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역사) 중학생,고등학생을 위한 세계사 정리 - 중국 왕조의 시대순 변천사 정리

올드코난 2010. 7. 2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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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조의 변천간략하게 정리

    춘추 전국 시대(B.C.770--B.C.221)

  , 가을(춘추, 전국시대) : 살살 춥다(B.C.770)

    (B.C.221)

  (): 나눌 것(B.C.221)

    (B.C.202--A.D.8)

  () 많은: 노처녀(B.C.202)

    (8--23)

  (): (8)

    후한(25--220)

  후한(후한): 뇌물(25)

    삼국시대(220--265)

  삼국(삼국시대)으로: 날 납치(220)

    #1 (220--265)

  () 족으로: 날 납치(220)

    #2 (221--263)

  ()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3 (222--280)

  (): 니나노(222)

    서진(265--316)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516(316--439)

  16개국(516): 다 개방(316)

    동진(317--420)

  동지(동진) : 다 고생(317)

    남북조 시대(438--589)

  남북(남북조 시대) 축구: 라디오로(438)

    (589--618)

  () : 매우 적다(589)

    (618--907)

  () : 보고용(618)

    510(907--960)

  오대산(510): 절 청소(907)

    북송(960--1127)

  북송선(북송): 제법 찼네(960)

    남송(1127--1279)

  남성(남송): 기계농사(1127)

    원제국(1271--1368)

  원죄(원제국): 그냥 생김(1271)

    (1368--1644)

  밝은() : 꼭 달밤에(1368)

    (1636--1911)

  () 해봐: 그 복덕방에(1636)

 

    춘추 전국시대(B.C.770--B.C.221)

  춘추 전국 시대는 B.C.770년 주의 동천으로부터 진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된 B.C.221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을 다시 한, , 3국이 독립한 B.C.403년을 경계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이러한 명칭이 나온 것은, 전자는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하는 '춘추' 에서 비롯되며, 후자는 '전국책' 이라는 서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암기법) 봄 가을(춘추, 전국시대) : 살살 춥다(B.C.770)

 

    (B.C.221--B.C.206)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문명이 뒤떨어진 나라였던 진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B.C.221년 춘추 전국 시대의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진의 왕 정은 센양에 도읍한 후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하였다.

  (암기법) (): 나눌 것(B.C.221)

 

    (B.C.202--A.D.8)

  천하를 통일한 진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진에 반대하던 평민 출신의 유방과 귀족 출신의 항우가 7년간에 걸쳐 자웅을 겨루다가,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을 건국하였다.

  (암기법) () 많은: 노처녀(B.C.202)

 

    (8--23)

  중국의 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을 틈타 외척인 왕망이 세운 나라.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개혁과 주대의 부활을 꾀하는 복고 정책을 폈으나, 호족이 반발을 일으켜 곧 망하였다.

  (암기법) (): (8)

 

    후한(25--220)

  왕망의 찬탈 이후, 각처의 귀족, 호족의 반항이 극심해졌으며, 특히 산뚱의 적미적의 난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 때 하남에서 일어난 유수의 호족 집단이 호족 계급의 여망과 민중의 한실 부흥의 세론을 업고 신을 멸한 후 뤄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가 곧 후한의 광무제이다.

  그 후 1세기 후반은 후한의 전성기로, 흉노를 치고 서역 경영에 힘쓰는 등 중흥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암기법) 후한(후한): 뇌물(25)

 

    삼국시대(220--265)

  후한이 망한 뒤, 중국은 지방 군사 정권이 할거하여 군벌이 집권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는 조비의 위(216--265), 유비의 촉(221--263), 손권의 오(222--280)로 삼분되었다.

  위는 화북 지방을 통일하고 만주 지방으로 진출, 고구려까지 침입하였고, 촉은 성도에서 도읍하여 서남 중국을 활발히 개척하였다. 오는 강남을 차지하고 촉한과 연합하여 위나라의 남하를 견제하는 한편, 호남, 복건 등을 개발하였다.

  (암기법) 삼국(삼국시대) 으로: 날 납치(220)

 

    (220--265)

  건국자는 조비.

  조비의 아버지 조조는 후한 때에 정치적 실권을 독차지하였고, 위왕에 봉하여져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뒤를 이은 조비는 후한의 헌제를 강박하여 왕위를 빼앗고 위를 세워 뤄양에 도읍하였다.

  위는 3국 중에서 가장 강력하였으나, 265년 사마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암기법) () 쪽으로: 날 납치(220)

 

    (221--263)

  촉한이라고도 한다.  유비가 제갈양 등 명신의 도움을 받아 쓰촨 지방에 세운 나라인데, 도읍을 성도에 두었다. 촉은 3국 중 가장 약하였으나, , 오와 더불어 천하 3분에 성공하였다.  한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며 명신 제강양의 보좌로 국력을 배양한 촉은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양이 병으로 죽은 뒤 세력이 기울었다.

  (암기법) ()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222--280)

  건국자는 손권.

  강남에 자리 잡은 손권은 촉의 유비와 합세, 적벽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3국의 정립을 확립시켰다.

  220년 위나라가 흥하자 처음에는 이에 따랐으나, 222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 에 도읍하였다.

  (암기법) () !: 니나노(222)

 

    서진(265--316)

  3국 가운데 가장 강했던 위가 촉을 병합한 다음, 위의 권신인 사마염이 왕위를 빼앗아 진을 세워 다시 중국을 통일하였다. 시황제로 잘 알려진 진이나 남조의 진과 구별해야 한다. 5호의 침입으로 강남으로 이동한 동진에 대하여 서진이라고도 한다. 선비족이 세운 서진과도 구별해야 한다.

  (암기법)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5 16(316--439)

  중국을 통일한 진은 얼마 못 가서 왕족간의 세력 다툼과 5호의 침입을 받아 수도 뤄양이 함락되고 멸망하였다.

  5호는 진나라 8왕의 난을 틈타 중원으로 밀려 들어온 선비, 흉노, , , 저의 다섯 유목 민족을 말한다. 그 후, 화북은 5호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16국이 번갈아 흥망하는 이른바 516국 시대가 되었다.

  (암기법) 16개국(5 16): 다 개방(316)

 

    동진(317--420)

  진이 5호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자(316), 진의 왕족인 사마예와 그 일족이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 건강(지금의 난징) 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이 때까지 경시되었던 강남은 5호의 침입을 피해 화북 지방의 부호와 지식층이 대거 남하함으로써 동진 이래 급속히 개발되어 중국의 문화와 경제가 강남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암기법) 동지(동진) : 다 고생(317)

 

    남북조 시대(438--589)

  화북의 혼란(5 16국 시대)   선비족의 탁발규가 북위(또는 후위: 386--534) 를 세워 수습되었고, 강남에서도 이 무렵 동진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이때로부터 수의 통일까지 민족이 다른 왕조가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암기법) 남북(남북조 시대) 축구 중계: 라디오로(438)

 

    (589--618)

  후한의 멸망 이래 370년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한 사람은 수의 양견이었다. 북주의 외척인 양견은 문제로서 제위에 올라 장안에 도읍하여 국호를 수라 하고,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쳐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는 국내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는 동돌궐을 누르고 비단길을 통한 동서의 교역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도 드물게 보는 풍요를 누리다가 30년 만에 멸망하였다(618).

  (암기법) () : 매우 적다(589)

 

    (618--907)

  수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농민의 반란은 이연, 이세민 부자에 의해 당이 건국되면서 수습되었다.  산서의 호족으로 북주와 수의 장군이었던 이연은 수 말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있다가, 자신이 옹립한 수의 공제로부터 선양 형식으로 제위를 이어받아 스스로 당 고조가 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755--763) 을 계기로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기본 제도의 붕괴, 절도사의 횡포로 인한 재정의 곤궁, 환관의 전횡과 당쟁, 외적의 침입 등으로 시달리던 중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875--884) 이 일어났고, 이 난을 평정한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907) 함으로써 당나라는 289년 만에 멸망하였다.

  (암기법) () : 보고용(618)

 

    5 10(907--960)

  5대란 주전충이 907년 당을 멸망시킨 후, 960년 송이 일어날 때까지 54년간 화북 지방에서 흥기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일컫는데, 가장 강성하여 정세를 좌우하는 나라들이었다. 10국은 쓰촨과 강남 등지에 나누어 건국했던 남당, 오월, , , , 형남, 남한, 전촉, 후촉, 북한 등을 말한다.

  이 시기를 5 10국 시대라 하는데, 당 말기의 절도사들의 대립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혼란기였다.

  (암기법) 오대산(5 10): 절 청소(907)

 

    북송(960--1127)

  510국의 혼란이 약 60여 년간 지속된 뒤, 960년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5대의 혼란기를 수습, 통일하여, 변경을 도읍으로 정하고 제위(송 태조) 에 올라 송나라(북송) 를 건국하였다.

  태조는 황제의 독재권을 수립하기 위해 문치주의와 과거제를 통한 중앙 집권적 관료 제도를 수립하였다.

  1115년 건국된 여진족의 금이 송과 동맹하여 거란의 요를 멸망시킨 후(1125), 송의 무력함을 알게 되자 금은 송의 화북 지방을 침입하여 점령하고 흠종을 납치해 가니, 이 사건을 '정강의 변' 이라 한다(1127).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고 금이 화북을 차지하였다.

  (암기법) 북송(북송) : 제법찼네(960)

 

    남송(1127--1279)

  정강의 변이 있은 수, 휘종의 아들이 고종이 되어 강남의 임안에 도읍하여 송을 재건하니, 이로부터 송나라를 남송 시대라 한다.

  남송은 회수를 국경으로 하여 금과 화친하고, 강남을 개발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으나, 13세기 후반 신흥 몽고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암기법) 남성(남송) : 기계 농사(1127)

 

    원제국(1271--1368)

  헌종이 죽고 난 뒤, 칸위를 둘러싸고 아리크부가와 쿠빌라이가 대립하였으나, 헌종의 아우 쿠빌라이는 반대당을 제압하고 자신의 근거지였던 개평에서 즉위(5대 세조) 하였다.

  수도를 지금의 북경인 대도로 옮기고, 국호도 중국식으로 원이라 하였다.

  한민족에 대한 학대로 일관해 온 원나라는 계속되는 제위 분쟁과 군사비의 과다 책정,

라마교에 대한 광신 등에 따른 낭비와 재정 파탄으로 민중 생활이 도탄에 빠져, 드디어

백련교도들의 봉기인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신생 한민족인 명나라의 주원장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암기법) 원죄(원제국): 그냥 생김(1271)

 

    (1368--1644)

  원나라의 경제 정책 실패와 칸위 계승 분쟁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한민족의 외민족에 대한 저항 의식이 높아지자, 이를 틈타 백련교도들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던 주원장이 1368년 금릉에 도읍하여 대명을 세우고, 스스로 태조 홍무제에 즉위하였다.

  3대 성조가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산시성 출신의 이자성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여 17대 의종이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17 277년 만에 멸망하였다.

  (암기법) 밝은() : 꼭 달밤에(1368)

 

    (1636--1911)

  명의 세력이 후퇴하자, 만주의 여진족 추장인 누르하치는 세력을 모아 제부족을 통일하고 만주 흥경 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국, 1616년 국호를 후금이라 하였다.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조선, 내몽고를 정복하고 1636년 국호를 청이라 고쳤다.

  중국 최후의 왕조로, 강희, 건륭 시대에 전성하여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다가, 신해 혁명으로 12대로 멸망하였다(1911).

  (암기법) () 해봐: 그 복덕방에(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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