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虹口公園義擧) 설명

올드코난 2016. 12. 1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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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윤봉길 의사에 의해 거행된 훙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義擧)는 대한민국 독립 운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전환점이다. 이 의거로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전세계에 대한민국 국민들의 독립 의지를 알리게 되는 사건이었다. 정리해 본다.


1. 개요

훙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義擧)는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대한 독립을 위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중국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 칭송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2. 준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윤봉길은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한다.

폭탄은 폭발물 전문가 김웅에 의해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는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윤봉길은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물통은 투척용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제작되었다. 잡혀서 심문을 받지 않고 자결하기 위해서 도시락 모양의 폭탄도 만든 것이다. 폭탄은 두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하였다. 당시 첫 번째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실험을 한 것이다.

3. 의거

1932년 4월 29일 7시 50분 윤봉길은 삼엄한 감시를 피해 홍커우 공원으로 도착했고 최대한 무대 위로 접근하자는 마음에 중국인 경비원이 지키는 문으로 향했고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인으로 속인후 들어갔다. 9시 경에 시작된 관병식은 11시 경에 끝났고 11시 20분 경 2부로 상하이 전승 기념식을 거행했다.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しらかわ よしのり)가 등장해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난 뒤 외교관과 내빈이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11시 4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거의 끝날 순간에 윤봉길이 단상으로 접근해 5m거리에서 물통폭탄을 투척한다. 훙커우 공원 의거가 발생한 것이다.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했고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곧바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한후 피투성이가 되어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4. 피해 현황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수술은 12번이나 했으나 5월 26일 사망했고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도 4월 30일 오전 3시 10분 사망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어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고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다쳤다.


5. 윤봉길 의사 처형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7시 27분 총살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6. 영향

사건 당일 1932년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해 세계 각국 주요신문 제 1면에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했다. 처음 보도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이나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이튿날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 독립운동임이 밝혀졌다.

이 의거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나빠진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어 중국 영토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하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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