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단두대로 처형당한 프랑스의 왕 ‘마지막 루이’ 루이 16세에 대해 알아 본다.
단두대로 처형당한 프랑스왕 루이 16세(Louis XVI of France) 평가
1.루이 16세 개요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Louis-Auguste).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루이 15세의 손자다.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재임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루이라는 왕명의 마지막이라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로 불린다.
2. 선량했지만 무능했던 왕
루이16세는 실재로는 마음이 착했다고 전한다. 프랑스의 개혁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과감성과 결단력이 떨어진 인물로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부인은 영화나 대중매체에 자주 나오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였는데 사치도 심했고, 현실인식이 결여된 인물이었고, 당시 프랑스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져갔지만,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나름대로 튀르고를 등용해 개혁을 하려는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의 반대에 굴복했고, 이후 기용한 네케르는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 프랑스의 재정 악화를 초래한다.
당시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부터 위기가 시작되어 루이16세 시대에 터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루이 16세는 여러 인물들을 기용해 보지만, 계속해서 개혁에 실패를 하게 된 것도 오래된 관행과 특권층들의 반발과, 백성들을 위한다지만, 결국에는 왕권유지가 우선이라는 한계 때문에 루이16세의 개혁은 성공할 수가 없었고, 이는 민생도탄으로 이어져 결국 프랑스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 프랑스 혁명
루이16세는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열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게 목적이었다. 이를 아는 부르주아 계급은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귀족들이 거부한다. 이후 부르조아들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는 이 선서가 ‘테니스 코트 선서’다. 이는 ‘국민의회’를 탄생하게 하는데 루이 16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한다. 이에 팔레 루아얄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1789년 7월 14일 오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으로 왕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했지만 국경 근처 바렌느에서 발각 파리로 이송되고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4. 루이 16세의 재판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가 구성되어 첫 번째 회의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루이 16세는 새로 생긴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1793년 1월 21일에 사형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서 루이 16세는 721명의 투표자 가운데 무죄 334표, 유죄 387표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5. 최후
그리고 그는 바로 그날 콩코드 광장에서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에 의해 단두대에 의한 공개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최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다르다. “나는 망했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살려달라고 발버둥치자도 않았고 사형집행관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해 단두대로 끌고 올라갔다는 마지막 모습은 사실이 아니다. 처형되는 순간까지 왕으로서의 당당함과 위엄을 잃지 않으려 했다.
루이 16세는 단두대 계단 앞에서 코트를 벗기를 거부한 이유는 윗옷을 벗는 것은 예의범절에 벗어난다는 이유였었다. 사형집행관이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자 스스로 코트를 벗었으며 수갑도 차기를 거부했지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나는 기소된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6.루이 16세 평가
대중매체를 통해 알고 있는 루이16세는 단두대 앞에서 왕의 체통을 잃고 발버둥 치는 겁쟁이 등으로 묘사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지만, 처형직전까지 위엄을 잃지 애썼다. 품위는 분명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유약한 면은 당시 혼란의 프랑스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왕의 품위를 유지하는 법도 알았고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또한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는 실천의 의지와 실행력이 부족했다. 개혁은 곧 기득권들들의 청산에 있는 것이지만, 루이 16세는 귀족에게 계속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당시 프랑스 귀족의 힘이 강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당시 프랑스 왕의 권위는 루이14세 이후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귀족에게 밀렸다기 보다는 이들을 설득하지를 못했고, 이들과 싸우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만일 루이16세가 당시 일반 국민들과 브루조아와 손을 잡겠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었다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한 순간 루이16세의 운명은 결정이 되어 버렸고, 결국 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루이16세의 교훈은 백성대신 기득권(귀족 같은)을 선택한 왕족은 반드시 망한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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