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이 시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김씨의 친정 김귀주 및 경주 김씨(慶州金氏)측과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豊山 洪氏)측이 서로 대립을 하고 있었다.


3. 왕대비

영조가 죽고 손자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가 되고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으로 처소를 옮겼다. 정조 시기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는 좋게 묘사가 되기도 하지만, 분명 긴장관계에 있다고 보는게 좋겠다. 특히 개혁 군주 정조에게는 홍씨와 김씨 집안 모두 혁신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홍인한,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끝나고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낸 것도 이런 이유였다.

물론 사료에서는 정순왕후가 정조의 즉위에 공이 있고, 친밀하다고 적혀있지만, 이는 공식적인 예의상의 기록일 뿐이다.


4.대왕대비

정순왕후의 본격적인 악행은 정조의 사후부터 시작된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를 하자 대왕대비로 승격되었고 왕실의 제일 어른이 된다. (순조와 정순왕후는 법적으로 증손자가 된다.) 그리고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게된다.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하던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을 처형시켰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했고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해 신유박해(1801년)을 일으켰는데 이는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리고, 이들을 제거한 자리에는 김관주(金觀柱)와 김용주(金龍柱)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고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한다. 이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1803년 음력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고 물러난다.


5. 사후

순조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자 정순왕후의 권력도 약화되고 1년후 1805년 2월 11일(음력 1월 12일),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6. 뒷이야기와 올드코난 생각

정순왕후를 여군(女君) , 여주(女主)로 자칭한 것은 여자국왕, 여자임금 임을 자처한 것이라고 오랫동안 해석했지만, 당시 여군 , 여주는 동양권에서 왕후 등이 사용하였던 용어로, 정순왕후 외 조선의 다른 대비들 또한 쓰였던 표현이다.

정순왕후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고 당연한 평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에게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여자로서는 불행했을지언정, 권력에 대한 욕구는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집안이 노론과 관련이 있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론과 적극적으로 연대를 했고, 순조 즉위시 수렴청장을 하던 기간에는 모든 국정운영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했다. 신유박해 같은 사건도 노론의 뜻이기도 했지만, 정순왕후의 의지가 있었기에 자행된 만행이었다. 조선의 왕비들 중에서 백성들을 직접 학살하라고 지시를 내린 몇 안되는 왕비였다. 영정조 시대를 거치며 조선의 부흥을 시작하려던 때에 정순왕후의 등장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등장으로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된다. 이에 대해 정순왕후는 비난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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