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역대 명나라 황제들

올드코난 2010. 6. 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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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洪武帝, 천력 원년 9 18(1328 10 21)~홍무 31 5 10(1398 6 24) 왕조 1 황제(재위 1368~1398)이다. 이름은 주원장(朱元璋)이고 자는 국서(國瑞)이다.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고 묘호(廟號) 태조(太祖).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왕조는 14세기에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호주종리(濠州鐘離) 출신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원말에 세력을 떨친 홍건군(紅巾軍)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홍건군의 일부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출신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여 1368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순제(토곤 티무르) 대도(북경)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북쪽으로 몰아내고 ()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말년에 한고조 유방을 능가할 정도의 공신을 숙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좌승상 호유용(胡惟庸)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등을 사형에 처해 말년에는 대부분의 개국 공신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398 홍무제가 죽자 2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가 즉위하였다

건문제
명혜종 건문제 주윤문(明惠宗 建文帝 朱允炆, 1377: 홍무(洪武) 10 12 5~?) 명나라 2 황제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장손이자 의문황태자(懿文皇太子) 주표(朱標) 아들이다. 역대 명나라 황제 숭정제(崇禎帝) 함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황제로 숙부인 연왕 주체(朱棣)에게 황위를 빼앗겼다. 조선 단종 비슷한 부분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초기 생애

홍무 10년인 1377 12 5 당시 황태자 주표와 후궁 여씨 아들로 태어났다. 주윤문은 서장자로서 차남이었으나, 황태자비 상씨 소생의 적장남 우왕 주웅영(朱雄英) 어린 나이에 죽자, 주윤문이 황장손(皇長孫) 되었으나, 얼마 후에 상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주원장의 적장손이 되었다. 그러나, 1392 4월에 황태자 주표가 38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4남인 연왕 주체와 장손 주윤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사 유삼오(劉三吾) 장자가 죽었으면 장손이 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에 주원장은 주윤문을 황태손에 책봉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천명하였다. 황태손인 주윤문은 유삼오와 방효유,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등에게 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참모로 삼아 차기 황제로서의 준비를 탄탄히 다져놓고 있었다.

정난의

1398 할아버지인 주원장이 71세를 일기로 붕어하자, 주윤문이 22세로 명나라의 2 황제로 오르니 이가 혜종 건문양황제(惠宗 建文讓皇帝)이다. 건문제는 제일 먼저 할아버지 주원장의 유지에 따라 숙부들에게 남경으로 문상을 오지 말라 하였다. 또한 너무나 커져 있던 숙부들의 세력을 끊으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왕 주체를 필두로 번왕, 건문제의 숙부들과 사촌들은 이에 반발하며 주체를 중심으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부에 대항할 방책을 세우고 있었다. 건문제는 이에 대해 세가 약한 번왕들을 수도인 남경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체포한 , 유배를 보내거나 죽여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건문 1년인 1399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정난의 '(靖難之變)이다.

건문제는 신료들에게 주체를 막으라고 지시하였으나 관군은 북방에서 잔뼈가 굵은 주체군에게 계속 지고 있었다. 건문제는 이번 사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번왕들은 주체의 편에 서거나 중립이 되어 있었고, 조정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주체는 무려 3년간이나 반란을 끌었는데, 이유는 번왕들과 장군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고 병기와 군마를 모집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건문제는 빨리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관군이 계속해서 패전하는 바람에 물자 등이 바닥났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402 7, 연왕 주체는 결국 수도 남경성을 포위, 함락 시킨다. 건문제는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건문제의 행적은 전혀 길이 없다. 얼마 , 연왕 주체는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나라의 3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이다.

건문제의 최후설

건문제의 최후설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지를 , 불에 죽었다는 설과, 남경을 빠져 나와 양자강에 투신했다는 , 도사가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설은 승려가 되어 중국 곳곳을 유람하며 다녔으나, 정통 5년인 1440, 영락제 주체의 증손자인 정통제(正統帝) 때에 이르러 신분이 알려져 북경에서 살다가 1445 생을 마쳤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원래 건문제는 달리 묘호 없고 시호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 주어졌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들어선 , 남명의 홍광제 건문제에게 묘호를 혜종(惠宗)으로, 시호를 양황제(讓皇帝) 추증하였다.

영락제(永樂帝, 1360 5 2~1424 8 12) 왕조 3 황제(재위 1402~1424)이다. 이름은 주체(朱棣)이며 홍무제 4남이다.

1402년에 자신의 조카이며, 황제인 건문제 자신을 비롯한 숙부들, 홍무제의 아들들의 군권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니,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이를 '정난의 '이라고 한다.

유생 방효유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그의 십족(구족에다 방효유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방효유의 문집을 애독하는 모든 사람 추가) 차례로 처형하고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방효유의 처와 자녀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하여 화를 면하였다.

몽골족 교전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아프리카 자신의 심복인 정화 보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永樂大典) 완성했다

홍희제(洪熙帝, 1378 8 16~1425 5 29) 중국 명나라 4 황제(재위 1424~1425)이다. 이름은 주고치(朱高熾)이다

생애

묘호 인종(仁宗), 연호는 홍희(洪熙)이다. 홍무제 손자이며, 영락제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 장남이다. 1395(홍무 27)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아버지 주체의 후계자로써 연왕세자(燕王世子) 책봉되고 정난의 에서 아버지의 영지인 연의 영토를 지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문무에 빼어났다고 하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 하였기에 아버지인 영락제는 흡족해 하지 않아, 황태자로써의 폐위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주첨기(명나라의 5 황제 선덕제) 영민하고 날렵하여 영락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자를 생각하여 홍희제의 태자 폐립 문제는 백지화 되었다. 그리고 영락제는 주첨기를 매우 총애하여 황태손으로 삼고 벌써부터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홍희제는 비정상적으로 뚱뚱하여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걷는 조차 힘들었다. 영락제가 외정(外征) 나가는 경우, 궁궐을 비우는 일이 많아 궁궐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감국(監國)으로써 업무와 정사를 경험이 있었으므로, 황제가 되어 황태자 시절의 정치 능력을 발휘했다.

즉위후

아버지 영락제가 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펼친 대에 반해 홍희제는 정난의 건문제의 편에 몰살을 당한 일가의 신원을 회복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정책과, 영락제에게 간언하여 투옥된 하원길(夏元吉) 석방하는 인정(仁政) 베풀었다. 또한 영락제의 외정(外征)으로 인한 국고 손실을 막기 위해 홍희제는 대외 팽창 정책을 억제하고, 다시 난징(南京)으로 천도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죽음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의 적용을 명확히 하고 궁형(宮刑) 금지했으며 내치의 회복을 위해 힘썼으나 재위 8개월만에 붕어하였으므로, 명나라에서 태창제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짧은 황제가 되었다. 1425 5 29일에 붕어하였고 다섯 명의 귀비가 순장되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1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선정을 베풀고 대내 안정을 확고히 하여 다음 황제인 선덕제(宣德帝) 치세에도 영향을 끼쳐 초기 명나라의 기틀을 잡아, 홍희제와 아들 선덕제의 치세를 인선의 (仁宣之治:인종[仁宗] 선종[宣宗] 치세)라고 부른다

선덕제(宣德帝, 1398 2 25~1435 1 31) 중국 명나라 5 황제(재위 1425~1435)이다. 이름은 주첨기(朱瞻基)이다.

묘호는 선종(宣宗), 연호는 선덕(宣德)이다. 영락제 장손이며 홍희제(洪熙帝) 성효소황후 장씨(誠孝昭皇后 張氏) 장남이다. 어렸을 부터 영민하였기에 조부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인 홍희제의 태자 폐립 문제를 거론할 때애도 영락제는 아들 홍희제보다 손자인 선덕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황태손 되어 제왕학을 일찍 배웠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있었다. 영락제의 외정시에 영락제를 따라 같이 수행을 다녔으며 영락제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아 영락제가 늘상 곁에 두고 총애하였다

<숙부 주고후의 반란>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에 숙부인 한왕(漢王)주고후(朱高煦) 반란을 일으킨다. 주고후는 영락제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 徐氏) 차남으로, 조왕(趙王)주고수와 더불어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장남인 홍희제는 인자했지만 병약했고, 차남인 한왕(漢王)주고후(朱高煦) 날렵하고 무술이 뛰어났으나 다혈질이고 난폭하여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셋째인 조왕(趙王)주고수(朱高燧) 또한 막내로써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역모사건이 발각되는 사태가 일어나 낙양으로 쫓겨났다. 영락제가 태자의 폐립 사건을 고민 , 한왕 주고후가 새로운 태자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조정에 있어 정난의 변을 떠올리게 했다. 정난의 건문제(建文帝) 숙부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피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비해, 선덕제는 자신이 직접 친정(親征)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숙부인 한왕 고후와 일족를 잡아 자금성의 서안문 안에 있는 소요성(逍遙城)이라는 건물을 새로 짓고 유폐시켰다. 선덕제가 감옥에 갇힌 숙부 한왕을 만나기 위해 소요성에 행차 하였을 , 숙부인 한왕 주고후는 선덕제를 발로 걷어 넘어트렸다. 일은 선덕제를 분노하게 하여, 선덕제는 한왕 주고후를 구리 항아리에 가두었고, 주고후가 항아리를 밀치자, 장작더미에 달궈 죽였다.

<평가>

선덕제는 아버지 홍희제와는 달리 과감하고 강력한 정치를 하였다.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황족을 엄히 다스렸으며 증조부인 홍무제 환관의 정치 개입을 막고자 환관의 학문 교육을 금지시켰지만, 선덕제는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內書堂) 설립하고 태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선덕제의 정책은 후에 명나라 조정에서의 환관의 정치개입을 야기시켜, 환관이 정사를 농락하는 사태를 발생시킨다. 외에도 선덕제의 시대에 회화를 즐겨 뛰어난 그림 작품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홍희제와 선덕제의 시대는 후대에 인선의 (仁宣之治) 불리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가족>

황후

·         공양장황후 호씨(恭讓章皇后 胡氏)

·         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 - 6 황제 영종(英宗) 생모.

후궁

·         선묘현비 오씨(宣廟賢妃 吳氏) - 7 황제 대종(代宗) 경태제(景泰帝) 생모. 효익장황후(孝翼章皇后) 추존되었으나, 대종 폐위후에 격하되었다.

·         공신태비 한씨(恭愼太妃 韓氏) - 조선여인이다. 남동생은 좌의정 한확(韓確)이며, 한확의 딸이 조선 성종 생모이며 연산군 할머니인 인수대비 한씨(仁粹大妃 韓氏)이다.

(이외 다수의 귀비가 있다.)

자녀

·         영종 주기진(英宗 朱祁鎭) - 명나라의 6 황제(정통제/천순제)

·         대종 주기옥(代宗 朱祁鈺) - 명나라의 7 황제(경태제)

순덕공주(順德公主) - 공양장황후 호씨()

·         영청공주(永靑公主) - 효공장황후 손씨()

·         상덕공주(常德公主) - 효공장황후 손씨(

정통제 / 천순제(正統帝 / 天順帝, 1427 11 29~1464 2 23) 중국 명나라 6 황제(재위 1435~1449, 복위 1457~1464)이다. 이름은 주기진(朱祁鎭)이다. 왕조 사상 복위를 황제로, 정통(正統)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명나라 황제 , 유일하게 복위하여 연호를 개원하였으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묘호인 영종(明英宗)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즉위>

묘호는 영종(英宗), 연호는 정통(正統) 천순(天順)이다. 선덕제(宣德帝) 장남이며 경태제(景泰帝) 이복형이다. 어머니는 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이다. 1435 선덕제가 죽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영종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太皇太后 張氏, 성효소황후) 섭정을 하고 양사기(楊士奇) 비롯한 현명한 신하들의 섭정에 의해 안정된 정국을 이끌어 나갔지만, 영종의 총애를 업고 환관 왕진(王振) 전횡을 일삼았지만, 영종은 이를 눈감아 주었다. 또한 이후 명나라는 환관의 전횡과 폐단으로 여러 차례 파국을 맞게 된다.

<토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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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왕진의 전횡과 더불어 명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조정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1449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 세력을 형성하고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자 오이라트족의 족장 에센은 명나라 변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王振) 영종에게 직접 친정(親征) 간청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친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영종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50만명의 군사중에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전쟁과 무관한 이들을 포함시켜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전투에서 비정예군이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하였음에도 여러 군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왕진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들의 패전소식은 북경(北京) 조정에 충격을 주었고, 남경(南京)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 960~1279) 예를 보았느냐며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에센족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나 환관 왕진은 와중에도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전횡을 일삼다가 피살당하였으며,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를 포위하여 명나라 황제 영종을 잡아갔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황제가 포로로 잡혀 것은 명나라 영종이 처음이다. 사건을 토목의 이라고 한다.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에센족은 전세의 유리함을 알고,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북경 조정은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朱祁鈺)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대종 경태제(代宗 景泰帝)이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 하지만 이미 이복동생인 대종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므로 영종은 태상황(太上皇)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경태제(景泰帝, 1428 9 21~1457 3 14) 중국 명나라 7 황제(재위 1449~1457)이다. 이름은 주기옥(朱祁鈺)이다.

묘호는 대종(代宗),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선덕제(宣德帝) 아들이며 정통제(正統帝 / 天順帝) 이복아우이다. 어머니는 선묘현비 오씨(宣廟賢妃 吳氏), 경태제가 즉위하면서 효익장황후(孝翼章皇后) 추존되었으나, 영종 복위하면서 선묘현비로 격하되었다. 1449 오이라트족의 침략으로 영종(英宗, 정통제/천순제) 직접 친정을 나간 사이에 패전을 거듭하면서 급기야는 황제가 포로로 잡혀갔다. (토목의 )

이에 북경 조정은 황제의 이복동생인 주기옥을 황제로 등극시켰고 주기옥은 영종이 포로로 잡혀간지 20여일 후인 1449 9 22 즉위하여 경태(景泰) 개원하였다. 다음 해에 오이라트 족과 화의가 성립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정통제가 조정에 송환되자 정통제를 상황(上皇)으로 올렸지만 남궁에 유폐하였다. 조정은 영종(정통제/천순제) 중심으로 하는 파와 경태제를 중심으로 하는 파로 나뉘어 졌다. 본래 황태자였던 영종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그는 병으로 죽고 만다. 1457 병을 앓는 도중 영종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는 폐위되었고, 폐위된지 후에 급사하였다. (탈문의 , 1457)

성화제(成化帝, 1447 12 9~1487 9 9) 중국 명나라 8 황제(재위 1464~1487)이다. 이름은 주견심(朱見深)이다

묘호는 헌종(憲宗), 연호는 성화(成化)이다. 선덕제 손자이며 영종(英宗) 효숙예황후 주씨(孝肅睿皇后 周氏) 장남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 영종이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갔으며 와중에 숙부인 경태제 즉위하였다. 경태제는 황태자였던 주견심을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태자로 책봉하지만, 주견제는 병사하고 만다. 1457 탈문의 변으로, 영종이 복위하여 다시 황태자에 책봉된다. 1464 영종의 뒤를 이어 여덟번째 황제로 즉위한다. 즉위 후에는 도교와 불교를 신봉하여 제사의식을 많이 거행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된다.

<만귀비의 전횡>

만귀비(萬貴妃) 본명은 만정아(萬貞兒)이고, 정식 호칭은 공숙귀비(恭肅貴妃)이다. 성화제의 후궁으로 성화제보다 19 연상이었다. 본래 궁녀였으나 성화제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후궁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죽었다. 이후 그녀는 성화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들을 강제로 낙태시키고 매질하거나 독살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황후 오씨(吳氏) 모함하여 폐위시켰다. 성화제가 만귀비를 황후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성화제의 생모인 주황후(周皇后) 원치 않았으므로 황후에는 책봉되지 못하였다. 현비 백씨(賢妃 柏氏) 성화제의 아들을 낳았고 만귀비에 의해 아들과 독살되었다. 어느 궁녀 기씨(紀氏) 성화제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만귀비에 의해 강제로 낙태약을 먹게 되고 별궁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기씨는 무사히 아들을 낳았고 아이가 명나라 성군으로 추앙받는 효종 홍치제(孝宗 洪治帝)이다. 기씨는 아들을 낳으면 아들과 함께 독살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환관에게 갓난 아들을 건내며 없애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환관은 안타까운 마음에 살려두었고 효종은 민가에서 몰래 양육되었다.(폐후 오씨가 몰래 양육했다는 설도 있다) 1475 성화제는 문득 자신을 이을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고 곁에 있던 환관이 궁녀 기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몰래 양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했다. 성화제는 기뻐하여 아이를 궁궐로 불러 들였고 황태자로 책봉했다. 만귀비는 이에 분하여 여러 차례 효종을 해코지 하려 하였으나 효종은 현명하였다. 또한 효종의 생모인 궁녀 기씨는 사건으로 만귀비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궁녀 기씨는 아들 효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효목순황후(孝穆純皇后) 추존된다. 이와 같이 잔인한 행위를 일삼던 만귀비는 1485 57세의 나이로 숨졌고, 성화제는 슬퍼하였다고 한다.

홍치제(弘治帝, 1470 7 30~1505 6 8) 중국 명나라 9 황제이며 이름은 주우당(朱祐樘)이다. 정식시호는 효종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孝宗 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이다. 어머니인 효목순황후 기씨(孝穆純皇后 紀氏) 홍치제가 18살되던 해에 아버지 성화제 후궁인 만귀비(萬貴妃) 의해 독살되었으나 총명하였던 그는 즉위 안으로는 대명률(大明律)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 반포하였고 법규를 정비하기 위해 대명회전(大明會典) 개정하였으며 밖으로는 건주여진(建州女眞)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명제국 중흥의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정덕제(正德帝, 1491 10 26~1521 4 20) 중국 명나라 10 황제이며 이름은 주후조(朱厚照)이고 정식시호는 무종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武宗 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이다. 홍치제(弘治帝)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불교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했으나 황제가 뒤로는 미녀를 후궁으로 삼아 쾌락을 즐기는 음탕한 생활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환관을 사랑하고 라마교 광신하였으며 유희를 좋아하여 국비를 낭비하였고 그로 인해 명나라 각지에서 농민들과 제후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무렵부터 포르투갈 내항(來航) 시작되어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기도 하였다. 남경(南京)에서 물놀이를 하다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그는 후사가 없었기에 사촌동생인 주후총(朱厚憁) 황위를 계승하였다.

가정제(嘉靖帝, 1507 9 16~1567 1 23) 중국 명나라 11 황제(재위 1521~1567)이며 이름은 주후총(朱厚熜)이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정식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 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 廣武洪仁大孝肅皇帝)이다.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 장자로 태어나 후사가 없던 정덕제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즉위 시기에 입경의례(入京儀禮) 생부인 흥헌왕에 대한 존호 제사 등의 문제로 오랜 기간을 대신들과의 갈등에 소비하였으며 황제의 생부 추존문제로 시작된 사건은 세종 치세에 정치의 문란과 부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임인궁변>

즉위 이후에도 가정제는 정사를 멀리하며 오직 불로불사(不老不死) 단약을 제조 하는 데만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심지어 그는 단약을 제조하기 위해 12~14세의 궁녀들에게 강제로 월경액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정제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가정21 (1542) 겨울, 임인궁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가정제가 단비(端妃) 조씨(曹氏) 궁에서 잠을 자는데 궁녀인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16명의 궁녀들의 가정제가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 사건이었다. 다행히 가정제는 황후 방씨(方氏) 급히 도우러 와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사건으로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능지처참당하고 단비 조씨와 영비(寧妃) 왕씨(王氏) 또한 일에 연루되어 주살당하였다. 또한 가정제는 다분히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 황후였던 진씨(陳氏)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가정제의 발에 걷어차여 복중에 있던 아들과 함께 절명하였고 두번째 황후였던 장씨(張氏) 가정제 자신이 만든 단약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출되어 냉궁에서 병사하였다. 가정제는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인 영비가 임인궁변으로 인해 주살되자 황후였던 방씨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황후가 거처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가정제는 그저 그를 방관만 하면서 황후를 구출하지 않았다. 결국 가정제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방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가정제에 의해 불에 타죽고 만다.

<평가>가정제 치세의 ()제국은 안으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밖으로는 몽골 왜구들이 명제국의 강역(疆域) 위협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정치의 문란과 부패는 끊이지 않았으며 명제국은 점점 위축되어 갔다. 가정제 치세에서 시작된 명제국의 쇠퇴는 만력제(萬曆帝) 천계제(天啓帝) 거치며 더욱 악화되어 가정제가 붕어한지 100년이 안된 1644 숭정제(崇禎帝) 끝으로 명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융경제(隆慶帝, 1537~1572) 명나라 12 황제이다. 이름은 주재후(朱載垕)이다. 가정제 셋째 아들이며 만력제 아버지이다.

형을 제치고 1567 12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5년간 재위하고 1572 사망하였다. 3 만력제 이었다.
만력제(萬曆帝, 1563~1620) 명나라 13 황제이다. 익균(翊鈞). 융경제 3남이다. 1572부터 1620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200년쯤 지난 때라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만력제는 정치를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끊어 놓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10년째 되던 그런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그것은 돈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돈에 대한 콤플렉스가 만력제의 장래는 물론 나아가 명나라의 장래를 망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 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24년째 되던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물론 현명하다고 없는 어리석은 패착의 연속이긴 했지만 적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 천자(天子) 또는 조선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 정책 탓이 매우 크다

태창제(泰昌帝, 1582 8 28~1620 9 26) 명나라 14 황제이다. 이름은 주상락(朱常洛)이고, 만력제 장자이다.

·         1620 8월 28 만력제 죽고, 태창제가 즉위하였다.

·         1620 9 태창제의 안색이 나빠졌으며, 병을 앓게 되었다.

·         1620 9 내감 최문승이 태창제가 복용한 다른 약을 체내에서 배출시키기 위해 설사약을 복용시켰다.

·         1620 9월 26 홍려시관 이가작이 만든 선단 2알을 연거푸 복용하고 갑자기 급사하였다.

천계제(天啓帝, 1605 12 23~1627 9 30) 명나라 15 황제이다. 이름은 주유교(朱由校)이고, 태창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선시 왕씨(王氏, ?~1619) 소생이다. 부왕 태창제 즉위한지 29일만에 갑자기 죽자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올랐다.

 

숭정제(崇禎帝, 1611 2 6~1644 4 25) 명나라 16 황제이다. 마지막 황제(1627~44 재위).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고, 천계제 동생이다. 이름은 주유검(朱由檢), 묘호는 사종(思宗의종(毅宗), 시호는 장렬민(莊烈愍). 형인 천계제(天啓帝 : 1620~27 재위)의 죽음으로 16세에 제위에 올라 쇠락해가는 나라

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천계연간에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처형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했다. 그러나 관료들과 군인들의 당파싸움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장군들은 당파싸움에만 치중해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만주족의 북동 변경지역 침입을 막아내는 데 소홀했다. 더욱이 전대 왕조의 부패로 국가 재정이 거의 탕진 되어 황제의 군대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명의 군대는 적군에게 투항하거나 연합하여 오히려 명을 공격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만주족의 침입으로 명의 운명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자 그는 더 많은 세금과 새로운 병사의 징발을 지시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처럼 과도한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반란군에 가담하는 숫자가 점차 증대했다. 결국 1644년 숭정제가 신임하던 환관 장군들이 그를 배신했으며, 반란군 이자성(李自成 : 1605?~45)이 수도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수도에 접근했을 때 조회(朝會)를 알리는 종을 두드렸지만 재상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결국 숭정제는 왕궁 옆에 있는 메이산 산[煤山 : 萬歲山이라고도 함]에 올라가 목매어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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