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민주학생운동 2.28 대구 학생의거 설명

올드코난 2017. 2. 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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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시절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 한다. 2.28 대구 학생의거는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정리해 본다.


4.19혁명의 도화선, 민주주의 학생운동의 효시로 고둥학생이 주도했던 2.28 대구 학생의거(2.28 大邱學生義擧) 설명


1. 배경

1960년 3월 15일 제 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4선을 하려는 이승만과 여당 자유당과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대결이 치열했는데, 대통령 후보 조병욱 박사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통령은 이승민이 사실상 확정적이었고, 결국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부통령이었다. 더구나 이승만이 고령이었기에 대통령 직을 승계 할 수도 있다는 그런 예측이 있던 상황에서 민주당은 장면 박사가 부통령 후보로 나서고 여당은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나선다.


2. 발단

선거 한달을 앞둔 2월 10일 자유당 경북도당은 대구 지역의 기관장과 학교장들을 소집해 2월27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예정된 자유당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런 지시들을 내린다.

-자유당 유세장에 가구당 1명씩 동원해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낮 12시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민주당 유세날인 28일 일요일에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할 것.

-고교학생들은 정치에 민감하므로 일요일에 일제히 등교시켜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특히 3번 지시사항이 문제였다. 자유당 경북도당에서 내린 이 지시대로 대구의 고등학교들은 2월 28일(일요일) 학생들에게 등교지시를 내리는데 내건 사유는 경북고등학교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등학교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와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 그 외 영화관람 등이 이유를 댔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3. 사건 직전

교사들로부터 등교 지시를 받은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당연히 하가 났다. 일요일에 학교를 가게 되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강제 등교의 목적이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함에 분노한 것이었다. 이에 당시 고등학교 학도호국단 학생간부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2월 27일 밤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10명이 회합을 갖는다. 그리고 2월 28일 일요일 등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를 하게 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을 작성한다.

[참고: 결의문 내용]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4. 2.28 시위 발생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0분 경북고 학생 부위원장 이대우(李大雨)가 학교 운동장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읽고 학생들은 이에 격앙된다. 그리고 경북고생 800여 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며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하고 대구고, 경북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들도 시위를 벌이는데 1,500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경찰과 충돌하게 되는데 대구 시민들은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찰들을 말리고 부녀자는 치맛자락에 학생들의 모자를 감춰 숨겨주기도 했다. 시민들은 이들 학생들에게 박수를 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29일에도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상고의 일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아주 큰 불상사는 없이 시위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경찰들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시위가 번지는 것을 우려해 체포된 120여명의 학생들 중 주동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지만 요주의 학생들을 미행하고 교사들에게 매일 가정방문을 하게 하는 등 감시를 하게 한다.


5. 의미

2.28 대구 학생시위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시위였고 해방이후 식민지 교육에서 탈피하고 이승만 독재를 겪으면서 민주주의를 자각하기 시작한 학생들이 독재에 항거한 학생 운동이었다.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특히 해방이후 사실상 첫 학생 운동으로 얼마후 4·.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승만을 하야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6. 기념 사업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이 주관하여 대구시민 성금으로 명덕로터리에 2.28대구학생기념탑을 세웠고 1990년 2월 28일 2.28기념탑을 명덕로터리에서 두류공원으로 이전한다. 1999년 2월 28일 문희갑 대구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위치한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민주의거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선포했다. 경북고등학교에 2.28기념탑과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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