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인권왕 키루스 2세 (고레스 왕, Cyrus the Great)

올드코난 2016. 9. 2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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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야 한다. 오늘부터 역사 속 위인들 중에서도 왕이나 지도자들 중 귀감이 되는 인물들을 소개해 본다. 이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지 같이 고민해 보자. 처음 소개해 볼 인물은 키루스 2세다.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정리해 본다. (참고: 위키백과, 세계사 대사전)

위대한 지도자 첫 번째 -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공명정대한 인권왕 키루스 2세 (고레스 왕, Cyrus the Great)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 - 크세노폰


1. 개요

키루스 2세 또는 키루스 대제는 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위대한 왕(샤)이다. 이란인들에게는 건국의 아버지이며 그의 치세에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이 된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당대의 제국들 -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리디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무엇보다 그의 공명정대함은 후세에 귀감이 된다.


2. 이름 어원

고대 페르시아어 Kūruš, 바빌로니아어 Kuraš, 엘람어 Kuraš, 아람어 Kureš, 히브리어: כורש Koreš, 라틴어: Cyrus, 페르시아어: کوروش بزرگ, 성경에서는 כורש(고레스)라고 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크테시아스와 플루타르크는 키루스라는 이름이 태양을 뜻하는 “쿠로스”에서 유래한다고 기록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태양과 같다”는 말은 “코르 (태양)+바시 (같다)”라고 쓸 수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이 점은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첫 왕 잠시드의 “시드”가 태양을 뜻한다는 점에 견주어 볼 수 있다. lement "sun" ("shid").


3. 페르시아의 시작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경)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작은 지방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마지막 황제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나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캄비세스 1세는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공주인 만다나와 결혼하면서 출세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559년 키루스는 안산이라는 메디아 제국의 한 제후국의 왕이 되었다. 하르파구스의 도움을 얻어 기원전 554년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기원전 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의 역사가 시작된다.


4. 주요 업적

그의 업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메디아의 정복, 리디아의 정복, 신바빌로니아의 정복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정복을 한 이후 매우 관대하게 정복민들을 대우해졌다는 점이다. 그의 관용정책은 바빌론에 잡혀 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를 ‘고레스 대왕’이라 불렀다.


5. 사후

기원전 530년 카스피해 동쪽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계 유목민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조언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마사게타이족을 이끄는 여왕이 자신의 아들이 키루스에게 죽자 그에 대한 복수로 키루스 2세를 공격했고 결국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했다고 전한다.

사후 키루스2세의 시신은 파사르가대 근처에 묻혔다.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고,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하면 조촐한 편이다. 이유는 소박하면서도 공명정대했던 키루스2세가 원했던 것이다.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 무덤을 찾았다가 실망했을 정도였다. 키루스 2세 사후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었다.


6. 평가

통치기간 동안 그는 제국을 구성했던 다양한 민족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주었다.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정복당한 민족들에게도 배움의 자세를 취했다. 배운것은 제국에 맞게 응용해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지 않으려 했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등 인권운동의 시초로도 불린다. 부역을 한 백성들에게는 급료를 지불하는 등 고대 국가에서 키루스2세의 인품은 첫 손에 꼽힐 정도로 애민 정신을 보여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리스인들이 다른 국가들은 야만인들이라고 불렀지만, 키루스2세에 대해서는 공명정대한 통치자라고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필자는 키루스2세를 인권왕이라 부르고 싶다.)


이런 키루스 2세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은 그의 생애를 담은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했고, 이후 로마제국, 근대 유럽국가에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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