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나석주 열사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 동척투탄의거) 설명

올드코난 2016. 12. 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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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월 28일은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일이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가 일경과 대치 끝에 자결한 김상옥과 함께 1920년대의 무장 투쟁 의열단식 항일 운동을 상징하는 독립운동가 나석주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

독립운동가 나석주 열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 동척투탄의거) 설명


1. 나석주 초기 생애

나석주(羅錫疇, 1892년 ~ 1926년 12월 28일)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마중달(馬仲達), 황해도 재령 출생, 아버지 나병헌(羅秉獻)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 2년간 수학하다 1913년 간도로 이주한다.


2. 초기 독립운동

북간도 뤄쯔거우 (나자구 羅子溝)의 독립군 양성학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 4년간 군사 훈련을 받았고 신흥무관학교 졸업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적이 있고 그 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리원으로 옮겨 겉으로는 정미업을 경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1920년 김덕영(金德永)·최호준(崔皓俊) 등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금 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사리원 최병항(崔秉恒)과 안악 원형로(元炯潞) 등의 부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 받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단원들과 합세하여 악질 친일파 은율 군수를 처단한다.

이들의 활동이 봉산·사리원·황주·재령·안악 등 황해도 일원에 확대되자, 일본 경찰은 감시를 강화한다. 이에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김구(金九)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정부 요인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23년 정식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허난성(河南省) 한단(邯鄲)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陸軍軍官團講習所)에 입교하여 사관 훈련을 수료하였다. 이듬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3.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

1926년 톈진(天津)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다. 그 해 6월 톈진에 체류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 김창숙(金昌淑)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폭파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김창숙(金昌淑) 유우근(柳佑瑾) 한봉근(韓鳳根) 이승춘(李承春)등과 의논을 거쳐 거사계획을 세운다. 1926년 12월 나석주는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한다.

1926년 12월 28일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지만 불발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곧 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는데 그곳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총으로 자결을 시도하지만 중상을 입고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어 고등계 미와 경부에게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의열단원이고 나석주 임을 밝히고 사망했다. 후에 장남 나응섭(羅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개명 중국으로 탈출 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4.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였던 서울 중구 명동, 외환은행 본점 앞에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와 나석주 열사의 상이 세워졌다.

5. 의미

당시 조선의 경제 침략의 앞잡이로서 우리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백주에 공격해 일본인을 혼비백산하게 한 사건이며 한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주요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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