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최악의 부정 선거 3.15 부정선거 설명

올드코난 2016. 12. 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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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들은 이승만 때문에 남한이 민주국가가 되었고 공산당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그런 사상을 논하기 전에 이승만은 독재자였고, 반민주주의자였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3.15 부정선거였다. 정리해 본다.

대한민국 최악의 부정 선거이며 이승만 몰락의 시작이 되었던 3.15 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설명


1. 개요

3·15 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는 3·15 개표조작(三一五開票造作) 사건으로도 불린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4선에 성공하고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결과는 부정선거로 밝혀지게 된다.


2. 배경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함에 6.25.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고 여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2번)으로 제한시켰던 법을 고쳐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이 이승만에 분노한다. 그리고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의석수가 불어나자 이승만의 자유당은 큰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4선을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영국 집권을 꿈꾸고 있던 것이다.


3. 선거일 변경

정상적으로는 4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선거일을 바꾸는 꼼수를 쓴다. 이전 대통령 선거일은 1956년 5월이었다. 하지만 1960년은 이보다 두 달 앞당겨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된다.


4. 조병옥 급사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 2월 25일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참고로 지난 3선에서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해 이승만이 당선이 된 것인데, 4번째 대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이승만 당선이 사실상 확정이 되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5. 사실상 부통령 선거

이때 이승만은 85세였다. 당선후 임기가 끝날즈음에는 90을 바라보는 고령이다. 또, 임기중에 사망을 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리되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하는게 된다는 점에서 부통령 선거에 전 국민의 관심을 갖게 된다.


6. 부정 선거

이승만의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을 위해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한다. 여기에 정치 깡패를 동원하고, 공개 투표, 완장 부대 동원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편법을 동원했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선거 전날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는다.


7. 선거일

3월 15일 선거가 치러진다. 이날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지 야당을 뽑는지 대놓고 감시하고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 담화를 통해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8. 개표 결과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하는데 문제는 개표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투표한 사람보다 투표 용지가 더 나올 수 있는 상황으로 그렇게 되면 부정선거가 들통 나게 된다. 그러자 자유당은 최인규 내무부 장관에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최종집계 결과는 총투표자 1,000여만 명 중 대통령 단독 후보였던 이승만 9,633,376 명으로 88.7% 득표율을 기록했고 부통령 후보 이기붕 8,337,059 명으로 79%를 득표 1위를 기록하며 당선된다. 2위를 한 민주당 장면 후보는 1,843,758 명으로 17.5%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9. 분노한 국민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개표전부터 부정 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결국 선거 다음날인 1960년 3월 16일 마산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 마산시위가 발생하고 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한달 후 4·19 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10. 결과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재판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으로 이관되었다. 재판 결과, 3·15부정선거 당시의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그 뒤 감형·특사 등으로 거의 풀려나게 된다.


11. 의미

3.15 부정선거는 결국 이승만 정권을 몰락시킨다. 민주국가에서 투표는 민심의 표현이다. 민심을 외면하는 정부는 반드시 몰락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3.15. 부정 선거 이후에도 현재까지 선거중에 여러 가지 잡음이 끊이지 않지만,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많이 과거에 비해서는 매우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낮아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3.15 부정선거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으로 불의에 맞서 싸워야만 민주주의가 지켜진다는 소중한 경험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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