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이 시기인 4월 5일 수촌리 학살 사건과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제암리교회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이 발생한다. 정리해 본다. (위키배과, 다음 백과 참고)
1. 제암리와 제암리교회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주로 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으로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제암리 교회에서는 문맹퇴치 교육이 이루어졌고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해 동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저변의 의식화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제암리교회(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는 1905년 8월 5일 처음 건립되고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고 하며 이후 교인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 건물이 마련되었다.
2. 사건 배경 발안 장날 시위 발생
1919년 3월 1일 3.1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가 되는데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천도교도 안정옥,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상렬 등이 3월 31일 만세시위를 결의한다. 1919년 3월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진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지르고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둘러 이정근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하고 홍원식 안종후 안진순 안봉순 김정헌 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히고 이들은 고문을 받은 후 풀려 났다.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및 파손하고, 정미업자 사사카(佐板) 등 43명이 3리 밖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는데 사사카는 이후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의 길 안내를 한 인물이다.
3. 수촌리 학살 사건
3.31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고 4월 2일 일본은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해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대장으로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고 6일까지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한다. 4월 3일 수촌리 구장이며 천도교 전교사 백낙렬, 수촌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한다.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일본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이를 수촌리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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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암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본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이는데 이때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4월 13일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다. 다른 지역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되었지만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은 상태였고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향한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는 말로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는데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온 것으로 보아 사전에 지역 주짐들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짐작해 본다.
교회에 사람이 모이고 아리타 중위는 교회 밖으로 나와 사격 명령을 내리고 교회를포위하고 있던 일본군은 창문에서 사격을 개시하고 교회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는데 이때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일본군들이 다니며 방화를 했다.
교회에 불이 붙자 홍순진(추정)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안상용(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 발각되어 살해당하고 노경태(노불의 증언)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태성의 아내(당시 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고 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건으로 안종후를 비롯 남자 21명, 여자 2명이 학살당했고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가 김성렬 등 6명도 학살한다.
5. 드러난 진실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시위로 인해 수촌리 감리교회와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서울에도 알려지고 일본은 부정한다. 하지만 4월 16일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영국 공사관 커티스, 프리랜서 기자인 테일러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해 전 세계에 알려진다. 이후 4월 18일에는 세브란스병원 의사 스코필드(석호필)가, 4월 19일에는 영국 영사 로이즈와 수원 지방 교회를 관리하는 노블 감리사를 비롯하여 케이블, 빌링스, 벡크 등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녀갔다. 현장을 찾아가던 중 스코필드(석호필) 박사가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게 되고 국제사회에 사선을 알리게 된다.
6. 몇가지 논란과 진실
(1) 시위 시작일: 발안 장날은 5일과 10일에 여는 5일장으로 음력으로 개시되었으며 현재와 같이 양력장이 된 것은 1937년 이후이다. 발안 장날 시위날에 대해서는 당시 일제 측 기록과 발안 장날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따라 3월 31일에 일어난 것으로 본 것이다.
(2) 교회 문 못질: 한때 교회에 가둬둔 뒤 문에 못질하여 막았다는 말이 있었지만 창문에서 총으로 들이대고 사격하던 와중에 교회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 문에 못질은 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지만 못질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3) 일본의 우발사건 주장: 일본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에서 계획적인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7. 뒷이야기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고 끌 수 없는 불꽃 (Unquenchable Fire)이라는 책을 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아사히(朝日)신문 2007년 2월 28일자 보도 - 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대장의 일기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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