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아웅산 테러사건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설명

올드코난 2016. 12. 14. 12:39
반응형

1983년 10월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 공작원 3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자행된 폭탄테러로 전두환 대신 애꿎은 사람들만 희생되었다. 버마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본다.

북한 김일성의 전두환 암살작전, 아웅산 테러사건(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설명


1. 개요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자행한 테러로 1983년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국립묘지에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버마(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폭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도착하기 전이어서 해를 입지 않았다.


2. 사건 전

1983년 10월 8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과 공식 순방길에 오른다. 첫 방문지는 버마(현재 미얀마)는 10월 9일은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 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날에 맞춰 출발한다.


3. 사건 직전 상황

10월 9일 당일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고 오전 10시 전두환은 행사장을 향해 출발한다. 예행연습을 마치고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한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오전 10시 26분 전두환 측근으로부터 무전으로 차량 정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이 약 30여 분 뒤에 지연도착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한 번 더 애국가 예행 연습을 한다.


4. 사건 발생

테러 장소에 미리 대기해 있던 폭탄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인 신기철은 전두환 대통령이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한다는 예정을 알고 있던 상태였고 전두환이 늦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행 연습 중에 나온 애국가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 오전 10시 28분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 스위치를 작동 시키고 폭발사고가 발생한다.

이 폭발로 현장에 있던 경제부총리 서석준과 수행공무원 기자를 포함하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다. 전두환은 차량 정체로 인해 애당초 도착 예정인 10시 30분에서 30분 뒤인 11시에 도착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두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5.사망자 17명 명단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버마 주재 대한민국 대사, 김재익 대통령 비서실 경제 수석 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현섭의 아버지),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정태진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6.사건 처리

당시 버마 정부는 테러범 추적에 최선을 다했고 이틀 후인 10월 11일과 12일에 걸쳐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강민철 대위와 진용진 소좌(소령) 등 2명을 체포하고 신기철 대위를 사살했다. 이후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공식발표했고, 11월 6일 북한에 대한 국교 단절과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는 조처를 취했다.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지만 11월 22일 미얀마 검찰이 체포된 범인들을 수사해 북한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밀파했다는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다. 테러 용의자 진용진 소좌는 1985년 양곤 현지에서 진술을 거부하다 처형됐다. 남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무기징역을 살다 25년 복무중이던 2008년 5월 18일 53세를 일기로 양곤 인세인 교도소에서 중증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사망전 강민철은 북한과 미얀마간의 외교관계 복원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남북한 어느 곳으로도 가기 싫다는 말을 남겼다.


7. 사건 영향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약 한 달 전 9월1일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당시는 ‘남북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100여일 연속으로 진행 중이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사건은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사망자 17명은 합동 국민장이 거행되었고 대학가 가을 축제들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하고 TV는 쇼/오락 방송 대신 보도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당시 버마는 한국 보다는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자국의 영토안에서 더구나 독립 영웅 아웅 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에 대해 격노한다. 사건 발생 즉시 버마는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단절해 버린다. 버마 외에도 서사모아 등의 국가들도 북한과 수교를 단절해 버렸고 북한의 입지가 줄어들게 된다. 사건 후 북한과 단교를 유지해 오던 미얀마 정부는 2007년 4월 26일 북한과 재수교를 하고 대한민국과는 29년간 양국 정상 간 왕래가 없다가 2012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한중일 정상 회담을 마친 이명박 대통령이 극비리에 미얀마를 방문하고 같은 해 10월 8일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8. 사건 후

이 사건은 전두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전두환은 이를 호재로 삼으려 했다. 당시 전두환은 집권 3년차로 3S 정책 등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 하지만, 민주화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때에 발생한 아웅산 테러는 북한과의 전쟁 위기 분위기를 조성하고 안보를 빌미로 민주인사 및 근로자들을 탄압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웅산 테러의 상처가 가실 즈음 민주화 운동은 다시 시작된다.


끝으로, 이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17명 대신 전두환이 죽었더라면 무척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조금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17명의 희생은 슬프지만, 전두환 생존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될 것 같다.  1931년 1월 18일 생인 전두환이 올해 벌써 86세가 되었다. 너무 오래산다. 욕 먹는 놈이 오래산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글에 공감하신다면 SNS (트위터, 페이스북)로도 널리 널리 알려 주세요. ★ 글의 오타, 하고픈 말, 그리고 동영상 등이 재생이 안되는 등 문제가 발견 되면 본문 하단에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