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친일 행위를 참회한 지식인 백릉 채만식(蔡萬植) 선생 평가

올드코난 2016. 12. 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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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행적을 벌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의 친일행적보다 더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자신의 친일행적을 밝히고 용서를 구한 지식인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채만식 선생이 있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친일 행위를 사죄하고 참회한 양심 있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사례 백릉 채만식(蔡萬植) 선생 생애와 평가


1. 생애 요약

채만식(蔡萬植; 1902년 6월 17일 ~ 1950년 6월 11일)은 1902년 6월 17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동상 마을에서 아버지 채규섭(蔡奎燮)과 어머니 조우섭(趙又燮) 사이의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백릉(白菱)과 채옹(采翁)이다. 1920년 은선흥(殷善興)과 혼인 두 아들을 두었고, 그 뒤 1936년에 만난 김씨영(金氏榮)과 동거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1914년 임피 보통 학교 졸업 1918년 경성 중앙 고등 보통 학교 입학, 재학 중 은선흥(殷善興)과 결혼, 1922년 중앙 고등 보통 학교 졸업(재13회), 그해 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 고등 학원 문과 입학, 1923년 여름 방학에 귀국한 뒤 복교하지 않아 이듬해 장기 결석으로 퇴학 처분 되었다. 1924년 경기도 강화의 사립 학교 교원을 시초로 동아 일보사, 조선 일보사, 개벽사에서 활동, 1936년부터는 창작에만 전념 1945년 4월 고향으로 낙향 1945년 8·15 해방을 맞았다. 폐결핵이 악화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950년 6월 11일 이리시 마동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계남리 (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계남 마을) 선산에 안장되었다.


2. 작품세계

일제강점시 시대 불안한 사회를 배경으로 현실 반영과 비판,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소설과 희곡을 썼다.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사회적 상황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30년 대에는 농촌과 사회상을 담은 단편들과 궁핍한 사회 현실 속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무능한 삶을 풍자적·반어적 수법으로 표현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현실을 부정하고 냉소하는 작품등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레디 메이드 인생, 명일, 탁류, 태평천하, 치숙, 소망, 제향날, 태평천하,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냉동어, 종로의 주민 등이 있다.


3. 친일행적

채만식 선생의 작품 중 친일을 했다고 평가를 받는 작품은 몇 안된다. 일제 강점기 말기 일제는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고, 특히 지식인들을 회유하거나 억압을 하게 되는데, 채만식 선생도 이 시기 흔들이고 만다 그래서 ‘여인 전기’라는 친일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4. 친일사죄

하지만, 채만식 선생이 다른 친일파들과 달랐던 점은 진심으로 반성을 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친일 행위를 감추려 들지 않았고 자신의 죄였음을 밝히고 반성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후부터 1950년 사망을 할때까지 일제 말기 지식인들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고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현실과 과도기의 혼란상 등을 담은 서적을 남겼다.


5. 기념사업

1963년 6월 11일 이치백, 이병훈 등 군산의 문인들로 시작한 제1회 채만식 선생 추모 문학의 밤을 개최해 이후 크고 작은 추모 행사가 매년 군산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1984년 8월 2일 군산 월명 공원에 채만식 문학비가 세워졌고, 1996년 7월 30일 군산시 장미동 구 조선 은행 건물 옆에 채만식 소설비가 세우졌다. 2001년 3월 군산시 내흥동에 신축 개관한 채만식 문학관과 군산시 임피면에 위치한 채만식 도서관 등이 있다. 군산시와 군산 문화원에서는 2003년부터 채만식 문학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6.마무리

채만식 선생의 친일행적은 분명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친일행적은 다른 수많은 친일매국노들에 비하면 아주 크지는 않다. 그래도 그의 친일 행적은 비판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채만식 선생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분명한 사죄를 표명했고 책임을 지려했다는 점이다. 채만식 선생에게 친일을 한 시기는 그의 짦은 인생에서도 짦았던 시간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문학가로 한민족으로 부끄럼이 없던 시기였다. 


우리가 채만식 선생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한 행위에 대해서는 설령 그것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도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을 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친일 매국노들은 반성 대신 애국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권력을 잡았고 그 뿌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반성하지 않은 이들 친일파들에게 채만식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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