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尹奉吉) 의사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6. 12. 19. 20:57
반응형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게 만든 위대한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의사에 대해 정리해 본다.


1.가계

본관 파평(坡平), 아명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시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璜),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2. 어린 시절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 입학 다음해 3·1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6년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음. 1928년 18세에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 1929년 오치서숙 졸업


3. 만주 망명

오치서숙 졸업후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활동을 하고 저술도 하다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의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가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4. 훙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義擧)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상세설명 =>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虹口公園義擧))


5. 최후

폭탄 투척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져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여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였다. 윤봉길 의사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는 말을 남겼다.


6. 사후

해방후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했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고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했다.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지역은 윤봉길이 4세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 국민의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7. 평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도움을 주게 된다. 장건상도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 한다.


하지만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이승만 역시 '이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승만 따위가 윤봉길 의사를 어떻게 알겠는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