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 의혹과 내용

올드코난 2016. 12. 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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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때 한국인을 태우고 귀국하던 우키시마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리해 본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


1. 개요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浮島丸號沈沒事件, 일본어: 浮島丸事件 うきしままるじけん)은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으로 불리며 1945년 8월 24일, 한국인 피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원인 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이다.


[참고: 우키시마 호] 오사카 상선이 1937년 3월 15일 준공해 운행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에 특설함선으로 징용되었다.

*제원: 총 톤수 4730톤/ 순톤수 2810톤/배수량 8085톤/ 전장 108.43m/ 폭 15.7m/출력 최대 4694마력 (4000마력)/ 속력 최대 17.4노트, 항해 16노트


2. 사건 발생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항복 선언을 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8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마루 호는 일본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 수천명 (일본 공식 집계 3500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해 부산 항으로 향한다. 이틀 후인 24일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시 인근 마이즈루 항 근처에서 원인모를 폭발과 함께 침몰하고 만다.


3. 원인불명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는 명확하게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2가지 의혹이 제기되는데, 미국이 깔아놓은 기뢰에 의해 침몰한 우발적인 사고라는 설과 일본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이중 기뢰에 의한 사고였다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나야 하지만 1954년 10월 배를 인양하고 보니 배의 바닥에 난 구멍은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내부 폭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며, 사고 당시 침몰 전 소리가 3,4번 들렸고 물기둥이 50~60m 정도 솟아 올랐는데, 이는 기뢰에 의한 폭발로 볼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있다.


혹시 일본에 의한 고의 침몰은 아니었을까? 

아직은 의혹일뿐이다.


4. 피해 현황

공식적으로는 사고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진실규명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5. 일본 책임 회피

한동안 잊혀지던 이 사건은 1977년 8월 일본 NHK 방송에서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러 ‘폭침’이 방영되면서부터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교토 지방재판소에 일본의 사과와 28억엔의 배상을 요구하는 청구 소송을 제소했다. 이에 2001년 8월 23일, 1심 법원인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총 4500만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하지만 2003년 2심인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04년 11월 30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개정도 하지 않은 채 상고를 기각하고 말았다. 이로인해 아직까지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6. 올드코난 생각

일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조선인)들은 셀수가 없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이다. 우키시마 호 침몰 당시 이 배에 한국인이 얼마나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일본 측에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뻔뻔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때문이다. 우키시마 호 사건같은 일들은 잊어서도 안되며, 진상이 규명되고 사죄를 받아낼때까지 계속해서 거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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