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올드코난 2016. 12. 1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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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 군이 전두환 정권 제5공화국 말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6월 항쟁이 촉발되었다. 6월 항쟁의 사실상의 시작이며 불씨였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본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비도덕성을 보여준 6월항쟁의 불씨였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내용 설명


1. 박종철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은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 출신으로 부산 혜광고등학교 졸업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입학, 언어학과 학생회장이 된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다음해인 1987년 1월 13일 자정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고 고문에 의해 다음날 사망하고 만다.


2. 사건 발생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 경찰은 박종철을 연행한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된다. 취조실로 끌려간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에 대해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고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한다. 그리고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다음날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공식 사망했다. 박종철의 시신은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3. 경찰 발표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15일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경찰의 발표는 국민들이 비웃음과 분노를 자아냈다. “탁 치니 억”은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남았다.


4. 밝혀진 고문 사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2016년 현재 창원시장)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5. 은폐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지만, 정호영은 5.18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였다. 그런 자의 입에서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말이 나온것은 위선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호용을 비난했다.


6. 진상 폭로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한다. 대공경찰의 대부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 6월 항쟁의 불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 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 혹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됐다고 평가 받는다.


8. 기념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박종철 가묘를 만들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추모비와 흉상이 세우어졌다. 2007년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들과 대학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모금으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 졌고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고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등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9. 뒷이야기

-당시 경찰이 박종철을 고문하여 소재를 밝히려 했던 장본인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 비난을 받았다. 이는 고인이 된 박종철 열사에 대한 사람된 도리가 아닌 것이다. (배신자 소리를 들을 만했다.)

- 수사를 지휘했던 신창언 검사는 이후 민자당(현 새누리당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당시 박상옥 검사는 사건이 축소, 은폐된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비난을 받았지만 5월 6일에 정의화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과 새누리당의 단독 처리로 인해 임명동의안이 통과되었고 같은 달 8일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 담당 검사였고 수사 당시 사건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안상수는 한나라당 당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창원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0. 마무리

박종철 고문사건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비도덕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월항쟁에 박종철 열사의 희생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당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조용히 있어야할 전두환과 정권 실세들을 비롯해 정치검사 안상수 박상욱 같은 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너무 쉽게 잊고 용서한 대가는 관용이 아니라 탄압으로 돌아온다.  박종철 고문사건을 잊지말고 가해자들 역시 잊지 말자. 잊는 순간 우리들 중 누가 제2의 박종철고문사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이름으로 이들을 심판해야할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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