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을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국부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이승만은 국부로 불려서는 안되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승만 추종자들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었다 주장하지만, 이승만은 반민주주의자였다. 독재자 이승만이 어떤 인간이었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설명해 본다.
이승만 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6.25. 전쟁당시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대학살 거창 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설명
1. 개요
거창 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으로 불리며 6.25. 전쟁중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2. 사건 배경
1950년 6·25 전쟁 발발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갔던 한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음해인 1951년 1.4후퇴를 거치며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인 1951년 초반에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가지 못했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들이 지리산에 남아있었는데 이들이 후방에서 국군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었다. 전방에서는 북한과 중공군 후방에서는 빨치산이 있다는 것은 미군과 국군 입장에서는 당연히 곤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을 단일화하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기로 한다.
3. 사건 발생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배치된다. 당시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이 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오익균(吳益均) 연대장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이틀 간에 걸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다. 그리고,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산(朴山) 총살했다. 학살당한 570명 중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한동석 소령이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을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4. 조사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학살 시의 사진,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고 이를 근거로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된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이 집요하게 방해를 하는데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들었다. 하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3월 29일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된다.
5. 사건 처리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3부 장관이 사임하고 김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은 국회의 결의로 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재판 결과 오익균 대령, 한동석 소령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6. 이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 (生火葬)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기 1996년 관련 특별법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7. 의미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6·25전쟁 중에 일어난 다른 민간인 학살처럼 군이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집단학살로서 이는 이승만 정부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승만이라는 자가 국민들을 (요즘 표현대로) 개돼지 정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살을 자행한 것은 군 간부들이지만,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이승만이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이승만이라고 자를 국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승만이 이룩했다는 것은 거짓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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