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 오랫동안 잘못알고 있던 상식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람이 마젤란이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마젤란이 큰 공헌을 한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람은 바로 엘카노였다. 엘카나에 대해 정리해 본다.
최초의 세계일주 성공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án del Cano) 설명
1.개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án del Cano, 1486년/1487년 ~ 1526년 8월 4일 태평양)는 스페인 탐험가로 마젤란 탐험대의 일원으로 세계 일주에 참여했다. 항단의 책임자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막탄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선단의 지휘를 물려받아 1522년 귀환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마치게 된다.
2. 항해전
엘카노는 147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 주 게타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어 전쟁에 참여를 하기도 했고 1509년 스페인 탐사대에 합류했다. 이후 엘카노는 세비야에 정착을 해 상선주가 되는데 스페인 법을 어겨 빚을 지고 이에 대한 변제로 제노바의 은행에 배를 압류당한다. 스페인 카를 5세에게 사면을 요청하고 엘카노는 동인도로 가는 마젤란 탐사대 하위 장교로 복무를 하게 된다.
3. 세계일주 항해의 시작
엘카노는 스페인 차를레스 I세의 해군 사령관으로 복무한 후 필리핀으로 가는 탐사대에 참여를 한다. 1519년 마젤란의 지휘아래 〈콘셉시온 호〉, 〈산안토니오 호〉, 〈산티아고 호〉, 〈트리니다드 호〉, 그리고 〈빅토리아 호〉 등 다섯 척의 배를 끌고 항해를 시작한다. 탑승 인원은 스페인군 241명으로 된 함대였다.
4.선상 반란
엘카노는 마젤란에 대항해서 아마다 함대가 남미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기 전 선상 반란에 가담을 하는데, 마젤란에 진압되고 엘키노는 마젤란에게 용서를 받았고 5개월 간의 고된 노역형을 마친 후 갈레온 선의 선장이 되었다.
5. 마젤란의 죽음
이후 〈산티아고 호〉는 폭풍으로 파손되었다. 함대는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의 동해안까지 항해를 했고,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산 훌리안으로 입항했다. 몇 일 후 그들은 남미의 남단에 있는 현재의 마젤란 해협이라는 통로를 발견하고 그 해협을 통과했다. 산 안토니오에 있는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1520년 11월 28일, 세 척의 배는 다시 태평양으로 항해를 시작했고, 19명의 사병이 1521년 3월 6일 괌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을 했다. 로타 섬 인근의 충돌로 마젤란과 엘카노는 물과 식량을 보급하지 못했고, 결국 충분한 보급을 한 후에 필리핀으로 이동 그곳에서 몇 주를 머물면서, 필리핀 섬 원주민들과 교류를 하면서 원주민들을 카톨릭으로 개종하는데 노력하기도 한다. 1521년 4월 27일 필리핀의 마지막 섬인 막탄 섬에 갔다가, 스페인 왕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추장 라푸라푸와의 전투(막탄 전투)에서 마젤란은 목숨을 잃고 만다.
6. 세계일주의 완성
살아남은 탐사대는 누가 마젤란의 뒤를 이을 지 결정하지 못했다. 최총적으로 통합 함대의 사령관으로 선출된 이는 두아르테 바르보사와 후앙 세르랑이었다. 그러나 4일도 지나지 않아 그들 두 사람은 라자 후마본이 주최한 연회에서 모두 독살을 당한다. 뜻하지 않은 재앙에 흔들린 선교사 후앙 로페즈 데 카르발로는 함대의 지휘를 맡아서, 필리핀 군도를 통과하면서 종잡을 수 없는 항해를 한다.
마젤란 사망 후 이 여섯 달 간의 느린 여행으로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원들은 카르발로의 미약한 지도력에 환멸을 느끼고 엘카노의 입지가 커지게 된다.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는 11월 6일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고 이 항구에서 재보급을 받았고, 정향유와 향신료 등 귀중한 화물을 채웠다. 12월 18일 떠날 준비가 끝났지만 트리니다드 호는 선체가 침수되어 수리가 불가능했다. 카르발로는 다른 52명과 함께 이후에 귀환하길 희망하며 그 배와 함께 잔류한다.
엘카노는 17명의 생존자들과 240명의 탐사대와 31명의 티모르인 생존자 중 4명은 스페인을 향해 인도양과 대서양을 횡단하여 계속 서진을 했다. 그들은 결국 1522년 9월 6일에 산루카르 데 바르라메다 항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사상 첫 세계일주를 해낸 것이다.
7. 항해이후 뒷이야기
몰루카 해협에 남겨진 〈트리나다드 호〉는 4개월만에 수리가 끝났으나 귀항중에 포르투갈 함대에 포획되는 바람에, 3년의 시간이 다시 흘러서 단 4명만이 스페인으로 살아돌아갈 수 있었다.
이 항해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입증하게 되었다.
1525년, 엘카노는 바다로 다시 돌아와서 로아이사 탐사대의 일원이 되어 가르시아 데 로아이사와 함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로아이사는 일곱 척을 지휘하고 있었고, 스페인 차를레스 I세 국왕을 위해 동인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엘카노와 로아이사 두 사람과 그리고 많은 다른 선원들이 태평양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지만, 생존자들은 목적지에 도달했으며, 그들 중 소수만이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엘카노는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리아 헤르난데즈 데르니알데와의 사이에 도밍고 엘카노라고 이름을 붙인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언장에 적자로 인정하였다. 1572년, 스페인 필립 2세 국왕의 50주년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엘카노의 아들을 세습가능한 부글라스의 백작(Marques de Buglas)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스페인의 필리핀 제도 식민지화는 1565년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spi)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 5명이 같이 와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뒤이어 1577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1578년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수도사와 사제들이 차례로 필리핀으로 와서 전도를 시작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학자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마젤란과 엘카노 탐사대의 승무원이었다. 그는 탐사대의 사건에 대해 여러 개의 문서를 썼다. 피가페타에 따르면 그 항해는 약 81,449km를 완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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