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황태성 사건, 황태성과 박정희 관계 설명

올드코난 2016. 10. 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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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JTBC뉴스룸에 잊고 있었던 이름이 등장했다. 바로 황태성이다. 박정희가 숨기고 싶었던 이름이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황태성 사건, 친형보다 따랐다는 황태성을 처형해 버린 박정희


1.황태성 생애 요약

황태성(黃太成, 초명은 黃泰成, 1906년 4월 27일 ~ 1963년 12월 14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부상으로 황대용(黃大用)이라고도 불리었다.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 출생,

1921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24년 일본인 교장 배척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

1925년 경성 연희전문학교 상과 입학, 퇴학 처분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결성 참여. 김천 지역에서 신간회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 출옥 후 경상북도 김천에서 재활동

1935년 일본 경찰에 검거. 3년 6개월 복역

1944년 일제 총독부의 요청으로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활동

1945년 조선공산당 활동/ 1946년 10월 월북

1948년 황해도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업성 지방관리국장과 외무성 부상과 상업성 부상을 거쳐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를 역임

1961년 8월 30일 대한민국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남북통일 협상을 위해 밀사로 남하 (가능성/설)

1961년 12월 20일 중앙정보부 황태성을 체포 간첩죄 적용.

1963년 12월 14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교도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2.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인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갈 때 황태성에게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다. 또한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 황태성이 보증을 서줬다. 이런 긴밀한 관계였기에 황태성은 박정희가 자신을 만나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후 황태성이 체포된후 사형에 집행되었을 때 박정희가 황태성의 사진을 보면서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은 있었던 것인지.


3. 북한 밀사

황태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외무성 부상(外務省 副相)과 상업성(商業省) 부상을 거쳐 무역성(貿易省) 부상 겸 무역상 서리(貿易相 署理)를 지냈다. 이후 남한에서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당시 혁명위원회 의장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통일사업을 하겠다며 대남 밀사로 내려와 외종매(外從妹)의 아들 김민하(金玟河)의 협조를 받으며 연락을 취하던 중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었고 당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를 받았다.


4. 사형

1961년 12월 20일 황태성이 체포된후 2년후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약속했기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당시 박정희 후보의 가장 큰 위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었다. 이때 윤보선이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공산당 자금으로 조직”되었다는 말은 박정희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정치 공세였다. 이때 박정희는 자신을 빨갱이로 모는 윤보선을 비판했지만, 그가 권력을 잡은후 많은 민주주의 인사들을 종북으로 몰아 고문을 가하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는지. 대선이 끝난후 박정희는 황태성을 살려 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1963년 12월 14일 황태성을 처형해 버린다.

박정희의 친형보다 가까웠다는 황태성을 처형한 박정희의 비정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


5. 사후

황태성의 생질녀인 임미정과 남편 권상릉(權相凌)은 2006년 11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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