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유럽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 설명

올드코난 2016. 12. 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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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본다.


1.배경

1960년대 후반은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가 아직 앞서 있던 시기였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출주도형 산업을 주도하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외화획득을 위해 서독에 1963년 12월에는 광부를 파년하고 1966년 10월에는 간호사를 파견한다. 이들이 온갖 차별과 고생을 하면서 번 돈(외화)은 대부분 한국으로 송금되고 한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서독 근로자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재유럽한인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장기집권을 꿈꿨던 박정희에게 이들은 외화만 갖다 바치면 좋았겠지만, 이들이 박정희 독재를 반대한다는게 걸림돌이었다.


2. 사건 발생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진 등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 등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했고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3. 재판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1969년 3월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4. 내막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복이 두려워서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5. 사건의 파장

동백림사건 수사는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이상/이응로 등을 위한 국제사회의 탄원운동 등으로 대한민국은 인권후진국으로 낙인찍혔다 . 또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고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주권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국가 신인도가 추락한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하고 정규명·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6. 진실규명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진실위원회)는 2005년 2월 3일 위원회에서 동백림 사건을 1차 조사대상 사건7건중 1개로 선정, 담당 조사위원 및 조사관 배치 완료하고 조사를 거쳐 2006년 1월 26일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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